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없는 버킨백 사고 SNS에 자랑"... 짝퉁의 진화, '듀프'가 나타났다

양어깨에 박음질된 두 줄의 선, 엄지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소매 구멍. '요가복계의 샤넬'이라 불리는 '룰루레몬'의 시그니처 '스쿠바 스웨트 셔츠'의 디자인이다. 한국에서 평균 14만~18만 원대에 판매된다. 운동복으로 손쉽게 사기엔 부담스러운 가격. 망설이는 소비자를 위한 합리적인 대안이 등장했다. 미국의 한 대형할인점에서 판매하는 스웨트 셔츠다. 양어깨에 박음질된 두 줄의 선과 소매 구멍까지 원조 룰루레몬의 디자인과 거의 흡사하다. 가격은 단돈 3만 원. 차이가 있다면 룰루레몬의 상표, '오메가(Ω)' 모양 로고의 유무다. 미국 젠지(Gen-Z·1990년대 중반~2010년대 초반 사이 출생) 세대에서 시작된 '듀프 열풍'이 한국에 상륙했다. 듀프(Dupe)란 '복제하다(Duplicate)'의 줄임말로, 원조 고가 상품의 저렴한 대체품을 의미한다. 옷, 신발, 시계, 가방, 화장품 등 패션과 뷰티 영역부터 텀블러, 청소기와 같은 생활용품까지 듀프의 영역은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디자인과 성능은 원조 제품과 유사하지만 가격은 크게 낮아 가성비를 따지는 젊은 세대들이 주 소비층이다. 듀프는 기존의 모조품(짝퉁)과는 차이가 있다. 샤넬, 루이뷔통, 구찌 등 명품의 로고와 디자인을 통째로 베끼는 모조품과 달리 듀프는 원제품과 완벽히 똑같아지는데 연연하지 않는다. 디자인을 복제해 '룰루레몬 스타일 후드 티셔츠' '까르띠에 맛 시계'와 같이 비슷한 느낌을 내는데 중점을 둔다. 디자인 개발에 투자하는 비용이 없으니 가격이 월등히 낮을 수밖에 없다. 대학생 박수연(23)씨는 얼마 전 아이돌그룹 '에스파'의 윈터가 신어 유행시킨 폴딩 부츠와 비슷한 제품을 구매했다. 해당 제품은 130만 원 상당의 이탈리아 명품 '디 아티코(The Attico)'의 부츠였다. 박씨는 이 부츠와 비슷한 디자인의 부츠를 온라인 쇼핑몰 테무에서 단돈 1만 원에 샀다. 박씨는 "마음에 드는 명품을 본 후에는 습관적으로 '테무 한 번 봐볼까?' 한다"며 "디자인이 비슷할 뿐 로고는 없기 때문에 짝퉁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패션업계가 상품 전면에 로고를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원조 제품과 모조품의 구별이 크지 않을 때가 많다. 듀프 소비자는 모조품 구매를 숨기지 않는다. 지난해 말 미국 월마트는 1,000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에르메스의 버킨백 디자인을 그대로 베낀 '워킨백(Wirkin Bag)'을 판매했다. 가격은 10만 원대. 워킨백은 출시하자마자 품절 대란이 일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워킨백을 검색하면, 이 상품을 구매한 뒤 리뷰하는 게시물이 넘쳐났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듀프 열풍에 대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조품의 목적은 그것을 진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지만 인플루언서들의 영향으로 모조품에 대한 낙인이 사라졌다"며 "듀프가 하나의 문화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은 모조품 구매 사실을 꺼렸던 과거와 달리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구매했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박세진 패션칼럼니스트는 "가품을 패션으로 소비하는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다"면서 "SNS를 통해 일상을 활발히 공유하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패션에서 '멋있다'보다는 '재미있다'는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주머니는 얇지만, 트렌드에 민감한 20대에게 듀프는 합리적인 소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SNS에는 명품 화장품과 유사한 저렴한 화장품을 추천하는 콘텐츠가 성행한다. 대학생 임세윤(22)씨는 "'정품 어그 부츠를 살 값으로 저렴이 어그를 색깔별로 5개 정도는 쟁일 수 있다'는 후기를 보고 공감했다"며 "저렴하면서 질 좋은 듀프 제품을 소비한다"고 했다. 지민주(22)씨도 스스로를 "듀프 인간"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수십만 원의 이탈리아 명품 '미우미우'의 호피 안경이나 국내 고가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안경과 유사한 제품을 3만~4만 원대에 구매했다. 그는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이 착용하는 유행하는 제품은 다 명품"이라며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고, 감당 가능한 가격대의 대안을 찾다 듀프 제품을 선택한다"고 했다. 디자인을 복제하는 듀프 소비의 법적 문제는 없을까. 이미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에르메스의 '눈알 가방' 사건이다. 대법원은 2020년 국내 한 패션브랜드가 에르메스의 버킨백과 켈리백에 눈알 디자인을 덧붙여 내놓은 가방이 에르메스의 성과물을 도용한 부정경쟁 행위라고 판단했다. 변호사인 이재경 건국대 교수(패션디자이너연합회 법률자문)는 "과거 사건에 비추어 볼 때, 듀프는 부정경쟁방지법상 타인이 상당한 노력과 비용을 들여서 거둔 성과를 부당하고 불공정한 경쟁 방법으로 침해하는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며 "다만 명품 브랜드들이 단속이나 소송 등 강공법으로 듀프에 철퇴를 가했다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브랜드 이미지가 손상될 수 있다고 보고 (대응하지 않고) 관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행 속도가 빠르고 디자인 등록 절차가 번거롭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박소현 패션칼럼니스트는 "일반 백화점 브랜드의 경우 한 시즌에만 200개 정도의 스타일이 나온다"며 "디자인 등록을 하려면 건당 등록 비용이 50만 원 정도 들고, 한 시즌 팔고 말 제품이기 때문에 디자인 등록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타인의 디자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좀 무뎌진 것 같다"며 "듀프를 하나의 놀이처럼, 즐기는 문화로 확산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