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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개의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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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솔직하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보수는 너무 춥고 배고팠다."
2년 전 대통령실을 취재하며 만난 고위 당국자가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청와대(대통령실)에서 근무한 비서관이나 행정관은 ①정부 부처나 산하기관 임원으로 재취업하거나 ②국회의원 혹은 지방자치단체장 공천을 받거나 ③민간기업 임원으로 취직하는 게 '출세 공식'이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임기 5년을 채우지 못하고 탄핵됐고, 자신도 청와대를 나와 갈 곳이 없었다는 푸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대선에서 승리해 보수가 정권을 되찾자, 이 당국자는 '힘쓰는 일자리'를 다시 꿰찼다.
한국 대통령의 인사권은 막강하다. 대통령 입김이 닿는 일자리가 많은데 제대로 된 통계도 없다. 중앙부처 장·차관과 고위직 공무원, 공공기관 기관장과 임원 등 대통령이 직접 임명장을 주는 인사만 7,000명이라는 추산(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있다. 정부가 주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민간기업과 민간단체 기관장 인사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면 1만 개가 넘는다고도 한다. 어쨌든 1만 개의 일자리는 대선에서 이긴 쪽이 5년간 가져가는 게 그들만의 룰이다.
보수가 또 배고픔을 걱정하고 있다. 불법 계엄 선포로 윤 대통령이 탄핵소추되면서, 그의 당선을 도왔던 이들이 5년 집권을 바라보고 만들었던 일자리 포트폴리오가 힘없는 종이 조각이 됐다. 요즘 국민의힘이 똘똘 뭉칠 수 있는 기저에는 윤 대통령이 아닌, '나의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만난 한 보좌관도 "공공기관 상임감사로 취업했는데 내가 막차를 탄 것 같다"며 안도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탄핵 심판을 최대한 빨리 끝내자고 성화인 이유도 비슷해 보인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피해 보려는 계산도 있겠지만, 나의 일자리를 예상보다 빠르게 되찾게 될지 모른다는 설렘이 더 크지 않을까. 민주당 인사들이 문재인 정부 막판에 '알박기'한 공공기관 임원 자리가 여전히 수십 곳이 넘는다는데 자리 욕심이 없을 리 없다.
이런 볼썽사나운 일자리 싸움의 원인이 대통령의 '제왕적 인사권'에 있다. 대통령 마음대로 관직을 나눠 주다 보니 투명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는지,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인지 매번 논란이다. 본보가 신년 기획 '대통령제 새로고침'을 통해 고발한 현행 대통령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 미국은 대통령 인사지침서인 '플럼북'에 9,000여 개 직책의 임명 방식과 보수, 조건 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비극을 끊고 싶은데 개헌 논의를 풀어갈 의지가 없다면, 작은 실천으로 '한국판 플럼북'부터 만들자.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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