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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을사년, 목표는 '숙면'

입력
2025.01.17 04:30
27면

계엄으로 시작된 불면의 밤
을사년 평행이론 반복 없어야
새해의 다짐은 '일상 되찾기'

12·3 내란사태로 촉발된 불안감에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내란성 불면증'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게티이미지뱅크

12·3 내란사태로 촉발된 불안감에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내란성 불면증'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게티이미지뱅크


"올해는 책을 좀 읽어야지. 여행도 좀 가고, 운동도 빼먹을 수는 없지. 주변 사람들도 좀 챙기고."

사소한 결심이지만 나의 익숙한 나태함으로 습관화할 수 없는 것들을 매년 캘린더 한편에 끄적끄적 적었었다. 하지만 올 초에는 예년과 달리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한 해를 반성하려 되돌아 보니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지난 1년을 돌아보고 희망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절망적인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며 온전하고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고 사라졌다. 차분한 애도의 분위기 속에 매년 알람처럼 연말임을 알려주던 연예대상 시상식도 불꽃쇼도 시청할 수 없었으니 새해가 밝았음은 고작 휴대폰 배경화면 속에 슬그머니 바뀐 연도 끝자리로 인지했을 뿐이다.

2024년 연말부터 12·3 불법계엄 사태, 대통령 탄핵심판, 역대 최악의 여객기 참사 등으로 받은 분노와 슬픔이 거대한 파도 같은 무력감으로 밀려왔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뉴스 앞을 떠날 수 없는 처지라 더 그랬다. 새벽에 한두 차례 잠에서 깨어 뉴스 채널을 확인하는 횟수가 늘어났고 다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내란성 불면증'에 심신이 고통받았다. 내란성 불면증이란 불법계엄 사태로 촉발된 불안감에 잠을 설치는 현상으로 수시로 잠에서 깨 내란 관련 속보를 휴대폰으로 확인한다는 신조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윤석열 대통령을 체포한 15일에도 어김없이 새벽에 잠을 깨 뉴스를 확인하다 차라리 회사에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이른 출근을 했다. 체포 작전은 새벽부터 시작됐고 실시간으로 대치 상황이 뉴스로 쏟아져 나왔다. 한때 윤 대통령 측 변호인단과 일부 여당 의원들에게 가로막혀 지체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물리적 충돌 없이 5시간여 만에 영장집행이 마무리 됐다. 불법계엄 선포 43일이 지나고 매일 밤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그 남자'도 서울구치소에 구금되며 홀로 불면의 밤을 보냈으리라.

깊은 병은 순간 완치되지 않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고작 치료의 시작일 뿐이다. 온갖 '내란성 질병'들이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서서히 치유되며 모두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는 을씨년스럽다의 뜻은 ‘을사(乙巳)년’에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그 뒤로 사람들이 ‘을사년스럽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십간과 십이지를 순서대로 조합해 총 60개 해가 번갈아 돌아오는 60갑자의 마흔두 번째 해인 을사년엔 유독 큰일이 많았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1965년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반대 시위로 나라가 어수선했다.

새해를 맞은 우리 사회는 과거 을사년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자연 세계에 일종의 흐름과 리듬이 있어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같은 패턴의 운명을 갖게 된다는 '평행이론'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새해 첫 단추인지 지나간 해의 마지막 단추인지 모르겠으나 어설프게나마 단추는 맞춰졌다. 설을 앞두고 아직 2025년 을사년은 시작되지 않았다고 자기합리화하며 정신 승리해본다.

그리고 캘린더 한 귀퉁이에 새해 다짐을 조그맣게 써놓기로했다. 올해의 목표 '숙면하기'.

류효진 멀티미디어부장 jskn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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