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고르는 에너지 아끼겠다"던 '너드' 저커버그는 왜 회색티를 벗었나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의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커넥트 행사가 열린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멘로파크 메타 본사.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가 다소 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며 이렇게 말했다. "스마트폰을 이을 진정한 차세대 컴퓨팅 디바이스가 될 것이다." 그가 착용한 건 메타가 이날 대중에 처음 공개한 증강현실(AR) 안경 '오라이언'(Orion) 시제품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홀로그램 그래픽을 덧씌워 보여주는 스마트 안경으로, 기존 안경처럼 착용한 상태에서 메시지 전송은 물론 통화, 동영상 시청 등도 가능하게 하는 장비다. 실제 제품이 언제쯤 출시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보여준 것만으로 시장은 환호했다. 메타 주가는 오라이언 공개 후 지속적으로 올라 지난 3일에는 582.77달러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가였다. 오라이언이 워낙 큰 주목을 받은 탓에 행사 당일에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같은 날 저커버그가 선보인 것 중 뒤늦게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그가 입고 나온 옷이다. 청바지에 검은색 반팔 티셔츠인 그의 차림새는 언뜻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스타일처럼 보였지만 티셔츠에는 평범하지 않은 글귀(Aut Zuck aut nihil)가 새겨져 있었다. 고대 로마 황제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고 통치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표현할 때 썼던 라틴어 문구(Aut Caesar aut nihil)에 자신의 이름(Zuck)을 넣어 변형한 것으로, '저커버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커넥트보다 2주 앞서 참석했던 한 팟캐스트 대담에서도 그는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고통을 통해 배우다'라는 뜻의 문구(pathei mathos)가 적힌, 역시 검은색 티셔츠였다. 다른 듯 닮은 두 장의 티셔츠는 저커버그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 마이크 아미리와 함께 제작했다고 한다. 티셔츠를 직접 디자인해 입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이 회자되는 것은 주체가 다름 아닌 저커버그라서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함께 그려질 만큼 저커버그는 회색 상의만을 고집스럽게 착용해 왔다. 적어도 페이스북이 세상에 나온 2004년부터 그는 대부분의 공식석상에서 회색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가 정확히는 '젖은 신문지색'(wet-newspaper gray)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비꼰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취향이 적어도 대다수 사람들에게 멋있거나 세련됐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패션 문외한'에 가까웠던 저커버그의 차림새는 그러나 올 들어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직접 옷을 디자인해 입을 만큼 그의 패션에 대한 관심은 진심인 듯하다. 매번 같은 옷을 입는 데 대해 그가 "내 모든 에너지를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데 쏟기 위해서"라고 '철학'까지 밝혔던 터라, 갑자기 외관에 많은 신경을 쓰는 듯한 모습은 호기심과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패션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시점상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저커버그의 변신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저커버그에게 본격적인 변화가 포착된 것은 올해 초부터다. 늘 군인처럼 바짝 깎은 머리를 고수했던 그는 지난 2월 자연스럽게 기른 곱슬머리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의상 변화는 더 극적이었다. 회색 티셔츠가 흰색, 검은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털 재킷을 입고 한국을 방문하고, 꽃무늬로 뒤덮인 명품 정장을 착용한 채 인도 억만장자 무케시 암바니 아들의 결혼식을 찾았다. 은색 체인 모양 목걸이를 차고 메타 행사에 등장하는가 하면, 커다란 펜던트가 달린 금색 목걸이를 하고 언론 인터뷰 등에 자주 나서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처럼 그의 패션이 갑자기 변한 데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가장 지배적인 분석은 그가 최근 몇 년간 극심한 사업 부진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며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메타는 2021년 메타버스에 올인한다며 페이스북에서 사명을 바꾼 이후부터 매출, 이익, 주가 등이 고꾸라졌다. 그 여파로 지난해 2만 명 이상을 내보내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하면서 저커버그의 리더십은 치명상을 입었다. 외풍은 더 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미국 대선 당시 정상적인 선거 진행을 지원하는 단체에 기부한 것을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측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 이는 그와 메타를 내내 괴롭게 했다.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미성년자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해악을 묵인하고, 오히려 이용해서 수익을 올려왔다는 이유로 의회에 불려나가 십자포화를 받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이런 시간을 거치며 미국에서 그의 이미지는 '어린 나이에 성공한 천재 엔지니어'에서 '그래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유약하고 무능한 CEO'로 바뀌어갔다. 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안 좋지만 메타에도 치명적이었다. 그와 메타를 동일시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테크업계에서는 저커버그가 이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너드'(nerd·컴퓨터만 아는 괴짜)에서 '상남자'로 바꾸고 있는 것으로 본다. 외향적이고, 주체적이며, 변화에 능동적인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옷장에 '개성'을 더했다는 것이다. NYT는 "회색 티셔츠에서 벗어난 것은 (CEO로서) 보다 유연해진 면모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저커버그가 최근 제작해 입는 옷에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욱 분명하게 반영돼 있다. 영국 가디언은 "저커버그는 대담한 레터링(글이 적힌) 티셔츠들을 통해 자신이 왔고, 보고, 정복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이길 것이라는 의사를 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스스로는 부인하고 싶을 수 있으나 '앙숙'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듯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특히 그가 주짓수 훈련하는 영상과 사진을 주기적으로 올리거나, 선글라스를 끼고 양손에 맥주와 성조기를 든 채 웨이크보드를 타는 사진을 게재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런 분석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머스크 역시 주짓수 마니아이고, 괴짜라는 평가를 받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올려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한때 '현피'(온라인에서의 다툼이 실제 몸싸움으로 이어진다는 뜻의 은어) 직전까지 갔을 만큼 나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둘은 젊은 나이에 회사를 성공시켰다는 점, 그를 통해 젊은 나이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점,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계속 직접 경영하고 있다는 점, SNS 업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겹치는 지점이 많다. 공교롭게도 이날 기준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에서 세계 부호 1위(머스크)와 2위 자리에 나란히 올라 있기도 하다. 테크업계에서는 이렇게 닮은 점이 많다는 점이 저커버그를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이 많다. 머스크가 자신처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데도 막강한 팬덤(엑스 내 최대 팔로어 보유자)과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 대해 내심 부러움을 느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커버그의 변신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한 시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터틀넥과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만 착용하며 유명해진 것을 계기로 실리콘밸리 경영자들 사이에는 한 가지 스타일만을 고집하는 이른바 '잡스 스타일'이 20년 넘게 유행해 왔다. 하지만 요즘 젊은 층은 그런 스타일을 식상하고 고루하게 여기고, 이런 경향이 다양한 패션으로 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NYT는 "실리콘밸리가 '포스트 잡스'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