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尹은 이미 사면을 생각한다

입력
2025.01.01 17:00
26면
구독

전·노 사면이 잉태한 윤의 계엄
“통치행위” 강변은 사면 빌드업
‘내란 수괴’ 사면은 싹을 잘라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난해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2차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관저에서 대국민담화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지난해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2차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관저에서 대국민담화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12·12 쿠데타와 5·18 유혈 진압으로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22년6개월을 선고받은 직후인 1996년 8월. 미국 뉴욕타임스(NYT)엔 이런 분석 기사가 실렸다. “이번 재판의 출발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됐다고 보고 있다. 그런 만큼 김 대통령이 두 사람에 대해 사면 조치를 취할 것 같다.”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사면을 운운하다니. 그러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듬해 4월 대법원 확정판결(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이 나오고 불과 8개월 만인 그해 12월 두 사람은 모두 특별사면됐다. 이틀 전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선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했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청와대 발표는 이랬다. “15대 대선 종료에 즈음해 국민대통합을 이뤄 당면한 경제난국 극복에 국가역량을 총결집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사면권을 베푼 게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줄곧 민주주의를 외쳤던 YS와 DJ였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특별사면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성과를 단일화 거부로 허망하게 날린 것과 더불어 두 사람이 역사와 국민에 끝내 갚지 못한 큰 빚이었다고 본다. 국민에게 총칼을 겨눈 내란죄 수괴마저 사면될 수 있다는,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운 전례를 남겼다. 전두환의 수감기간은 751일, 노태우는 768일에 불과했다. 특히 전두환은 2021년 90세 나이에 눈을 감을 때까지 사죄조차 한 적 없다. 대다수 국민 마음속에서만큼은 그는 영원히 사면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막 탄핵심판과 수사가 시작됐을 뿐이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사면을 계산하고 있을 게 확실하다. 겉으로는 확신에 찬 듯 말하지만 탄핵을, 또 중형을 비켜가기 쉽지 않다는 걸 '유능한' 법조인인 그가 모를 리 없다. “계엄은 정당한 통치행위였다”고 발버둥치는 것이 전·노처럼 언젠가는 찾아올 사면 기회를 얻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 모른다. 어느 무속인이 조금만 고생하면 몇 년 뒤엔 사면될 수 있다고 확신을 주었을지도.

아주 헛된 망상은 아닐 것이다. 전·노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중 형기를 다 채운 이는 없다. 영어 기간이 1,737일로 가장 길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도 총 형량(22년)의 5분의 1도 살지 않았다. 미래 어떤 대통령이 자신에게 위기 국면이 찾아오면 “국민 대통합”을 말하며 사면 카드를 만지작거릴 거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 예상이다. 지금 윤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향해 외치는 것처럼 “실제로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총을 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거대야당의 폭거가 얼마나 심했으면 그랬겠느냐” 따위의 동정론도 슬슬 고개를 들 것이다.

공식이 돼버린 전직 대통령 사면은 전관예우의 최정점이라고 본다. 전·노를 합작 사면한 YS나 DJ도, 박 전 대통령을 사면한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한 윤 대통령도 본인을 위한 굵직한 보험을 들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통합과 화합을 내세웠지만, 정작 현실 통치에서는 반목과 갈등을 부추긴 것만 봐도 그렇다.

이번 불법계엄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부각되며 개헌론이 들썩이고 있지만, 이런 특권부터 제한하는 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적어도 현직 대통령의 재직 중 형사상 소추 예외로 내란죄와 외환죄를 두고 있는 헌법의 뜻만큼은 외면하면 안 된다. 재직 중인 대통령도 끌어내릴 만큼의 중범죄인데, 대체 무엇을 위한 사면이란 말인가. 법으로 아예 차단을 해서 사면의 ‘사’자도 꿈꿀 수 없게 싹을 잘라버리는 게 마땅하다. 그렇잖으면 지금의 고통스러운 싸움이 너무 허망하지 않겠나.

이영태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