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패륜 아빠'도 유족구조금 받는다... '김레아 사건'의 또 다른 비극
2024.10.08 08:00
그때는 몰랐다. 이혼한 남편 대신 화이트데이를 챙기는 살뜰한 딸(22)이 남긴 편지가 마지막이 될 줄은. 세상을 떠나기 불과 열흘 전 딸은 '엄마가 지쳐 보여서. 덜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적은 편지와 꽃을 남겼다. 딸의 남자친구였던 김레아(27)는 최유선(가명·47)씨 눈앞에서만 길이 20㎝ 과도로 딸을 다섯 번 찔렀다. 유선씨는 옆구리 등을 열아홉 번 찔렸다. 악몽이길 바랐던 그날로부터 6개월이 흘렀다. 몸도, 마음도 성한 곳이 없지만 유선씨를 더욱 좌절케 하는 것은 각종 ‘제도’였다. 한국일보와 지난달 27일 만난 유선씨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범죄가 일어나기 전)는 몰랐어요. 법이, 제도가 이렇게 돼 있는 줄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줄은···.” 7일 한국일보 취재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실이 법무부, 기획재정부 등에서 받은 자료를 종합하면, 응당 유선씨에게 돌아가야 할 유족구조금의 ‘절반’만 그에게 지급된 것으로 확인됐다. 유족구조금은 생명·신체를 해하는 범죄로 사망하거나 다친 피해자 또는 유족이 받을 수 있는 국가 구조금으로 일종의 피해 보상 성격을 띤다. 유족구조금은 국가가 먼저 지급한 뒤 가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지급된다. 눈앞에서 딸을 잃은 충격이 남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자상에 의한 폐 손상 등을 치료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선씨는 유족구조금과 장해보상금 지급 대상자다. 문제는 부양 의무를 저버린 생부도 유족으로 인정돼, 유선씨는 유족구조금의 절반만 받았다는 점이다. 딸이 세 살 때 이혼한 후 월 30만 원의 양육비도 제때 지급하지 않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 ‘배드 파더스’에 올라간 남편도 신청 시 유족구조금을 받을 수 있다. '구하라법(양육 의무를 저버리거나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한 부모는 자녀 사망 시 상속을 제한하는 민법 개정안)'이 8월 국회를 통과했지만 유족구조금은 유족에게 발생하는 권리라 법 적용이 되지 않는다. 사각지대인 셈이다. 살릴 수만 있다면 받고 싶지 않은 딸의 ‘목숨값’이 매겨지는 과정도 유선씨 마음을 후벼 팠다. 현행법은 피해자 경제 수준에 따라 구조금을 매기는데, 피해자가 고소득자일수록 더 많은 구조금이 지급된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피해자일수록 지원이 더 필요할 텐데, 제도는 정작 구조금을 적게 지급하는 식으로 설계돼 있는 것이다. 유선씨 딸이 당시 대학생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수입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일실수입(사고 발생으로 피해자가 잃어버린 장래의 소득) 계산의 근거가 됐다. 정부는 유선씨 딸에게 ‘인부 일용노동임금’을 적용했다. 대한건설협회에 고시된 보통 인부 일용노동임금이 16만5,545원인 점, 평균 근로일수가 22일인 점을 고려해 월 평균임금을 364만1,990원으로 봤다. 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조금 지급액을 깎는 여러 이유를 댔다. 성인인 딸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있어서, 피해자 부모는 지급 3순위여서(범죄피해자보호법 제18조 제1항 제3호의 유족) 구조금이 깎였다. 뺄셈투성이인 각종 산식(24개월간 지급X3순위(3/6)X부모에게 나눠 지급한다(1/2))을 거친 뒤, 딸을 잃고 6개월 내내 누워 있는 유선씨 손에 총 2,185만1,940원이 쥐여졌다. 법무부에 따르면 유족구조금을 받는 유가족은 매년 줄고 있다. △2019년 185건(92억7,885만 원)이던 신청자 수와 지급액은 △2023년 111건(83억5,744만 원) △2024년 7월 54건(32억7,496만 원)으로 모두 쪼그라들었다. 요인은 복합적이다. 범죄가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가해자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될 수 있다며 유족구조금을 거부하는 유가족이 늘어난 영향도 있다. 유족구조금은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서 나간다.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은 주로 범죄자가 낸 벌금의 8%와 기금운용수익을 재원으로 쓴다. 매년 총 800억~1,000억 원 규모로 사업비가 편성되는데, 그중 실제 피해자에게 가는 ‘직접 지원’은 매년 전체 예산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넉넉지 않은 예산 대부분이 상담시설·보호시설 홍보비와 운영비 등 간접비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범죄피해자보호기금 총액은 1,337억 원, 그중 범죄피해구조금 및 치료비 등의 경제적 지원 등에 쓰인 직접 사업비는 약 321억 원에 불과했다. 지원을 늘릴 수는 없을까. 정부는 “기금 재원을 조세로 추가하기 위해선, 국민이 납세 의무에 따라 납부한 세금을 범죄 피해자 보호·지원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고, 입법적 결단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기금 고갈 우려도 제기된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다른 회계가 합쳐지며 여유자금이 늘었지만 범죄 피해자의 희생으로 생긴 벌금의 8%만으로 기금을 운영하는 건 지속가능성이 낮다. 이에 법무부는 최근 “중장기적으로는 여유자금이 감소하면서 벌금 전입금 상향(8%→10%) 등 재원 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관건은 기재부의 동의다. 시행령 개정 사항이라 재정당국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다. 박 의원은 “피해자 보호·지원, 구제 절차 등의 현행법 체계를 시급히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생업은커녕 일상이 무너져 제대로 거동도 하지 못하는 유선씨가 이불을 움켜쥐며 말했다. “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김레아를 엄벌할 수만 있다면 안 받고 싶어요. 우리 딸 목숨과 맞바꾼 그 돈, 제가 어떻게 받아요. 근데 딸에게 해 준 것 하나 없는 아빠한테 유족구조금이 간대요. 그것만은 정말 막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