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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가 촉발한 ‘제주 한달 살기’… 건물을 낮춰야 관광이 활발해진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따라 인력을 기반으로 한 전통 산업의 붕괴는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우리나라 역시 피해갈 수 없는 상황으로, 이미 지난 1990년대부터 각종 자료에서 조짐이 나타났다. 이에 각종 정책이 도입ㆍ시행됐지만, 인구감소로 인한 지방 소멸은 오히려 더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쉽게 막을 수는 없겠지만, 방향을 늦추거나 전혀 대안이 없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지방 소멸을 막을 대응책으로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됐다. 이 중 가장 주목받은 분야는 ‘관광’이다. 그런데 최근 해외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방문 지역들이 흥미롭다. 도쿄나 오사카, 또는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들이야 익히 많이 알려졌지만, 최근엔 일본의 가루이자와나 오타루, 미국 조지아의 사반나(Savannah), 스페인의 빌바오(Bilbao), 발렌시아(Valencia)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의외의 지명들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소도시 여행은 특별한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2000년대 중ㆍ후반 제주도 한달 살기 열풍의 배경도 특별한 경험이 원인이었다. 소득 수준과 여가 시간이 증가하면서 ‘제주 살기’가 화제가 됐고, 이런 트렌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왜 하필 제주도일까? 각종 설문 자료를 보면 △제주만의 특색 있는 풍광 △여유로운 공간 등이 제주 살이를 선택하는 이유로 꼽힌다. 제주도민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낮은 도시 풍경과 경관, 따뜻한 제주의 날씨, 한라산이 어우러지는 자연 풍광 등 독특한 존재감이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런 관광 효과는 각종 문화 시설이 들어서게 만드는 자극제가 되는데, 이런 시설 중 뛰어난 건축적 완성도를 선보이며 다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선순환 효과를 자극한다. 실제로 2010년 이후엔 ‘제주도 건축’이 관광객의 방문 목적 중 하나로 등장했다. 성산일출봉 인근에 지어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일본)와 마리오 보타(스위스)의 건축물은 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트렌드 세터들의 발길을 불러 모았다. 동시에 △렌터카를 이용한 자유여행과 △색다른 숙소 경험을 중시하는 관광 패턴의 변화도 제주여행을 이끌었다. 호텔 이상의 숙박료를 감수하고서라도 공간 경험의 색다름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들의 공간 소비 추세와 맞닿아 긍정적 시너지를 일으켰다. 여기에 숙박 공유 플랫폼인 에어비앤비의 활성화도 한몫했다. 이런 흐름은 지난 십수 년간 제주도의 인구 증가를 자극했다. 특별히 제주도에 새로운 산업단지가 건설된 것도 아닌데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일각에서는 ‘제주도 국제학교 효과’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국제학교 학생과 부모는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곧 제주를 떠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문제는 제주 인구가 최근 다시 감소하고, 육지 유출이 심화한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제주다움’이란 정체성이 사라진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싶다. 제주 특유의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화려한 도시적 풍경, 더 나아가 우후죽순 들어선 난개발 도시 경관으로 대체된 것이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고층 건물과 아파트로 가득 찬 제주도의 경관은 매력도가 떨어진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입 인구가 늘면서 제주가 수도권과 비슷한 도시로 급속히 바뀐 점이다. 이는 비단 제주도뿐만 아닌, 비수도권 도시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장 큰 문제는 ‘지역다움’이 없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론, 언어나 관습 등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데도 정작 일반인들은 지역 이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형태 중심의 ‘랜드마크 전략’은 성공 사례가 거의 없고, 해당 지역에 적합한 공간 프로그램 역시 변별성이 없다. 극단 없는 문화센터, 수장량이 적은 도서관, 무엇보다 건축적 경험이 불가능한 완성도 떨어진 공공건축은 지역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 일본 구마모토의 경우 건축의 완성도(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운영과 프로그램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대응했다. 거주자가 4,000명에 불과한 이 지역에 전통인형극장 세이와분라쿠(清和文楽館)를 토대로 전통인형극단과 프로그램을 구성해 매년 200회 공연을 진행했다. 여기에 민박이나 숙박을 연계해 전국적인 방문 명소가 됐다. 어느 한 지역의 벽화 마을이 주목받으면 전국 여기저기 벽화마을이 탄생하고, 민속촌 같은 옛 마을 풍경이 반짝 인기를 끌면 전국 지자체들은 한옥 짓기에 예산을 투입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지역 특수성과 위치적 장단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백화점이나 공연장을 우후죽순 건립한다. 해안가의 고층 건물 같은 정책도 이런 유다. 이런 정책은 지역 특색이나 정체성을 극심하게 훼손한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거짓 이미지’만 각인될 뿐 지역 매력을 오히려 훼손시킨다. 특히 제조업과 새로운 산업이 미처 자리 잡지 못한 중소도시의 경우, 관광이 지역 경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도시 이미지 훼손은 치명적이다. 일본 구라시키(倉敷)시는 2000년대 이후 구도심을 미관 지구로 지정, 기존 도시 경관을 복원하고 있다. 특히 도시 경관이라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생활 정착’을 위한 각종 지원 정책, 상공업 지원 등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구라시키 구도심의 상공업체들이 온라인 판매를 되도록 자제하도록 권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매자는 온라인으로 물품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실제 구매는 구라시키를 방문해야 가능하다. 관광객 방문 및 도시 정주(定住)를 유도하는 섬세한 정책이다. 또 독일 함부르크의 하펜시티(HafenCity)도 눈여겨볼 만하다. 10층 안팎의 중저층 규모지만 다양한 기능을 가진 건물로 구성된 도시다. 또 도심 산책로도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꾸며졌다. 거주자의 생활을 배려한 공간 구성인데, 이런 구성은 관광객이 찾아가고 싶어하는 요소가 됐다.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던 정책이 친환경 정책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 좋은 사례가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가의 카멜바이더시(Carmel by the sea)라는 도시다. 미국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역임(1986~1988년)하기도 했다. 그가 이 도시에 고층 상업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며 시장 선거에 뛰어든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스트우드는 시장 당선 후 고층 상업시설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더 적극적인 친환경 생태도시 정책을 폈다. 건물을 새로 지을 땐 고층 건물을 허용하지 않았고 엄격한 외관 기준도 통과해야 했다. 이스트우트 이후 시장들도 이런 기본 원칙을 깨지 않는 수준에서 각종 생활 인프라를 개선했다. 그 결과 카멜바이더시는 매력적인 생태도시 및 친환경 도시 경관을 갖게 됐고, 이런 도시 특색은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았다. 앞서 언급했듯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해선 ‘관광’이 가장 효과적이다. 하지만 도시의 기존 산업 기반이 약하거나 소득 수준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관광객이 급증하면 ‘오버 투어리즘’이란 적지 않은 문제를 양산한다. 생활 공간을 축소시키고 소득기반이 약한 거주자들에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둘 사이의 ‘적정한 균형’이 필요하다. 그래서 ‘생활 관광’은 일종의 타협적 관광이다. 한달 살기가 일년 살기가 되고, 일년 살기는 정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관광과 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질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중소 도시들이 가진 자연 지형이나 풍광은 경쟁력이 적지 않다. 오히려 매력적인 풍광을 가진 곳이 차고 넘친다. 진해나 여수, 목포나 강릉, 곳곳의 자연 풍광과 지형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느 도시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지역주민들이 굳이 거대 도시와 비교하지 않고도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중소도시는 경쟁력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장점을 극대화할 도시경관을 만들어야 한다. 짝퉁 이미지만 강화할 초고층 건물로 해안가를 채울 이유가 없다. 건축사사무소 NCS lab 대표건축사 겸 서울건축사회 부회장, 서울건축포럼 의장으로 도시와 건축에 대한 다양한 시각으로 저술활동을 겸하고 있다. 광진구 우영미 사옥(서울 광진구)을 건축 설계해 독일 IF Design Award 건축부분 본상(2023년)을 받았고, 경부선 가산디지털 역사 현상설계에도 당선되는 등 다수의 건축설계 작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