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살며 200억 기부한 김장훈 "그렇게 벌었는데 그것밖에"

2024.10.07 12:00

가수 김장훈이 200억 원이 넘는 기부 규모를 두고 "그렇게 벌었는데 그것밖에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며 사회공헌활동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장훈은 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의 기부 철학을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번 세상을 떠나더라도 어떤 재단을 만들어서 대한민국에 밥을 배불리 못 먹는 아이들은 없게 하는 것을 꿈으로 세워놓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게 부여한 사명감"이라고 말했다. 김장훈은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기부 천사'로 통한다. 그는 자가 없이 월세를 내며 생활하면서도 기부 활동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장훈은 "사람들이 자꾸 '월세 살면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하는데 (기부하는) 첫 번째 이유는 '좋아서'이고, 그리고 '그냥'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김장훈은 자신이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하는 이유도 결국은 수익을 나눔 활동에 보태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돈을 버는 것은 쓰려고 버는 것이지, 쟁여놓으려고 버는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김장훈은 팬들을 위해 공연 티켓 가격도 저렴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는 "'물이 들어오면 노를 안 젓고, 티켓값 내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면서 "작년부터 가격을 내리고 청소년에겐 평생 2만 원에 티켓을 팔다 보니, 4,500만 원 적자를 본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손해를 보면서도 공연을 올리는 이유는 "공연은 낭만"이라서다. 그는 "적자가 커졌다는 건 자본주의적인 논리가 안 끼어들었다는 의미"라며 "(공연장 객석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사람들이 밀어주는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장훈은 오는 12월 17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개최할 계획이다. 지난 8월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에서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가 우승한 일이 계기가 됐다. 김장훈은 "NHK 방송으로 경기를 봤는데, 평생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며 "(학교 측과) 연결이 돼서 '아이들을 위해 축하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학교에서도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교토국제고에서 열리는 김장훈 공연에는 지역 교민들도 초청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만 김장훈이 '독도 지킴이'로 공개 활동을 해왔다는 점에서 일본 입국이 거부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김장훈은 "입국이 되나 안 되나 세 번 들어가 봤는데 아무 일 없이 쑥 들어갔다"면서 "(12월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장훈은 자신의 '부캐(부캐릭터·또 다른 자아)'인 '숲튽훈'에 관한 일화도 들려줬다. '숲튽훈'이란 김장훈 이름의 한자를 비슷한 형태의 한글로 바꾼 것이다. '숲'은 쇠 금(金)과, '튽'은 길 장(長)과 비슷한 모양이다. 김장훈은 "그런데 (김장훈의) '장'자는 길 장이 아니라 원래 장할 장(壯)이었다"면서 "아예 주민등록 한자를 (길 장으로) 바꿀 것"이라고 웃었다. '숲튽훈'은 기괴하게 보이는 문자 나열처럼, 수년 전 일부 팬들이 그의 독특한 창법 등을 놀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장훈은 "숲튽훈 덕분에 (과거 공연 영상) 조회수가 빵 터지니까 한 5곡을 역주행 시켜줬다"면서 "내 인생 최고의 곡은 숲튽훈이라는 캐릭터"라고 자랑했다.

병마와의 싸움 완주 앞둔 '봉달이' 이봉주

“매일 한 시간 정도씩 달리기, 등산, 수영, 걷기 운동을 돌아가면서 하고 있어요.” 이봉주(54)가 다시 신발끈을 조여 맸다. 2020년 1월부터 희소질환인 ‘근육긴장이상증’을 앓고 있는 그는 “대형병원과 유명 한의원을 다 찾아가 봤지만 치료와 수술(낭종제거)로는 딱히 질환이 호전되지 않았다”며 “재활로 이겨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스트레칭, 지압 마사지 등을 꾸준히 한 끝에 다시 달릴 수 있게 됐다”고 웃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챔피언, 한국 마라톤 최고기록(2시간 7분 20초) 보유자 등 숱한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봉달이' 이봉주를 지난달 20일 경기 화성 반월체육센터에서 만났다. 이봉주는 남들보다 늦은 고교 1학년 때 육상에 입문했다. 그는 “처음에는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금전적인 뒷받침이 힘들 것 같아서 그나마 돈이 덜 드는 육상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마저도 정식 육상부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는 "당시 다니던 천안농고에는 제대로 된 육상부가 없었다. 특별활동으로 편성된 취미반 수준이었다”고 육상과의 첫 인연을 돌아봤다. 당연히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이봉주는 집에서 학교까지 약 12㎞의 거리를 1시간 30분에 걸쳐 매일 뛰었다. 1년을 그렇게 달리다 보니 스스로도 실력이 향상되는 걸 느꼈다. 정식으로 육상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찰나에 마침 예산 삽교고가 ‘수업료 1년 면제’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다시 1학년부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지만, 그는 오로지 육상을 위해 기꺼이 전학을 결심했다. 처음으로 틀이 잡힌 곳에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삽교고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가 성적부진을 이유로 육상부를 해체해 이봉주는 또다시 갈 곳을 잃었다. 홍성 광천고(현 한국K-POP 고교)에 세 번째 둥지를 틀면서 숨통이 트였지만, 이번에는 대학 진학을 위한 성적이 필요했다. 이때 이봉주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고교 마지막 대회인 1989년 전국체전 10㎞ 단축마라톤에서 특기생 자격이 주어지는 3위에 가까스로 턱걸이했다. 이봉주는 “경제적인 여건을 생각해 월급을 받으면서 대학도 다닐 수 있는 서울시청(학과 등록은 서울시립대 야간 무역학과)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이봉주는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0년 제71회 전국체전 마라톤 풀코스 준우승으로 육상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성인무대) 첫 출전이라 아무런 기대도 없었고, 그냥 정신 없이 뛰기만 했는데 2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며 웃었다. 이어 “한 번 준우승을 하니까 욕심이 생겼다”며 “마라톤에 대해서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비로소 마라톤에 눈을 뜬 그는 이듬해 전국체전에서 첫 풀코스 우승을 일궈내며 확실한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은 언제나 온탕과 냉탕의 연속이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이봉주는 “선발전 한 달여를 남기고 출전한 도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당시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는데,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겼다”며 “결국 과도한 훈련으로 무릎 부상을 당했고, 선발전을 중도포기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 일로 그는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할 만큼 약 6개월간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어찌보면 당시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친구이자 라이벌인 황영조였다. 이봉주는 ‘몬주익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을 전지훈련지에서 지켜봤다. 그는 “손기정(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선생님 이후 한국의 첫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었으니 당연히 너무 기뻤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도 같이 나갔더라면 못지않게 잘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에 우울한 마음도 들었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그러나 이때 느꼈던 양가적인 감정은 결과적으로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는 이듬해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첫 세계무대 정상에 선 뒤 ‘마라톤 명가’ 코오롱마라톤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수확의 영광도 맛봤다. 1위 조시아 투과니(남아공)와 불과 3초 차이라 금메달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는 “스타디움에 들어와서야 3위 선수를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역전 은메달을 딴 셈이라 마냥 기뻤다”며 “레이스를 마친 후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도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 스포츠계에서 올림픽 은·동메달이 갖는 의미도 달라졌다. 기존에는 2·3위 선수들이 시상대에서 고개를 떨구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봉주 이후 은·동메달리스트들도 마음껏 기쁨을 표출할 수 있게 됐다. 애틀란타 대회 이후 그는 황영조를 잇는 한국 마라톤계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1998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준우승했고,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의 앞길에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봉주는 이듬해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불린 사건으로 마라톤 인생 최대 고비를 맞았다. 당시 그와 동료들은 △코칭 스태프 낙하산 인사 △소속 선수 부당 처우 △지나친 사생활 침해 등에 반발해 소속팀을 집단으로 이탈했다. 이후 선수들의 복귀로 사태가 해결되는 듯싶었지만, 양측의 갈등이 끝내 봉합되지 않으면서 결국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팀을 떠났다. 이봉주는 “복합적인 상황이었다”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도 “당시 기사에 나왔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함께 팀을 나온 오인환 코치를 비롯해 6, 7명의 동료들과 4~5개월간 무소속으로 훈련을 진행했다. 이봉주는 “자비로 먹고 자면서 훈련하다보니 환경이 열악했다”며 “그럼에도 ‘우리가 떳떳하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열심히 땀을 흘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성과도 냈다. 그는 이듬해 2월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 최고기록으로 2위에 오르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그러나 어렵게 출전한 시드니 대회에서 그는 앞서 달리던 선수들이 우르르 넘어지는 과정에 휩쓸리며 페이스를 잃었다. 그럼에도 이봉주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 그는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며 “시합은 망쳤지만 꼭 끝까지 달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돌아봤다. 결과적으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24위)을 냈지만, 이때의 완주는 그의 인생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다. 이봉주는 위기와 시련의 순간이 다가와도 이를 피하지 않고 언제나 묵묵히 정면승부를 펼쳤다. 2001년 보스턴 국제 마라톤 대회 정상에 서기까지의 과정도 비슷했다. 그는 “대회를 앞두고 충남 보령에서 훈련을 하던 중에 부친의 부고를 들었다”며 “곧바로 고향 천안으로 가 3일상을 치렀는데, 컨디션이 엉망이 된 상태라 (보스턴 대회) 우승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회를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날아갔고, 결국 1947년 서윤복, 1951년 함기용에 이어 51년 만의 한국인 챔피언이 됐다. 이봉주의 ‘오뚝이 정신’은 현역 막바지까지 이어졌다. 그는 37세에 출전한 2007 서울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막판 역전우승을 일궈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28위)했다. 또 ‘은퇴 레이스’였던 2009년 제90회 전국체전에서도 정상에 서는 기염을 토했다. 20년간 마라톤 풀코스에 총 44번 도전해 41번의 완주를 펼친 그는 은퇴 후 체육인 최고의 영예인 체육훈장 청룡장까지 받았다. 이봉주는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대대손손 남는 체육훈장의 의미가 가장 크다”며 웃었다. 이봉주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2020년 한 예능프로그램 녹화를 마치고 시작된 복근 경련(근육긴장이상증 증세)으로 한때 운전을 못할 만큼 고생했다. 때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재활에 매진했고, 그 결과 약 1년 전부터 서서히 달리기를 재개할 수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국제국민마라톤대회에서도 시민들과 함께 3.6㎞를 완주했다. 그래서 그가 마라톤 동호인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꾸준함이다. 이봉주는 “요즘 마라톤 인구가 많이 늘었는데, 처음부터 욕심 내지 말고, 매일 조금씩 뛰며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 올려야 한다”며 “이렇게 달리다 보면 공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주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상 세포는 필멸한다" 자연 노화를 긍정한 老化학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생리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Eugen Steinach, 1861~1944)는 고환을 이식받은 암컷 기니피그가 수컷처럼 다른 기니피그의 등에 올라타는 행태를 보이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고환이 남성의 성욕과 활력-회춘의 비밀이라는 19세기 이래의 오랜 가설을 ‘검증’했다고 믿은 그는, 고환의 두 기능 즉 정자와 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 생산 기능 중 전자를 억제하면 후자가 더욱 왕성해지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슈타이나흐 수술’이 그렇게 시작됐고, 강렬한 체험 후기들이 잇따르면서 당대 수많은 부유층 지식인들이 경쟁적으로 '슈타이나흐드(Steinached)'됐다. 만년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만 67세에 수술을 받은 예이츠는 젊은 여성과 공개 연애를 시작하며 “창조력이 되살아났다”고 선언했고, 더블린 언론은 그를 “회춘의 샘물을 마신 노인(gland old man)’이라 보도했다. 그는 약 6년 뒤 숨졌다. 세포배양 기술이 개발된 것도 20세기 초였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배양한 세포는 잘만 관리하면 무한 분열한다고 믿었고, 만일 잘못되면 연구자의 실수 즉 배지를 잘못 썼거나 오염된 탓이라 여겼다. 혈관봉합술과 장기이식 연구로 1912년 노벨상을 탄 프랑스 생리의학자 알렉시스 커렐(Alexis Carrel)이 닭 심장세포에서 추출한 세포를 40년 넘게 배양했다고 자랑(?)한 일도 있었다. 영생과 회춘을 향한 유구한 열망이 그렇게 전설의 골짜기에서 현대과학의 문턱을 넘었다. 1960년대 초 미국 펜실베이니아 ‘위스타르(Wistar) 연구소’의 젊은 연구원 레너드 헤이플릭(Leonard Hayflick)이 세포가 영생한다는 저 오랜 정설에 반기를 들었다. 암 유발 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위해 정상 태아 세포주(strain)를 배양하던 중 순탄하게 대사-분열하던 25개 세포들이 40~60회 분열한 뒤 복제 능력을 잃고 죽는 거였다. 반복 실험을 거쳐 자신의 실수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 그는 62년 암세포를 제외한 모든 세포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요지를 담은 대담한 논문을 발표했다. 생명-노화 연구의 토대가 된 이른바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가 그렇게, 도그마적 권위와 억압의 껍질을 부수고 세상에 소개됐다. “모든 것이 변화-노화하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그 흐름을 멈추거나 거스를 수 있다는 건 모두 헛소리(nonsense)”라고 주장한 세포노화학의 실질적 창시자 레너드 헤이플릭이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헤이플릭은 9세 때 삼촌이 선물한 ‘길버트 화학 실험세트’를 갖고 놀면서 과학에 입문했다. 아버지의 치과 보철 가공업을 거들며 가사를 돌보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고체 나트륨을 구입할 수 있도록 보호자 동의서를 써주곤 했다. 나트륨은 물과 접촉하면 수산화나트륨과 수소로 분해되면서 폭발하는 위험물질이다. 나트륨과 노끈, 깡통을 이용해 만든 그의 로켓은 3,4층 높이까지 날았다고 한다.그는 46년 펜실베이니아대(미생물학)에 입학하자마자 휴학, 18개월 간 육군으로 복무한 뒤 군인 장학금(GI Bill)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원도 몇몇 제약회사에 취직해 학비를 모은 뒤 진학했다. 돈이 없이 선택한 조기 입대였지만 그에겐 행운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야 했을 것이다. 1950년대 DNA 이중 나선구조가 발견되면서 바이러스학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56년 유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텍사스대 갤브스턴 메디컬 브랜치에서 2년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한 뒤 세균-바이러스 및 암 연구로 유명한 연구기관인 위스타르 연구소에 합류했다. 그 역시 처음엔 실험으로 드러난 ‘헤이플릭 한계’를 의심했지만 같은 결과가 거듭되자 동료 세포유전학자 폴 무어헤드(Paul Moohead,1924~2023)와 함께 실험을 반복했고, 그래도 못 미더워 당대 저명 세포 배양 전문가 3명에게 자신의 세포주를 주고 동일한 실험을 의뢰했다. 결과는 동일했다.하지만 갓 서른을 넘긴 햇병아리 연구자의, 세포생물학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주장에 학계는 냉담했다. 흑인 여성 헨리에타 렉스의 자궁경부암 조직에서 불멸의 '헬라 세포주’를 배양한 존스홉킨스 의대 세포생물학자 조지 게이(George O. Gey, 1899~1970)도 “레니(Leonard의 애칭), 이걸 발표하면 엄청난 소동에 휘말리게 될 거야”라며 말렸다. 정상세포를 40년 간 배양했다고 으스댔던, 2차대전 비시 프랑스의 우생학 과학자 알렉시스 커렐도 노벨상의 월계관을 쓰고 뉴욕 록펠러연구소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때였다. 권위의 ‘실험의학저널(JEM)’은 그의 논문을 반려했다. 1911년 닭의 암이 바이러스(Rous Sarcoma Virus)에 의해 발병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6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탄 병리학자 페이턴 라우스(F. Peyton Rous)도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라우스는 게재 거절 편지에 “조직 배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포가 체외에서 적절한 환경만 제공하면 무한 복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썼다. 자신의 발견이 세포 단위의 노화를 연구할 수 있는 단서가 되리라는 헤이플릭의 주장에는 “주목할 만한 무모함(notably rash)”이라고 일축했다. 지금도 세포생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라는 그의 논문은 61년 학술지 ‘실험세포연구(Experimental Cell Research)’에 실렸다. 실험으로 금세 반박될 수 있을 세포 불멸의 저 도그마는 그의 논문이 나오고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다. 그의 옳음을 인정한 권위 있는 과학자의 첫 판정은, 후천성 면역 내성을 발견한 공로로 6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탄 호주 바이러스학자 맥팔레인 버넷(Macfarlane Burnet)이 74년 출간한 책 ‘내재적 돌연변이의 발생(Intrinsic Mutagenesis)’이었다. '헤이플릭 한계'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노화의 유전학적 접근’이란 부제를 단 그 책이었다. 그 무렵까지 헤이플릭은 학계의 조롱과 유무형의 불이익을 감당해야 했고, 연구소에서도 만 10년간 준회원이었다. 그는 2011년 의과학저널 랜싯(Lancet) 인터뷰에서 “반백 년이 넘는 오랜 신념에 미사일을 쏘는 건 과학 분야에서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헤이플릭의 성과와 수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동식물에 기생하거나 땅속에 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세포체 세균을 통칭하는 마이코플라즈마(Mycoplasma)를 최초로 분리 배양한 것도, 그게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것도 62년의 헤이플릭이었다. 그가 마이코플라즈마 연구에 매달려 있던 무렵 당시 연구소장이 “엉뚱한 연구나 하라고 당신을 고용한 게 아니”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생백신과 경구용 백신을 개발해 수많은 상과 훈장을 탄 바이러스- 면역학계의 거인 힐러리 코프로프스키(Hilary Koprowski, 1916~2013)였다. 마이코플라즈마의 한 종이 일반 폐렴과 다른 원발성비정형폐렴(일명 Walking Pneumonia)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힌 헤이플릭의 논문은 62년 미 국립과학원회보에 실렸고,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로도 소개됐다. 헤이플릭은 “코프로프스키도 내 연구실까지 찾아와 떨떠름하게 축하를 해줬다”고 말했다. 근년의 바이러스 백신 연구에는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은 정상 인간의 세포가 주로 쓰인다. 헬라 세포주처럼, 불특정 다수의 실험 연구를 통해 배양하기 쉽고 미지의 변수들이 완벽하게 통제된 것으로 검증된 세포주는, 월드컵 경기의 공인구처럼 실험 연구의 편의뿐 아니라 신뢰도와도 관련되는 요소다. 소아마비와 홍역 볼거리 풍진 수두 대상포진 아데노바이러스 광견병 A형간염 등 역사상 가장 많은 감염 질병의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활용된 세포주인 ‘WI-38’도 그가 폴 무어헤드와 함께 62년 스웨덴의 한 병원으로부터 제공받은 여아 태아의 폐세포를 배양해 만든 거였다.마침 그 무렵 소아마비 백신 제조에 널리 쓰이던 원숭이 신장 세포주가 ‘시미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연구실에는 WI-38을 분양해 달라는 전 세계 학계와 백신 제약업계의 요청이 쇄도했다. 살아 있는 세포에 대한 특허권이 인정되지 않던 때였다. 그는 관례대로 배송 비용만 받고 무상으로 자신의 세포주를 전 세계에 배포했고, 세포 보관 및 배송 편의를 위해 미국립보건원(NIH)과 계약을 체결했다. 헤이플릭은 연구소측이 자기 몰래 영국의 저명 유전체학 연구센터인 웰컴 트러스트 생어 연구소와 WI-38 세포의 안정적 공급을 조건으로 거액의 로열티 계약을 체결, 정회원 연구비 등으로 활용해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준회원이어서 거기서도 소외된 그는 세포주 실제 배송 비용과 청구 금액의 차액 등을 적립한 세포배양기금의 소유권에 대한 유권해석을 NIH에 요청한 뒤 68년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마침 제안받은 스탠퍼드대 교수직을 수락했다. 그는 수백 개의 WI-38 앰플 전량을 액체질소 보관용기에 담아 아내와 세 아이까지 탄 자신의 폰티악 세단 뒷좌석에 싣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는 기존과 동일한 방식 즉 NIH 관행에 따른 배송료만 받고 WI-38을 계속 배포했다. NIH 행정 관료와 회계사는 그가 정부 재산을 절도해 영리사업을 벌인다며 76년 소송을 걸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학 연구실에 들이닥쳐 WI-38 앰플 전량을 압수했다. 스탠퍼드대 측도 자체 진상조사를 진행하자 그는 그 해 사직서를 냈다. 소송은 6년 넘게 이어졌다. 그 사이 학계와 업계 의견을 수렴한 연방 정부는 80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행정명령과 새 법(Bayh-Dole Act)으로, 정부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의 연구자도 연구 성과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살아 있는 세포에 대한 특허권도 인정했다. 소송은 82년 1월 법무부 중재 하에 합의로 마무리됐지만 사실상 헤이플릭의 일방적 승리였다. 그는 당시까지 적립된 세포배양기금 약 9만 달러와 WI-38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기금은 전액 소송 비용으로 쓰였다. 실업자가된 그는 82년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오클랜드의 한 아동병원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기 전까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관련 기관에 가서 줄을 서야 했다. 합의 직후인 82년 1월 15일 미국 과학진흥협회 저널 '사이언스'에 헤이플릭을 응원하는 저명 과학자 85명의 서명 메시지가 실렸다. “발군의 업적을 쌓아온 한 과학자의 경력이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사태에 개탄"하며 “헤이플릭 박사의 용기와 고독, 상처와 직업적 시련은 미래를 위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유사한 일이 빚어질 경우 (과학에 무지한 감사 공무원이나 관리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동료 검토 시스템을 통해 대응책을 모색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소송과 승리는 80년대 이후 미국을 포함 전 세계 수많은 대학과 공공 연구소 기반 생명공학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고, 헤이플릭은 그 소송을 자신의 과학적 업적 중 하나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플로리다대(82~88)와 캘리포니아대 교수- 명예교수(88~)로 노인학과 해부학, 면역학 등을 강의하며 275편의 논문과 다수의 책을 썼고, 미국 노인학회 회장과 NIH 산하 미국노화연구소 창립 이사, 13년 간 국제 학술저널 '실험 노인학'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59년 그가 세포 연구용으로 개량한 도립현미경(inverted microscope)은 현재 널리 사용되는 도립현미경의 원형으로서 2009년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됐고, 65년에는 역시 세계 최초로 분말형 배지를 개발했다. 분말형 배지는 액체에 비해 관리와 보관이 용이하고 값도 저렴해 지금도 널리 쓰이지만, 그는 어느 것에도 특허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2018년 '바이오메디컬사이언티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WI-38에 특허를 냈다면 그걸 팔아 번 돈으로만 런던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근년의 노화-수명 연장 연구 열기는 과하다 싶을 만큼 뜨거워 AMPK, 오토파지, 엠토르 등 어려운 용어들이 대중 매체에도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하지만 그가 ‘헤이플릭 한계’를 설득하던 60, 70년대 사정은 사뭇 달랐다. “생물노화학(biogerontology)이나 노화 연구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건 직업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만큼 인기도 없고 전망도 불투명한 분야였다.헤이플릭은 그 시절부터 줄곧 생명 수명이 아닌 건강 수명(healthspan)에 초점을 둔 연구, 치매 등 개별 노화 ‘질병’이 아니라 세포 차원의 근본적인 노화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100년 전에 비해 수명이 2배 늘어났다고 앞으로도 무한정 늘어나리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빈부 차이가 수명까지 좌우하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평가나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 대책 등은 덮어두더라도, 결코 개인과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1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의 노화를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끔찍한 비관론자다. 나는 그게 가능해져도 그렇게 살아남고 싶지 않다. 아돌프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에게 50년을 더 살게 해주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이들이 자연사할 때마다 사람들은 노화 현상에 대해 어느 신이든 그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노화 연구가 주류가 된 뒤로도 비주류였다. “나는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다. 하지만 친구보다 진실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인구학-수학적 분석을 근거로 학계가 추정하는 인간 기대수명은 아직까진 최대 120~125세 정도다. 헤이플릭보다 20여일 늦게 향년 117세로 세상을 떠난 세계 최고령 여성 마리아 브레니어스 모레라(Maria Branyas Morera)도 만년 인터뷰에서 “남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죽음”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고 한다.

대학 입시 개편 태풍의 눈... 'IB'라는 이름 들어보셨나요

이게 정말 될까. IB, 즉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 교육과정 얘기다. 2017년쯤 서울시교육청이 IB를 거론하더니 2019년 대구시와 제주도교육청이 처음으로 한국어로 된 IB과정 학교를 각각 3곳과 1곳 지정했다. 각 교육청별로 이런저런 시범 사업이 진행되다가 2024년, 그러니까 올해 초엔 중앙부처인 교육부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다 'IB연구실'이란 조직을 새로 만들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그리고 초중고교 교육과정을 총괄하는 조직인 평가원이 IB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본다는 얘기다. 학계도 움직인다. 올해 3월 '한국IB교육학회'가 새롭게 만들어졌고 곧 대규모 학술대회도 연다. 여기에다 최근 중장기 교육정책 방향을 결정짓는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수능 서·논술형 평가 도입, 내신 외부평가제 도입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IB를 떠올리게 하는 얘기다. 국교위는 '산하 전문위원회 차원의 논의'라 깎아내렸다지만 우리도 IB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건 아닐까. 이웃 일본은 국가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2013년 IB에 이미 뛰어들었다. 교육개혁이라면 우린 늘 "4차산업혁명 시대, 최첨단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남 따라 하기 바쁜 기존의 획일적인 주입식 암기식 교육 대신 비판적 창의적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뒤는 대개 다람쥐 쳇바퀴다. 한국에서 그게 되겠어,라며 물러선다. 그리곤 또다시 변별력 타령에 불수능, 물수능 걱정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 이른바 '조국 대전'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아빠 혹은 엄마 찬스로 만들어낸 스펙'이 논란거리가 되자 많은 전문가의 반대에도 정부가 꺼낸 대응 카드는 '정시 확대'였다. IB는 이 도돌이표를 끝낼 수 있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대안이다. IB는 1968년 유엔 근무자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시작됐다. 모든 평가는 논술로 진행되고, 과목별로 저마다의 주제를 정해 집중탐구한 뒤 이를 최종 보고서 형태로 만들어 내놔야 한다. 실무 총괄본부는 네덜란드에, 채점 본부는 영국에, 한국을 관할하는 아시아 본부는 싱가포르에 있다. 개별 학교에서 평가를 진행하면 전체 채점 본부에서 그간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체 평가를 다시 검증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외부평가를 진행한다. 각국에서 온 다양한 아이를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서 디플로마 프로그램(DP·Diploma Program)이라 불리는 고등과정은 하버드 등 세계 유명 대학이 선호하는 과정이다. 저마다의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공부를 해본 경험이 있고, 객관적 지표에 따라 평가받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영어 IB과정을 택한 일부 외고 졸업생들이 해외 대학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있고, 일반 학교의 경우는 수능을 볼 수 없어 학생부종합전형(학종) 형태로 대학에 진학한다. 그간 IB 도입을 부르짖어왔던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을 지난 1일 서울 동작구 방배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IB 얘기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저로서는 기쁘고 또 감사하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지금 IB과정을 채택한 후보학교가 90여 개교, IB과정에 대해 이해도를 높이고 있는 관심학교가 300여 곳 정도 되는데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IB과정을 겪어본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한국과 맞지 않다, 사교육 자극한다, 해외모델이라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 소수 특권층 교육이 된다, 이렇게 걱정하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일단 한번 겪어봐야 한다." 이 소장 이야기의 출발점은 2014년 내놓은 책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서 시작된다. 서울대에서 교육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학습개발센터에서 교수법을 연구하던 그에게 서울대 교수들이 털어놓은 고민은 '학생들이 수동적이고 창의적이지 않다'는 거였다. 그래서 서울대 최우등생들, 미국 미시간대 최우등생들의 공부법을 비교 분석했다. 결론은 뻔했다. 미시간대 학생들은 무엇을 하건 저마다 색깔을 드러내느라 여념이 없는데, 서울대생들은 강의하는 교수님의 농담,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다 받아 적는 '적자생존'이었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일 리가 없다. 그래도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인데 다른 게 없을까, 온갖 가정을 다 넣어 아무리 분석해봐도 적자생존, 그것뿐이었다. 이게 학생들의 문제일까. -문제는 뭐였나. "핵심은 학생들이 수동적이고 창의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정작 점수를 매길 때는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다른 얘길 써놓은 학생들의 점수를 깎았다는 거다. 자기가 강의 중에 한 얘길 써야 '아 이 학생 공부했네'라며 점수를 준 거다. 가르친 것과 다른 얘기를 하면 공부 안 했네, 기분 나쁘네라고 반응해버린다. 목표는 '창의적 인재 육성'인데 평가는 '교수 말씀 그대로 베끼기'를 해버린 셈이다. 목표에 맞는 평가를 하라, 이 간단한 원리가 관철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서울대에서는...'을 내고는 난처해지기도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책 출간 시점이 때마침 국회의 국정감사 때였고 의원들은 이 책을 근거로 서울대를 비판했다. -서울대에선 불만이 없었나. 곤란했겠다. "그때 '이제 관악 쪽에다 발 디딜 생각은 말아라' 같은 날 선 농담은 꽤 들었다. 하지만 그때 오세정 교수님이 맞는 얘기라고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글을 써주셨다. 나중에 뵈니까 자신도 미국 유학 때 엉터리같이 들려도 자기만의 생각을 거침없이 풀어놓더니 그걸 화두로 삼아 박사논문으로까지 연결해서 써내는 미국 학생들이 정말 놀라웠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오 교수님은 경기고, 서울대를 거치면서 수석에 수석을 거듭한 분인데, 그런 분도 충격이었다고 하면 우리 교육이 정말 뭔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서울대에서는...' 이 책은 이 소장을 여러 곳으로 이끌었다. 경영대, 의대 등 개별 단과대와 강의 재설계 협업을 진행했다. 연세대 의대에선 '당신 책 보고 학생 평가 방식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꿨다'는 말까지 건넸다. 대학 말고 우리 공교육, 중고교 과정도 한번 봐달라는 제안도 줄이었다. 여기에서도 문제의 핵심은 똑같았다. 목표와 평가가 따로 놀았다. -어떤 면에서 그랬나. "영어의 한 예를 들어보면, 난 처음에 국가교육과정이 쓰기와 말하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줄 알았다. 수능, 내신에 그런 평가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교육목표에 보면 쓰기와 말하기가 들어가 있다. 목표가 있는데 이걸 왜 평가하지 않느냐 했더니 둘 사이 대화를 제시한 뒤 상대 질문에 적절한 반응을 고르라는 게 말하기 평가였고, 한 문단을 준 뒤 a, b, c, d 중 어느 글이 좀 더 자연스럽게 이어지느냐 묻는 게 쓰기 평가였다. 그게 어떻게 말하기, 쓰기 평가인가. 강조하자면, 평가하지 않는 능력은 길러지지 않는다." -그러면 IB과정은 어떻게 다른가. "이번에 IB과정 졸업생을 배출한 대구의 한 고등학교 사례를 들고 싶다. 이 학교는 2학년 올라갈 때 IB과정과 일반 고교 과정 중 선택하게 했다. 성적 좋은 아이들은 위험부담이 높은 IB를 회피했다. 그러다 보니 IB를 택한 학생들의 첫 테스트 결과는 대부분 1, 2등급이었다. (한국은 1~9등급 중 1등급이 최상위권이지만, IB는 1~7등급 중 7등급이 최상위권이다.) 그런데 졸업 무렵엔 5, 6등급이 제일 많았다. 심지어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한 학생까지 나왔다. IB는 이렇게 문제를 낸다. 시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친구를 위로하고 극복 방법을 조언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써보라, 교장 선생님에게 어떤 수업의 개선방안을 제안하는 이메일을 써보라. 말하기, 쓰기 평가는 이런 거다. 이렇게 평가하니 졸업할 무렵엔 IB과정 아이들이 일반 과정 아이들보다 영어를 훨씬 더 능숙하게 말하고 쓴다." -단순해 보이지만 어려운 문제다. "IB가 마냥 쉽지는 않다. '역사'라면 우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쭉 놓고 '시대 순으로 배열하시오' 같은 문제를 낸다. 하지만 IB에서는 '전쟁이 사회 변화를 가속화한다는 관점에서 당신이 알고 있는 전쟁 2가지 이상 사례를 들어서 2시간 동안 서술하시오' 하는 식이다. 자기가 아는 거, 생각한 거 쭉 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관점과 주장, 예상되는 반론, 그에 대한 재반론까지 들어가야 점수가 높게 나온다. 왜? 목표가 비판적이고 창의적 인재 양성이니까." -학생들이 엄청 힘들어할 것 같다. "여러 측면이 있다. 어느 왕 때 무슨 사건, 이 사건은 몇 년도, 이런 암기력 테스트는 안 한다는 걸 명확히 보여주니 그 측면에선 학생들이 좋아한다. 또 남 생각을 억지로 떠다 먹이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쓰게 하는 거니까 그 부분도 좋아한다. 하지만 괴로운 부분도 있다. IB과정은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한 네 생각은 뭔데?'를 계속 묻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내고, 여러 반론 속에서 스스로 수정, 보완, 발전시키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제 IB과정을 접한 학생들을 만나 보면 '엄청 힘들었지만, 그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이라고들 말한다. 자기 머리를 쥐어 짜내서 뭔가를 해본 거다. 나는 그게 '교육'이고 '성장'이라고 본다. 암기식 교육이 문제라고 해서 공부시키지 말고 뛰어놀게 하자는 건 해답이 아니다." -많은 자료와 경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에서 중산층 엘리트 교육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많은 오해 중 하나다. 대구의 1, 2등급 하위권 학생들이 5, 6등급으로 올라선 것만 봐도 이미 틀렸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나. IB는 각 지역별 개인화된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요구한다. 제주 IB과정 고등학생 사례를 들면, 이 학생은 고춧가루를 빻을 때 씨를 넣고 빻는 것과 빼고 빻는 것의 맵기, 식감, 질감, 영양 등의 차이에 대한 비교분석을 자기 주제로 정했다. 재미는 있지만 이 과제 수행하느라 '실험실 지박령'으로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 스스로도 '공부에 별로 관심도, 재주도 없다'던 학생이 가천대 바이오 전공에 합격했다. IB과정은 이런 학생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도 진보 쪽에서는 IB교육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제주 사례는 더 귀하다. IB과정을 제주에 도입한 사람은 이석문 전 교육감. 해직교사, 전교조 지부장 출신이다. 그가 신기하게 본 건 IB과정을 택한 제주 국제학교였다. 돈 많은 사람들은 왜 아이를 저기에다 보낼까, 저걸 공교육에서는 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때 이 소장과 인연이 닿았다. '진보 운동권 교육감'인 그가 이 소장에게 던진 다섯 가지 질문은 IB에 대한 온갖 우려의 압축판이다. '외제'라 불편하다, 귀족 엘리트 교육 같다, 기존에 잘하는 애들만 유리할 것 같다, 사교육이 폭발할 것 같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교사들이 해낼 수 있을까. 이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이 소장은 이 학교 사례를 두고 몇 년에 걸친 종단연구도 수행했는데 학생, 학부모, 교사 등의 반응은 호평 일색이다. 이를 알아본 제주대에서는 어떻게 하면 IB과정 학생들을 대학이 선발할 수 있을지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대학도 IB과정을 알아보는 건가. "맞다. 한때 기회균등선발, 지역균형선발을 두고 '기균충'이나 '지균충'으로 불러서 문제가 된 적 있지 않은가. 그런데 대학 내부 자료를 들여다보면 사지선다 충실하게 풀어서 정시로 들어온 아이들보다 지역이나 기회균등선발 아이들의 성취도가 더 높다. 서울대 같은 최상위권 대학부터 중하위권 대학까지 다 그렇다. 객관식 문제 풀이에 능한 아이들이 실제로는 가장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거, 대학들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좋다, 나쁘다 보다 어쩌면 무서워서 못 하는 게 아닐까. 공정성 문제다. "그래서 지역적 이슈를 개별적 주제로 업그레이드해나가는 과정을 평가한다는 게 중요하다. 제주 국제학교 학생 절반 이상이 서울 강남 아이들인데 탐구주제는 감귤 농사, 4·3사건 이런 거다. 그리고 처음 아이디어 제출 때부터 보완, 수정 과정을 다 확인하고 평가한다. IB과정을 도입한 한 외고에 가보니까 보고서에 쉼표 찍은 거 하나까지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묻고 답하더라. 학교에서 1차 평가하고 관련 자료를 온라인에 올리면 외부에서 2차 평가한다. 이런 환경이면 자기가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건 말문이 막혀서 못 하게 된다." -선생님들의 계속적인 피드백이 필수다. 현장 선생님들의 업무부담은. "요즘 우리 사회 화두 중 하나가 바로 '교권회복' 아니었던가. IB는 현장 탐구를 중시하기에 결국 현장 교사들의 교권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물론 IB과정은 낯선 것이라 교사들도 당연히 연수를 받아야 하고, 또 그 교사가 IB학교에 오래 있을 수 있도록 인사 등에서 배려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집중하려면 행정 업무도 줄여줘야 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해외 IB를 들여와 쓰자는 건 아니다. IB를 통해 논술, 탐구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평가되는지 충분한 경험과 합의가 쌓이면 IB과정과 같은 시스템을 우리가 자체적으로 만들면 된다. 그게 이 소장의 궁극적 목표다. 2019년 IB가 시험 가동에 들어가면서 이범 교육 평론가, 박하식 교장, 홍영일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교육팀장 등과 함께 'IB를 말한다'는 책을 내놨는데, 이들과 함께 한국판 IB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은 후속작을 준비 중이다. 이 소장이 이렇게 열혈 IB 전도사가 된 건 개인적 경험도 작용했다. 바로 큰딸. 한국의 공교육은 딸을 '수포자'라 불렀는데 IB과정은 "계산은 느려도 수학적 사고방식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 딸은 대학에서 수학을 복수전공하더니 지금은 글로벌기업에서 IT기업 평가 업무를 하고 있다. 이 경험은 다른 눈을 뜨게 해줬다. "우리 딸과 달리, 재능이 발견될 기회를 잡지 못한 아이들이 그간 얼마나 많았을까"라는 거다. "좋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한국에서 되겠어?"라는 코웃음, 조롱, 비아냥, 비판,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이 소장이 지금까지 IB라는 화두를 붙들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