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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사무총장 항공기 추락사… 격추일까 사고일까

입력
2025.03.07 04:30
16면
5 0

<97>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사건
사무총장 탄 항공기 추락해 15명 사망
유일한 생존자 "폭발음 들어" 증언에도
기체에 증거 없어… "조종사 실수" 결론
사고 50년 뒤 격추 의혹에 재조사 개시
감청자료 두고 각국 "기밀 정보" 비공개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61년 9월 13일 콩고공화국 레오폴드빌(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샤)을 방문한 다그 함마르셸드(오른쪽 두 번째) 유엔 사무총장이 레오폴드빌 은질리공항에서 현지 주둔 유엔 평유지군을 사열하고 있다. 유엔 제공

1961년 9월 13일 콩고공화국 레오폴드빌(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샤)을 방문한 다그 함마르셸드(오른쪽 두 번째) 유엔 사무총장이 레오폴드빌 은질리공항에서 현지 주둔 유엔 평유지군을 사열하고 있다. 유엔 제공

1961년 9월 18일 오전 12시 10분, 영국령 북로디지아(현재 잠비아) 북부 은돌라공항 관제탑에 항공기 한 대가 포착됐다. 관제사 아룬델 마틴은 DC-6기가 공항으로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고 무전기를 들었다. "은돌라 상공에 항공기 불빛이 보인다. 하강해도 좋다." 곧장 조종사로부터 답신이 날아왔다. "알겠음. 6,000피트 상공에 도달하면 보고하겠다." 하지만 항공기는 은돌라공항에 착륙하지 않았다.

1961년 은돌라 추락 사고 유엔기의 항로 지도. 점선이 통상적인 항로이며, 실선이 실제 비행경로다. 사고기는 보안을 위해 곧장 은돌라로 향하지 않고 동쪽으로 비행하다 남하하는 항로를 선택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보고서 캡처

1961년 은돌라 추락 사고 유엔기의 항로 지도. 점선이 통상적인 항로이며, 실선이 실제 비행경로다. 사고기는 보안을 위해 곧장 은돌라로 향하지 않고 동쪽으로 비행하다 남하하는 항로를 선택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보고서 캡처

사실 DC-6기는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이 탑승한 유엔 수송기였다. 유엔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 항로와 목적지는 철저히 감춰져야 했다. 기장은 이륙 당시 비행 계획을 제출하며 목적지를 거짓으로 기재했고, 비행 중반을 넘겨서야 지역 관제소에 행선지가 은돌라공항이라고 알렸다. 통상적인 항로를 지켜 비행하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 은돌라공항으로 다가오던 항공기가 다른 공항으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틴은 인근 공항에 전화를 걸어 사라진 DC-6기와 교신한 관제사가 있는지 찾았다. 하지만 어떤 공항도 DC-6기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DC-6기는 동이 튼 이후 은돌라공항 서쪽 15㎞ 지점에서 발견됐다. 기체가 추락해 탑승객 16명 가운데 15명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사망자 중에는 함마르셸드도 있었다.

행동하는 사무총장 함마르셸드

1960년 카탕가를 방문한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 유엔 제공

1960년 카탕가를 방문한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 유엔 제공

1953년 함마르셸드가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했을 당시 유엔은 출범한 지 8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기구였다. 함마르셸드는 유엔이 국제사회 구심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특정 국가나 단체,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탈식민지 시대 갓 독립한 약소 국가를 보호하는 일도 그의 사명 중 하나였다.

그러던 1960년 벨기에로부터 이제 막 독립한 콩고공화국(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단일 국가를 주장한 중앙정부에 반대해 남부 카탕가주(州)가 '카탕가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면서 주요 정치 세력 간 충돌이 격화됐다. 여기에 벨기에와 미국, 소련이 각 세력을 배후 지원하면서 콩고 내전은 열강들의 대리전으로 확대됐다.

콩고 위기가 심화되자 함마르셸드는 평화유지군 2만여 명을 유엔콩고활동단(ONUC)이라는 이름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사무총장 본인도 내전 중인 콩고를 네 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관심을 쏟았다.

사고 전날에도 함마르셸드는 콩고 엘리자베스빌에서 카탕가국 인접 도시인 북로디지아 은돌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카탕가국 지도자 모이스 촘베와 휴전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협상이 타결돼 총성이 멈춘다면, 이제 막 벨기에에서 벗어난 독립국 콩고가 다시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걸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동체 80% 불타… 생존자 한 명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 사고 현장. 잔해가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을려 있다. 유엔 사고조사 보고서 캡처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 사고 현장. 잔해가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을려 있다. 유엔 사고조사 보고서 캡처

하지만 함마르셸드의 임무는 비극으로 끝났다. 구조대는 추락 당일 오후 3시가 돼서야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항공기는 오른쪽 날개가 부러진 채 공항 인근 숲속에 널브러져 있었다. 동체 80%가 불에 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현장 곳곳에는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탑승객들이 착용한 손목시계가 12시 10분~15분에 멈춰 있었던 점으로 미뤄 사고 발생 시각은 대략 오전 12시 13분 즈음으로 추정됐다.

생존자는 ONUC 최고보안책임자 대행인 해롤드 줄리엔 한 명뿐이었다. 그는 심한 화상과 발목 부상을 입었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사고 뒤 구조대 도착까지 15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폭발했다" 증언에도 공격 흔적 없어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 사고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해롤드 줄리엔의 증언이 북로디지아 사고조사위원회 자료에 기록돼 있다. 북로디지아 사고조사 보고서 캡처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 사고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해롤드 줄리엔의 증언이 북로디지아 사고조사위원회 자료에 기록돼 있다. 북로디지아 사고조사 보고서 캡처

은돌라 병원으로 옮겨진 줄리엔은 병상에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조사관에게 "함마르셸드가 '돌아가야 한다(Go back)'고 외친 뒤 항공기가 폭발했고, 이후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고 말했다. 항공기가 외부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이었다. 항공기가 추락할 즈음 인근 상공에 또 다른 항공기가 있었다는 목격담도 이어졌다. 휴전으로 독립의 길이 막힐 거라 예상한 카탕가국이 함마르셸드를 암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러나 정작 기체에서는 공격당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식별 가능한 항공기 부품에는 총탄 자국이나 폭발흔이 없었고, 시한폭탄에 부착될 만한 기계장치도 찾지 못했다. 당시 카탕가국이 운용하던 항공기와 공항 위치상 은돌라 상공의 항공기를 공격할 수 없다는 계산도 나왔다. 결국 조사관들은 줄리엔이 부상 치료로 의식이 혼미한 상태고, 그의 증언을 신뢰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고 엿새 뒤 줄리엔은 사고 후유증으로 급성 신부전이 발생해 사망했다.

암살설이 아니더라도 사고 원인을 규명할 증거를 확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기체가 화재로 인해 크게 손상된 데다 조종실에는 블랙박스나 녹음기도 탑재돼 있지 않았다. 결국 사고 직후 진행된 북로디지아 항공당국의 조사와 유엔 차원에서의 조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북로디지아 항공당국과 별도로 구성된 북로디지아 조사위원회는 "조종사 실수로 항공기가 계획보다 일찍 하강한 것이 추락으로 이어졌다"고 추정했다.

1962년 유엔 총회는 "조사보고서를 확인한다. 향후 증거가 추가로 발견될 경우 사무총장이 총회에 보고할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 1759호를 채택했다. 사실상 조사를 중단한다는 의미다. 함마르셸드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이대로 묻히는 듯했다.

"50년 전 조사는 불완전… 주요 증언 고려 안 돼"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 현장에 세워진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 추모비. 유엔 제공

1961년 은돌라 유엔기 추락 현장에 세워진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 추모비. 유엔 제공

사건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1년이었다. 영국 런던대학교 영연방연구소 역사학자 수전 윌리엄스가 '누가 함마르셸드를 죽였나?(Who Killed Hammarskjold?)'라는 책을 발간해 사건 당시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윌리엄스는 기존 세 차례 조사에서 '항공기 두 대가 날아갔고, 한 대가 불을 뿜으며 떨어졌다'는 흑인 목격자들의 증언이 무시됐다고 지적했다. 유일한 생존자 줄리엔의 증언도 "당시 그의 의식이 명확하다는 의사들의 진단이 있었다"며 신빙성이 충분하다고 봤다.

격추설을 지지하는 증언도 확보했다. 사건 당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키프로스 소재 감청기지에서 일했던 미 해군 요원 찰스 사우스홀이 격추 당시 무전을 들었다고 털어놨다. 사우스홀은 무전망에서 "DC-6기를 확인했다. 그 비행기다"라는 목소리와 함께 기관포가 발사되는 소음이 났고, 곧이어 "(항공기를) 맞혔다. 불이 붙어 떨어지고 있다. 충돌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증언은 윌리엄스의 책에 그대로 실렸다.

책 한 권이 촉발한 재조사

윌리엄스가 격추설을 제기한 이후 함마르셸드 암살 의혹을 재조사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2012년 영국 전 대법관 스티븐 세들리가 의장을 맡은 민간 조사기구 '다그 함마르셸드 사망 진상조사 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1년간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고, 이듬해인 2013년 "사고 원인으로 조종사의 실수, 항공기가 피격됐을 가능성, 둘 다 배제할 수 없다"며 "지금까지 알려진 증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담아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2014년 3월에는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재조사 요청을 받아들여, 탄자니아 대법원장을 지낸 모하메드 찬데 오스만이 이끄는 '유엔 전문가 패널'이 은돌라 항공기 추락 사건 재조사에 착수했다.

사고 당시 콩고 주재 미국 대사가 항공기 격추 가능성을 언급하며 벨기에 출신 용병 얀 판리세험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내용이 명시된 외교문서도 같은 해 공개됐다. 2015년 5월 진행된 유엔 패널 조사에서는 미 공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번역가 폴 아브람이 NSA 크레타 감청기지에서 일하며 사우스홀과 동일한 내용의 무전을 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조사는 지지부진했다. 각 나라들이 첩보 활동과 관련돤 정보 공개를 꺼린 탓이었다. 사우스홀과 아브람의 증언을 담은 녹취록은 지금도 기밀 자료로 분류돼 있다. 오스만은 지난해 11월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아직도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남아 있는 상황"이라며 "미국,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 중요한 정보가 존재할 것으로 추측되지만,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노벨평화상 추서'

다그 함마르셸드(왼쪽) 유엔 사무총장과 그가 사후 수상한 노벨평화상 메달. 다그 함마르셸드 재단 홈페이지 캡처

다그 함마르셸드(왼쪽) 유엔 사무총장과 그가 사후 수상한 노벨평화상 메달. 다그 함마르셸드 재단 홈페이지 캡처

함마르셸드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에도 유엔은 콩고 내전 종식에 힘썼다. 다만 후임인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은 대화가 아닌 유엔 평화유지군을 통한 적극적인 개입을 선택했다. 카탕가국이 항복한 것은 함마르셸드 사망 2년 뒤였다.

항공기 추락 후 석 달이 지난 1961년 12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사망자에게 시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함마르셸드에게 사후 노벨평화상을 추서했다. "유엔 헌장에 명시된 원칙과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국제적인 기구로 유엔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사무총장 재임 7년간 대화를 바탕으로 각국의 주권을 옹호하고, 강대국의 이익보다 약소국을 보호하려 한 그의 헌신에 보낸 마지막 찬사였다.

이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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