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여섯 살 손녀가 엄마 언제 오냐고 묻는데"… '통곡의 무안공항'

입력
2024.12.30 04:30
수정
2024.12.30 09:14
4면
구독

사고기 여행사 전세기, 가족 등 탑승객 다수
일가족 9명 참사… 효도 여행 보낸 딸도 오열
"괜찮겠지" 애타게 구조 기다리다 망연자실
제주항공 대표 사과에 "살인이야" 외치기도

29일 오전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을 충돌한 사고에 대해 이정현 전남 무안소방서장이 탑승객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29일 오전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을 충돌한 사고에 대해 이정현 전남 무안소방서장이 탑승객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29일 '제주항공 2216편 추락 참사' 사고 여객기는 여행사들이 자체적으로 고객을 모집해 항공기를 임차하는 방식으로 운영한 '크리스마스 전세기'로 나타났다.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해당 노선은 무안에서 방콕까지 주 4회 운항하며 국내 유명 여행사 두 곳과 지방 중소 여행사 두 곳이 각각 주 2회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번 사고기는 지방 중소 여행사들이 제주항공 여객기를 빌린 것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해당 여행상품을 이용해 태국 방콕을 다녀온 가족과 친지, 직장동료 단위 승객으로 추정된다.

전남 영광에서는 군남면에 거주하는 A씨(80) 일가족 9명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A씨는 1946년생으로 탑승자 중 최고령이다. 팔순을 맞아 영광에 사는 가족 4명과 다른 지역에 사는 형제 가족 5명 등 9명이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화순군청 전·현직 공무원 8명도 퇴직자 축하를 위해 동반 여행을 떠났다가 참변을 피하지 못했다. 전남교육청에선 평소 동기 모임을 갖곤 했던 여성 간부 5명이 함께 사고를 당했다.

농협 관계자들도 큰 피해를 봤다. 농협중앙회 전남본부에 따르면 전남 담양, 나주, 영광, 해남 등에서 온 조합원들과 그들의 가족 등 총 29명이 숨졌다. 여기엔 태국 국적의 배우자 2명도 포함됐다. 사고 항공기에는 10세 미만도 5명이나 탑승했다. 이 가운데 미취학 아동은 3명이었다. 최연소는 2021년생 3세 남아로 확인됐다.

졸지에 이웃을 잃은 지역민들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전북 고창에 사는 탑승자 친구라고 밝힌 B(69)씨는 "친구와 아들, 손자, 손녀까지 한꺼번에 사고를 당했다"며 "오늘이 오는 날이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한 탑승자의 딸 C씨도 "평생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가 친구 5명과 함께 여행을 간다기에 여행비를 보태줬는데 내 잘못인 것만 같다"며 "살아 계시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눈물을 쏟아냈다.

사고 직후 공항에 모여든 유족들은 애타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방콕으로 휴가를 떠난 김모(50)씨의 오빠는 광양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혹시라도 여동생 소식을 알 수 있을까 싶어 공항 1층 대합실을 한시도 떠나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동생은 괜찮을 거야"라고 되뇌기만 했다.

40대 딸을 잃은 D씨도 망연자실한 채 6세 손녀딸을 데리고 왔다. D씨 딸은 친구 5명과 함께 방콕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손녀딸이 계속 엄마는 언제 오느냐고 묻는데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유족들도 주저앉아 오열하거나 대합실 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얼어붙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유족들도 많았다.

공항 본부 건물에 모여 구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유족 일부는 한국공항공사가 '유가족 대기실'이라는 문구를 붙이자 "왜 우리가 유족이냐"며 종이를 찢어버리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일부 유족들은 사고 현장에 접근하다가 구조대원들에게 제지당한 뒤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전남도는 사고 수습을 위해 재난안전대책본부와 현장긴급구조통제단을 구성하고 공항 현장에 임시안치소를 설치해 시신을 안치했다. 그러나 사망자 신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댄 당국의 대처를 한목소리로 질타하는 유족의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E(46)씨는 환갑을 맞아 다섯 친구와 함께 우정 여행을 떠난 고모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전 10시 30분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몇 시간째 아무 연락도 없다"며 "뉴스보다 유가족들이 정보를 더 모르면 어쩌라는 거냐"고 말했다. 관계 당국은 시신 대부분이 신원 확인이 어려운 상황인 데다 지문과 DNA 등을 통한 인적 사항 확인이 필요하다고 해명했지만 유족 분노를 가라앉히진 못했다.

30여 분마다 한 번씩 사망자들의 신원이 확인될 땐 제발 자기 가족 이름이 불리지 않길 바라는 간절함과 가족 신원이라도 알 수 있길 바라는 애타는 마음이 교차했다. 전남소방본부 관계자가 "구조자 2명 외 대부분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자,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한 여성은 "부모가 자식을 못 알아보겠느냐, 가족이 가면 더 빨리 찾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몰려든 유튜버와 유족 간 갈등도 빚어졌다. 유튜버들이 무분별하게 유족 모습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찍지 말라"는 고성이 오갔다.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는 이날 오후7시50분 쯤 공항 2층 대기실을 찾아 유가족들에게 사과했다. 사고 발생 11시간 만에 무안공항을 찾은 김 대표에게 유가족들은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김 대표는 "이번 사고로 희생된 분들께 비통한 심정으로 애도와 조의를 표한다"며 "신속한 사고 수습과 사후 필요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제주항공 차원에서 총력을 다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발언하는 도중 "살인이야 살인"이라고 외치거나, "살려주세요, 빨리 해주세요"라고 절규하는 유족들 모습도 보였다.

사고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짐작케하듯 현장은 참담했다. 비행기가 바닥을 향해 그대로 내리꽂힌 듯 10m가량 된 회색 벽돌 벽은 무너져 내려 있었고, 비행기 꼬리는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사고 현장으로부터 150m가량 떨어진 도로 곳곳에 사고기 잔해와 탑승객들의 소지품이 뒤섞여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기체가 있는 지점 주변에서 파란색 들것에 주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부 대원들은 철조망 일부를 제거하고 환자 이송용 침대를 옮기기도 했다.

무안= 김진영 기자
무안= 문지수 기자
무안= 김태연 기자
무안= 허유정 기자
강지수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