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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대신 해외로, 세뱃돈은 'QR 머리핀'으로… 바뀌는 베트남 '뗏'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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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4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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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1세기의 음력설

지난 17일 베트남 호찌민시 떤선녓 국제공항이 음력설(뗏)을 맞아 국내외로 떠나려는 베트남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 뚜오이쩨 캡처

지난 17일 베트남 호찌민시 떤선녓 국제공항이 음력설(뗏)을 맞아 국내외로 떠나려는 베트남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 뚜오이쩨 캡처

#. 19일 낮 베트남 하노이 중심부에 위치한 하노이기차역. 수도 하노이부터 최대 도시 호찌민까지 1,726㎞를 잇는 남북선 통일열차 시발점인 이곳은 뗏(음력설)을 앞두고 평소보다 더 붐볐다.

일찌감치 귀성길에 오른 사람과 미리 고향에 다녀오는 사람, 기차 여행객까지 한데 모이면서 대합실은 북새통을 이뤘다. 역사 앞에서는 명절 선물을 양손 가득 든 가족 단위 승객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내, 아들딸과 고향 타잉화를 다녀온 도쫑즈엉(36)은 “뗏 때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 부모님께 미리 인사를 드리고 왔다”고 말했다.

19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하노이기차역에서 한 가족이 열차 탑승을 준비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19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하노이기차역에서 한 가족이 열차 탑승을 준비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국내 여행지로 향하는 기차표도 동난 지 오래다. 하노이역 직원은 “과거에는 연휴 기간, 특히 뗏 초반 관광지행 티켓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최근 몇 년 사이 트렌드가 크게 바뀌었다”며 “다낭, 후에(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대 도시) 등으로 향하는 표는 2개월 전부터 거의 매진됐다”고 말했다.

공식 음력설 연휴만 '9일'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음력설을 쇠는 몇 안 되는 국가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화교 인구가 많은 몇몇 나라가 음력설을 기념하는데, 베트남만큼 연휴를 보내는 데 ‘진심’인 나라를 찾아보긴 어렵다.

베트남 음력설 풍경은 같은 동양권 사람이 보기에도 유난스럽다. 통상 ‘뗏’이라는 단어 앞에는 ‘최대 명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연중 가장 중요한 공휴일이자, 가장 긴 연휴라는 의미다. 올해 공식 휴무일은 총 9일(이달 25일~다음 달 2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포함해 보름 정도 쉰다.

베트남 음력설 '뗏'을 앞둔 지난 17일 한 베트남 여성이 하노이 항마거리에서 설 장식품을 살피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베트남 음력설 '뗏'을 앞둔 지난 17일 한 베트남 여성이 하노이 항마거리에서 설 장식품을 살피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여기에 개인적으로 휴가를 붙여 더 길게 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뗏 전부터 직원 다수가 자리를 비우거나 마음만은 이미 ‘연휴 모드’로 돌입하기 때문에 중소 규모 산업 현장에서는 길게는 3주간 생산에 제동이 걸린다.

이 시기 베트남 전역은 붉은 물결로 일렁인다. 거리 곳곳에는 금성홍기(베트남 국기)와 함께 적색 뗏 장식이 걸리고, 거리에도 아오자이를 입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노이와 다낭, 호찌민에서는 뗏을 기념하는 불꽃놀이나 무인기(드론) 쇼를 선보이기도 한다. 뗏이 ‘베트남판 민족 고유의 명절’인 셈이다.

지난해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관광객들이 음력 설 뗏 장식품으로 가득한 가게 앞을 지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지난해 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관광객들이 음력 설 뗏 장식품으로 가득한 가게 앞을 지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빠르게 변하는 명절 풍속도

다만 베트남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명절 풍속도 역시 빠르게 변화했다. 전통적·가족적 분위기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뗏은 고향에서 가족과 지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연휴 초반 ‘민족 대이동’급 귀성을 하고, 명절 당일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뒤 가족·친지와 함께 음식을 먹고 덕담을 나누며 복을 기원하는 모습은 한국의 전통 설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긴 연휴 후반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으나, 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됐다.

하지만 △연 6~7%대 경제 성장에 따른 소득 증가 △저출산 경향 △명절에 대한 인식 변화 등이 맞물리며 친지들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재충전을 선택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50대 베트남 여성 사업가 도티쑤옌이 지난해 음력설(뗏)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쑤옌 제공

50대 베트남 여성 사업가 도티쑤옌이 지난해 음력설(뗏)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쑤옌 제공

하노이에 거주하는 여성 사업가 도티쑤옌(53)은 3년 전 명절부터 본가에 가는 대신 남편, 자녀와의 여행을 택했다. 2022년 베트남 중남부 휴양지 냐짱을 시작으로 2023년에는 태국 푸껫, 지난해에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각각 뗏을 보냈다. 올해는 싱가포르행 항공권을 끊어 둔 상태다.

쑤옌은 20일 한국일보에 “우리 부부는 사업으로, 아이들은 학업으로 지난 1년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모처럼의 휴일을 음식과 제사 준비, 그릇 수백 개를 설거지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쑤옌처럼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리는 이가 늘면서 베트남 여행사의 해외 여행 상품은 순식간에 마감됐다. 하노이트래블은 일간 띤뜩에 “전체 예약 건수의 80%가 해외 여행이고 국내 여행은 20%에 그쳤다”며 “(무비자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유럽처럼 비자가 필요한 여행지는 이미 한 달 전 예약이 꽉 찼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호찌민 떤선녓 국제공항 국내선에 국내 여행을 떠나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모여 있다. 뚜오이쩨 캡처

베트남 호찌민 떤선녓 국제공항 국내선에 국내 여행을 떠나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모여 있다. 뚜오이쩨 캡처

베트남 경제전문매체 VN이코노미도 지난 15일 “방콕(태국) 도쿄(일본) 싱가포르가 올해 가장 인기 있는 뗏 해외 여행지로 꼽힌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특히 도쿄는 (베트남 아고다 기준) 검색량이 193% 증가해 인도네시아 발리를 제치고 올해 뗏 기간 베트남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설 연휴 가족끼리 모이거나 차례를 지내기보다 국내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처럼, 베트남도 명절을 ‘제2 휴가’로 여기는 풍조가 확산하는 셈이다.

인구 1억 명인 베트남에서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결과, 이 시기 국내선 항공료가 급등한 것도 베트남인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호찌민에 거주하는 직장인 찐민하는 “뗏 기간 베트남항공 호찌민-다낭 왕복 항공권 가격이 1인당 약 500만 동(약 28만6,000원)인데 태국행은 약 310만 동(약 17만7,000원)”이라며 “국내선이 더 비싸서 차라리 태국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음력설을 앞두고 복을 기원하는 빨간색 봉투에 베트남 지폐가 담겨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음력설을 앞두고 복을 기원하는 빨간색 봉투에 베트남 지폐가 담겨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기술 발전 따라 편의성 높아져

디지털 기술 발전도 뗏 풍경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게 세뱃돈이다. 뗏이 되면 베트남인들은 ‘리씨(Li Xi)’로 불리는 돈을 주고받는다. 한국에서 세뱃돈은 세배를 받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답례’로 여겨지지만, 베트남의 경우엔 꼭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주는 것만은 아니다. 어른은 아이에게 ‘건강히 잘 자라라’는 의미로, 수입이 있는 자식과 손주는 부모나 조부모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현찰이 담긴 붉은 봉투를 손에 쥐여준다.

베트남 최대 전자지갑 플랫폼 모모(MoMo)로 세뱃돈인 '리씨'를 보낸 모습. 모모 화면 캡처

베트남 최대 전자지갑 플랫폼 모모(MoMo)로 세뱃돈인 '리씨'를 보낸 모습. 모모 화면 캡처

이제는 기술이 종이봉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베트남 최대 전자지갑 플랫폼 모모(MoMo)나 잘로페이(ZaloPay) 등은 뗏 기간 ‘행운의 돈 보내기 서비스’를 제공한다. 휴대폰 번호만 알면 계좌번호를 몰라도 리씨를 가상의 붉은 봉투에 담아 상대의 전자 지갑으로 전송하는 일종의 온라인 송금이다. 모모는 2022년 해당 기능을 사용해 지인에게 리씨를 보낸 사람이 1,000만 명을 넘었다고 밝혔다.

하노이, 호찌민 등 대도시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는 ‘큐알(QR) 액세서리’도 인기다. 머리핀이나 복주머니 가방 등 액세서리에 계좌 정보가 담긴 QR코드를 새겨 넣은 뒤 자녀에게 착용시키는 형태다. 휴대폰으로 이 QR코드를 읽으면 아이나 보호자의 전자 지갑으로 세뱃돈이 보내진다.

베트남 유명 인플루언서 살림(Sarlim)의 딸이 지난해 음력설(뗏)을 앞두고 QR코드가 새겨진 복주머니를 들고 있다. 머리핀에도 QR코드가 담겨 있다. 휴대폰으로 이 코드를 읽으면 세뱃돈이 아이 또는 보호자의 전자 지갑으로 보내진다. 살림 페이스북 캡처

베트남 유명 인플루언서 살림(Sarlim)의 딸이 지난해 음력설(뗏)을 앞두고 QR코드가 새겨진 복주머니를 들고 있다. 머리핀에도 QR코드가 담겨 있다. 휴대폰으로 이 코드를 읽으면 세뱃돈이 아이 또는 보호자의 전자 지갑으로 보내진다. 살림 페이스북 캡처

제작 가격은 개당 3만~5만 동(약 1,700~2,800원) 수준. 뗏을 앞두고 주문이 폭주하면서 제작 속도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베트남 공산당 기관지 라오동은 “베트남에서는 QR코드를 통해 새해를 축하하는 추세가 점점 확산하고 있다”며 “일일이 현금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한 쓰레기(버려진 돈봉투)가 발생하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신기술이 불러온 삭막함을 불편해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간 하이즈엉은 “돈을 빨리 주고받는 것보다 아이들이 어른으로부터 덕담과 함께 받는 (돈)봉투의 가치를 알고 적은 돈이라도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베트남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에서 전자지갑 QR코드가 새겨진 머리핀이 판매되고 있다. '아이에게 편리하게 세뱃돈을 보낼 수 있는 QR코드 머리핀'이라는 홍보 문구가 적혀 있다. 쇼피 캡처

베트남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에서 전자지갑 QR코드가 새겨진 머리핀이 판매되고 있다. '아이에게 편리하게 세뱃돈을 보낼 수 있는 QR코드 머리핀'이라는 홍보 문구가 적혀 있다. 쇼피 캡처

이 시기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한 청소 서비스가 호황을 이루는 점도 눈에 띈다. 베트남에서는 깨끗하고 정돈된 집에서 새해를 맞아야 행운이 깃든다는 속설이 있다. 이 때문에 보통 설 직전 대청소를 하는데, 바쁜 직장인들이 스스로 집 안을 정돈하기보다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경향이 강해지고, ‘그랩클린(GrabClean)’ ‘비타스키(bTaskee)’ 등 가사 서비스 제공 앱이 활성화하면서 뗏을 앞두고 수요가 급증한다는 게 현지 업체들 설명이다.

가사도우미 루옹티마이(57)는 “음력설 직전 일주일 정도 아침부터 밤까지 바짝 일하면 다른 시기 한 달치 월급(약 1,000만 동·약 57만 원)만큼 돈을 벌 수 있다”며 “고향에 내려가 가족들과 명절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노동의 대가가 만족스러워 지난해에 이어 올해 뗏도 모두 하노이에 남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베트남 가사도우미 루옹티마이가 음력설 뗏을 앞두고 한 가정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마이 제공

베트남 가사도우미 루옹티마이가 음력설 뗏을 앞두고 한 가정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마이 제공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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