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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목전에 실종된 한국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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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ᆞ3 비상계엄 사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안보에 치명상을 입혔다. 당장 ‘트럼프 2기’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가 불가능해졌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더라도 새 정부가 틀을 갖춰 트럼프 측과 마주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설령 윤 대통령이 기적처럼 생환한들 트럼프 측이 그를 ‘생산적인’ 카운터 파트로 여길지 미지수다.
어렵게 쌓아온 ‘민주주의 모범국’이라는 한국 외교의 최대 자산도 일거에 무너졌다. 우리 스스로도 무장 군인들의 국회 난입은 기실 제3세계 어느 빈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나마 북한 리스크라면 또 모르겠지만, 민주적 선거로 탄생한 집권세력의 ‘친위 쿠데타’라니.
비상계엄 사태는 ‘70돌 한미동맹’에 직격탄을 날렸다. 외교안보 분야 경험이 전무했던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소리 높여 한미동맹을 강조했지만, 정작 그 도덕적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시종일관 비상계엄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안정성은 물론 양국 간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지난달 23일 “계엄 준비 계획대로 실행이 됐으면 진짜로 크든 작든 한반도에 전쟁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차례 연락을 넣은 뒤 겨우 10여 분간 나눈 대화 중 비상계엄의 핵심 배후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계엄수첩’ 관련 보도를 두고 한 얘기다.
이 관계자는 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김정은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가 주한미군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물풍선 원점 타격 주장,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북한의 공격 유도설, 평양 무인기 침투 사건 등을 거론하면서다. 그는 “갑작스러운 비상계엄과 맥락이 이어지는 것 같아 우리 입장에선 심히 불쾌하다”며 “동맹국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건 동맹의 도덕적 기반을 훼손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계엄군의 이동에 대한 사전통보가 없었던 사실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한국의 정치 위기: 계엄령과 탄핵’ 보고서에서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과 의회는 윤 대통령이 한국에 있는 미군 지휘관들에게 통보하지 않고 한국군을 계엄령 시행에 투입한 데 대한 우려에 직면했다”며 “지휘관들은 동맹의 공조에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미국이 계엄 세력의 의도와 움직임을 사전에 어느 정도 알았던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지한파인 브래드 셔먼 하원의원은 지난달 13일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만일 한국군이 한국의 어느 장소가 북한에 공격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미국은 진실을 공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엄 세력의 국지전 유도설을 겨냥한 것이다. 무인기 논란 직후 사무엘 파파로 인도태평양사령관의 갑작스러운 방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데프콘 격상으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확보한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의 계엄군 일부 제지 가능성 등도 거론된다.
한미 양국은 2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외교차관 회담을 통해 계엄 사태로 줄줄이 취소된 외교안보 일정을 재개하기로 했다. 외교부는 이를 ‘완전한’ 재개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홍균 외교부 1차관의 공식 일정에 트럼프 2기 외교안보분야 파트너와의 만남은 없었다. 그는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미국 대선 이전부터 트럼프 측과 소통해왔고 이번 국내 상황도 적절하게 설명했다”며 “앞으로도 트럼프 신행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소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누구와 어떻게 소통해왔고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했다.
이는 계엄 사태로 인한 외교안보 역량의 심각한 낭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 각국이 트럼프 2기 주요 인사들 접촉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외교부 2인자는 임기가 곧 끝날 바이든 행정부의 뒤틀린 마음부터 돌려놓아야 했다. 여기엔 윤석열 정부가 한미동맹과 한미일 공조를 강조했던 정책 기조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도 작용했을 수 있다. 김 차관은 귀국 전 일본을 들렀다.
트럼프 2기 대응의 핵심 중 하나가 지도자 간 ‘개인적 유대’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트럼프가 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을 별장으로 초청한 것도, 트럼프에게 비판적이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관세폭탄’ 위협에 서둘러 트럼프 별장으로 달려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공란이다. 더욱이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한 호감을 수차례 표시한 터라 자칫 입지가 더 좁아질 수 있다.
트럼프와 ‘옷깃이라도 스친 인연’을 찾는 일은 통상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할 재계 입장에선 지상 과제다. 그래서 계엄 사태로 트럼프의 최측근인 데이나 화이트 UFC 회장의 방한이 취소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한 대기업 홍보 임원은 “화이트의 방한 기간에 일정을 잡으려 여러 곳에 줄을 대왔는데 소용이 없어졌다”며 답답해했다. 정부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에서 트럼프에 접근할 민간 루트조차 계엄에 막힌 셈이다.
더 심각한 건 트럼프 2기 출범을 전후로 각종 압박이 몰아칠 가능성이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는 트럼프의 전직 참모들을 인용해 “트럼프의 첫 100일이 아니라 첫 100시간에 한국에 영향을 미칠 수많은 일이 나올 것”이라며 주한미군, 관세,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등을 언급했다.
실제로 트럼프는 국방부 3인자인 정책차관에 주한미군의 역할을 중국 억제로 조정하자는 엘브리지 콜비를 지명했다. 방위비 분담금과 대중 군사적 압박 동참 수준 등의 논란이 불가피하다. 트럼프는 “관세를 높이면 돈(보조금)을 안 줘도 외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을 것”이라며 미국 진출 기업들이 직접 영향권에 있는 인플레이션감축법안(IRA)과 반도체법 등을 도마에 올렸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 정부가 이들 현안과 관련해 트럼프 측과 최소한의 조율에라도 나섰다는 소식은 전무하다.
계엄사태 한 달이 되어가지만 외신에선 여전히 ‘(친위) 쿠데타’라는 표현이 적잖이 보인다. 한국 내부의 정세를 알기 어려운 외국인들 입장에선 위험ᆞ불안 등의 단어가 겹쳐질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비상계엄은 민주주의의 모범이던 한국을 졸지에 위험천만한 3류 국가로 만들었다.
비상계엄이 2시간여 만에 해제됐고 국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됐지만, 정치적ᆞ경제적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한 유럽연합(EU) 회원국의 주한대사관 관계자는 지난달 26일 “지금도 본국에서 출장이나 여행 관련 문의가 적지 않다”며 “안타깝지만 한국의 대외 신뢰도 훼손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합인포맥스ᆞ주한외국기업연합회(KOFA) 공동조사(12월 6~12일)에 따르면 비상계엄 이후 투자 의향이 ‘악화됐다’는 응답은 73%에 달했다. 조사 시점이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전이지만,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ᆞ암참)의 한 회원사 임원은 “중장기적으로 투자나 사업 규모의 축소 가능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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