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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의 불길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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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51.6%라니, 이게 우연일 수 있나. 너무 노골적 조작 아닌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51.6% 득표율로 문재인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을 때였다. 당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로 승리를 장담하다 ‘멘붕’에 빠진 문 후보 지지자 사이에서 나왔던 얘기다. 박근혜 측이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날짜에 맞춰서 득표율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주장이 야권에서 거세지자 선관위는 개표 시연회까지 열며 득표율 조작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렸으나 소용없었다. 조작이 불가능한 개표 시스템을 설명하는 데 많은 말이 필요한데, ‘어떻게 우연히 51.6이 나올 수 있냐’는 직관적인 한마디를 이기지 못했다.
충격이었던 것은 당시 진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한 대학 교수 반응이었다. 선거 조작이 불가능한 시스템을 설명했더니, 되레 언론이 선관위 말만 듣고 조작 의혹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는다는 불만이었다. 그때 느꼈다. 이건 합리적 설명과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정선거 음모론은 진영을 옮겨 그 강도는 더 세졌다. 정보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음모론에 빠져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으니, 언론이 아무리 팩트 체크를 하더라도 이 암적인 음모론을 치유할 길은 더 요원해졌다. 당장은 보수 내에서 음모론이 득세하지만 좌우를 가리지 않고 심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음모론자들을 설득하기 어려운 것은 음모론이 세상의 변천을 설명하는, 일종의 세계관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과 정보는 궁극적으로 한계가 있어 모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증거는 없지만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 사안의 경우 음모론은 이 빈틈을 메우는 그럴듯한 설명 원리로 작동한다. 도리어 기성 언론이 은폐한 세상 이치를 누구보다 잘 꿰뚫어본다는 과대망상에 빠지게 하는 것이 음모론의 특징이다. 기성 언론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관계를 다루지 않는 동안, 유튜브의 음모론적 방송은 온갖 ‘뇌피셜’로 속 시원하게끔 설명해주니 합리적 이성이 당해낼 도리가 없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불황의 시대다. 번영기에는 음모론에 의지할 필요가 크게 없지만 경제적 불황으로 정치적 갈등이 커질 때는 사정이 다르다. 음모론은 세상의 나쁜 현상과 그 원인을 설명하면서 대개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이데올로기 핵심에 자리잡은 것이 ‘유대인 혐오 음모론’이었다. 국제 금융계나 정반대 위치의 좌익 공산세력에 유대인이 많다는 것을 근거로 유대인이 대공황을 불러일으킨, 세계를 지배하는 악이라는 신념이었다. 수많은 요소가 명멸했던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끝까지 남은 것은 지도자 숭배와 유대인 음모론이었다. 이 허황된 믿음이 대학살로 이어졌다.
요즘 시대 미국과 유럽 극우파에서 나오는 불법 이민자 혐오가 유대인 음모론의 변형으로 보인다. 경제적 궁핍의 원인을 불법 이민자 탓으로 돌려 희생양으로 삼는 구조가 유사하다. 한국에서는 ‘중국 혐오론’이 이 흐름에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온갖 사건의 배후에 중국을 등장시켜 악마화하고 있다. 경제 번영기라면 시들고 말 터지만, 살림살이가 어려워질수록 음모론은 지속적으로 군중을 끌어모아 집단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부정선거론과 중국 혐오론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한국 사회는 이미 그런 토양을 갖춘 상태가 됐다. 올봄 윤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질 게 유력한 조기 대선에서 판치게 될 음모론으로 심리적 내전은 더욱 격렬해질 것 같아 우려스럽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윤 대통령 비상계엄 파동에도 국민의힘 지지율이 오른 게 불길한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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