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계엄 시대에 부모로 사는 일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2·3 불법 계엄 다음 날 아침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고, 계엄이 무엇인지 초등학교 1, 4학년인 아이들에게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나 역시 극심한 혼란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같은 감정적인 말만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며칠 후 한 지상파 방송사의 계엄 다큐멘터리를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부모가 해주지 못한 종합적인 설명을 듣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길 바랐다.
그땐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일이 이렇게 많이, 오랫동안 계속될 줄 몰랐다. 국회에 총부리를 겨눈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하는 국회의원, 국민보다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국무총리, “책임지겠다”더니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출석을 거부한 대통령까지. 이 거대한 부조리와 몰염치를 아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벅차 국회 탄핵안 통과 이후론 관련 콘텐츠를 찾아서 보여주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19일 새벽 벌어진 서울서부지법 난입 사건 가담자에 젊은층이 많아서였을까. 아이들이 지금의 일들을 적당히 알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고민이 앞섰다. 친구에게 “같이 놀기 싫어”라고 말하는 것도 학교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배우는 아이들에게 대통령 지지자들이 경찰과 기자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법원 난입 영상 몇 개를 아이들에게 보여줬지만 이들이 영장 발부 판사를 찾아다녔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배우는 당위와 현실의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부모의 감정을 통해 사건을 해석하지 않도록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어렵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이 일들을 알려줘야 한다. 지금은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도 어느 때보다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학교에도 당부하고 싶다. 계엄 직후 “잘못된 일”이라고 설명한 선생님이 있는 반면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학생 질문에 답하지 않은 선생님도 있었다고 한다. 일련의 사태는 정치적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도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계엄 며칠 후 로제의 노래 ‘아파트’를 ‘탄핵해’로 개사한 노래를 학교 친구들에게서 배워 왔다. 앞뒤 맥락도 모른 채 ‘탄핵해 탄핵해’를 흥얼거리고, 서부지법 난입 영상을 드라마 한 장면처럼 소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계엄 시대 부모와 교사가 할 일이다. 더 극단으로 치달을지 모를 정치·사회 혼란 속에서도 아이들이 공동체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려면 부모는 친절한 수다쟁이가, 학교는 치열하게 민주주의를 토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