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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일본 민주주의의 구조적 안정성; '평화헌법'에 '계엄'이란 단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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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한일 민주주의의 대조적 경위
한국과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한 경위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 외부 세력, 특히 미국 주도로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이식’되었다. 1960년대에 자생적 시민운동이 일시적으로 고조되기도 했지만, 일본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대규모로 투쟁에 나선 사례는 극히 드물다. 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희생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반복된 국가 권력의 인권 탄압과 독재에 맞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집단 행동에 나섰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4·19 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등은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굳건히 뿌리내리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런 역사적 과정 속에서 한국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한국에서 군부 독재나 반헌법적 계엄 등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파괴, 유린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을 뜻하기도 한다. 시민의식이 성숙한 점은 긍정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이 실로 비극적이다.
한국인의 눈에는 일본 시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상대적으로 미적지근하게 보인다. 주변에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왜 일본인은 정치 참여에 대한 관심이 낮은가”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시민의식이 낮기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시각도 있지만, 좀 더 구조적으로 접근하면 일본 사회는 시민들이 정치 참여의 절박함을 느낄 만한 계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패전 이후 일본은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안착한 환경에서 극단적인 위협이나 대규모 인권 유린 사태를 겪지 않았다. 한 일본인 연구자 동료는 “일본 시민사회는 공권력이 무지막지하게 폭주하는 파탄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 사회의 민주주의에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일본 역시 구조적인 모순과 다양한 사회적 과제를 안고 있다. 다만, 그것들이 한국처럼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형태로 불거진 적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일본 사회의 민주주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시민사회의 역동성이나 자발성 면에서는 한국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 패전 전후, 일본 사회와 계엄
계엄(戒厳·martial law)은 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민간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합법화하는 제도다. 일본에서는 1947년 ‘평화헌법’이 제정되면서 계엄이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이 헌법은 국가 권력에 의한 전쟁과 무력 행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군부의 정치적 개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글로벌 팬데믹 당시 일본 정부는 ‘긴급사태선언’을 발령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행정적 조치를 통한 대응이었다. 자연재해나 외국의 침략 등 특정 상황에서 자위대의 역할이 규정되어는 있지만, 군사적 수단에 의한 민간 통제와는 전혀 다른 체계다. 패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계엄이나 내란, 쿠데타 등의 폭력적인 권력 투쟁이 발생한 적이 없는데, 이를 군부의 정치 개입을 제도적으로 차단한 ‘평화헌법’이 제 구실을 해 왔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패전 이전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는 계엄령이 합법적이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주 동원된 통치 수단이었다. 일본 제국 헌법에 근거해서 1894년에 계엄령이 법제화한 이후 반세기 동안 수시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청일전쟁(1894~1895년), 러일전쟁(1904~1905년) 등 전쟁 기간 뿐 아니라, 히비야 방화사건(1905년)이나 간토대지진(1923년) 등 국내 혼란 상황에서도 계엄령이 발동되었다. 태평양전쟁(1941~1945년) 시기에는 사실상 계엄과 다름없는 ‘전시긴급조치’가 내려져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계엄은 단순히 사회 질서 유지를 넘어, 왕의 승인을 등에 업고 군부가 정치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이었다. 결과적으로 계엄은 전쟁을 옹호하고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핵심적인 기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는 계엄령이 강압적인 지배 수단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의 독립운동과 민족적 저항을 억압하는 데에 계엄법을 자주 동원했는데, 대표적으로 1919년 3·1 운동 직후 계엄령을 발동해 군대와 헌병을 동원한 무력 진압을 감행한 바 있다.
계엄은 일본 군부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 도구로도 악용되었다. 대표 사례가 1936년 발생한 ‘2·26사건’이다. 당시 일본 육군의 젊은 장교들이 1,4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쿄의 주요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내각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며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다. 사건 직후, 이를 반란으로 규정한 일왕이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부는 무력으로 신속히 진압했다. 이 군사 쿠데타는 일본 군부의 파벌 다툼에서 불거진 해프닝에 가까웠으나, 군 내부에서 대립했던 파벌 한쪽을 제거하면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던 시기는 일본 현대사에서 드물게 자생적 민주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때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다이쇼’라는 연호를 사용한 1912~1925년에 불어온 민주주의 훈풍라는 뜻)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보통 선거권 확대를 통해 민중운동과 정당활동이 비교적 활성화되었다. 또, 국가의 통치권을 왕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천황기관설’이 대두하는 등, 국체에 관한 논의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2·26 사건’ 이후 군부가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유산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군부는 정당 정치를 부패와 무능의 상징으로 몰아세웠고, 개혁이라는 명분 아래 군국주의 체제를 가속화했다. 이런 호전적인 팽창 정책의 끝이 결국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태평양전쟁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의 12·3 불법계엄을 경험하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군부 독재와 그에 맞선 시민들의 투쟁을 통해 역동적으로 성장해 왔다. 이 과정에서 성숙한 시민의식이 싹텄고, 이는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얻어진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본은 패전 이후 평화헌법을 통해 군사 세력의 정치적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에서 멀어지는 부작용도 생겼다.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안정된 일본 사회의 ‘형식적’ 민주주의의 과제가 크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번 12·3 불법계엄 사태를 경험하며, 한국 사회가 군부독재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정치 세력과 군이 결탁해 민주주의에 반기를 드는 어긋난 관행이 또다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전모가 드러날수록 단순히 망상에 빠진 권력자의 무모한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이 명확해지고 있다. 특히, 군 조직이 권력욕에 눈이 먼 정치인의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을 느낀다. 군사력은 외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이지, 결코 민주적 통치를 압박하거나 대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규율과 정의를 상실한 군사력은 곧 폭력과 다름없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성과지만, 그 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번 사태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얼마나 취약한지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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