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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어록'은 내란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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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좋아 빠르게 가!" 대선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은 이렇게 외쳤다. 공약을 시원하게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홍보영상에서다. 미래를 내다본 걸까. 5년 임기 반환점을 돌자마자 그는 정말로 빠르게 가게 됐다. 최종 행선지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와 소수의 지지자들 말고는 다 아는 것 같다.
검사 시절 윤 대통령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속았다고 배신감 느낄 필요 없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대한민국 사람 5,175만 명에게 별로 충성하지 않았다. 그를 보좌한 인사들에 따르면, 욕구와 단견에 주로 충실했다. 이를 테면 음주 욕구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대한 단견. 김건희 여사는 그에게 사람을 초월한 절대자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정권을 다 걸면서까지 김 여사를 두둔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졸업생 입틀막'으로 얼룩진 카이스트 졸업식 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했다. 이 말도 정말이었다. 그는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친위쿠데타에 도전했다. 그 위험하고 무모한 '용기'의 출처는 "도대체 두 시간짜리 내란이 있느냐"는 대국민담화 발언에서 찾을 수 있겠다. "성공해야 내란이고 실패하면 소란인데 뭘…"이라고 믿은 듯한 그는 철저한 결과·성과 지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굳이 이해를 해보고자 한다면, '합격 아니면 0'인 사법고시에 9년 넘게 매달린 그가 '검사는 수사 결과로 말한다'가 금과옥조인 세계를 너무도 사랑해서였을 수 있겠다.
윤 대통령이 초래한 국가적 비극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민주 정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과 절차의 고난도 예술이다. 치열한 토론, 끈질긴 설득, 대승적 타협으로 작동하고 힘겹게 완성된다. 결과로 휙 돌진하려는 정치는 국가폭력이다. 야당 대표는 만나지 않고, 여당 대표는 거슬리면 쫓아내고, 언론은 골라서 상대한 반(反)정치를 한 그는 결과가 성에 차지 않자 불법 계엄이라는 최대치의 무력을 동원했다. 국민을 "처단"해서라도만들고 싶어한 '윤석열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했다. 민생경제 실적으로 보면 기만이지만, K-민주주의의 견고한 회복력에 관해서라면 맞는 말일 수 있다. 어차피 "경제는 대통령이 살리는 게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그다. 여당 대표가 "내부 총질"이나 한다고 비난했던 그는 주권자들에게 정말로 총질을 하려 했다. 대통령이 유린한 민주주의를 국민이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서서 지켜내고 박수 받아야 하는 것, 내란 정국의 슬픈 역설이다.
"계엄 선포를 내란죄라고 하는 건 광란의 칼춤"이라며 결백을 주장하더니 윤 대통령은 수사에 느릿느릿 응하고 있다. 수사 회피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3년 전 그는 말했다. "특검을 왜 거부하나. 죄지었으니까 거부하는 거다. 진상을 밝히고 조사를 하면 감옥에 가기 때문에 못하는 거다." 검사로서 수많은 피의자를 다뤄 본 그의 말이니 정말일 것이다.
윤 대통령은 대선 TV토론 중에 "RE100이 뭐냐"고 불쑥 물어서 대통령 할 준비가 덜 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책능력을 의심하기 전에 "국헌이란, 국가란, 국민이란 뭐냐"부터 그에게 물었어야 했다. 어느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 남편은 바보다"라고 한 김 여사의 말을 새겨 들었어야 했다. 우리는 더 똑똑한 유권자여야 했다. 그러나 좌절할 것 없다. 다음, 또 다음 선거에서 똑똑해지면 된다. 그 교훈이 윤 대통령이 선사한 선물이라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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