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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狂氣)에 날아간 밸류업 1년, “지금은 기업 아닌 국가 거버넌스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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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증시 거래일(1월 2일) 윤석열 대통령이 증권거래소를 찾았다. 현직 대통령이 증시 개장식에 참석한 건 역대 처음이었다. 그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자본시장 규제는 과감하게 혁파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기업 저평가)를 해소하겠다”고 했다. 정부의 요란한 밸류업(value-up) 경적의 시작이었다. 밸류업 프로그램 공개(2월 26일)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5월 2일) 밸류업지수 발표(9월 24일) 등이 착착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증시가 급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잔뜩 심어주면서.
그로부터 근 1년. 주지하다시피 미국 증시는 연일 신고가를 경신하며 훨훨 나는 반면 국내 증시는 맥을 못 췄다. “밸류업이 아니라 밸류다운”이란 불만이 자자했다. 정부의 ‘밸류업 1년’을 관료나 교수가 아니라 개미투자자의 눈을 통해 짚어보고자 했다. 이게 다 시장과의 소통 없는 일방통행식 정책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인터뷰 대상으로 선택한 건 숙향(64)과 남산주성(54·본명 김태석)이란 필명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업 투자자. 개미투자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치투자를 지향해왔다는 점에서 적절하겠다 싶었다.
인터뷰가 있었던 건 불법계엄 선포 이틀 뒤(5일)였다. 초유의 사태에 시장은 패닉이었다. 이 시국에 밸류업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었다. 한 명의 광기(狂氣) 어린 행동에 그렇잖아도 혹평을 받고 있던 ‘밸류업 1년’의 노력은 모조리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지금까지의 ‘코리아 디스카운트’와는 또 다른 디스카운트였다. 그만큼 그들의 충격과 분노도 컸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한 진단이 더 필요할 수 있다고 봤다. 그들은 “지금은 기업 거버넌스가 아니라 국가 거버넌스의 위기”라고 했다.
- 본인 소개부터 해주시죠.
숙향 = “주식 투자한 지 40년 됐어요. 2020년 정년퇴직 후에는 전업 투자자로 활동하고 있죠. 전액 ‘국장’(국내시장)에만 투자하고 있어요. ‘이웃집 워런 버핏’ 시리즈로 투자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조금 주목을 받았습니다.”
남산주성(이하 남산) = “네이버 카페 가치투자연구소 운영자이자 전업 투자자입니다. 약 25만 명 회원을 보유한 연구소 카페는 지난 20년간 자본시장과 투자자 발전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자평합니다.”
굳이 얼마를 굴리는지, 수익률이 어떤지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얘기는 캐묻지 않았다. 부러움과 시기심만 부추길 테니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인터뷰 당일 국내 증시가 계엄 후폭풍으로 휘청댄 것과 대조적으로 미국 뉴욕증시 3대지수는 신고가를 경신했다.
- 지금 국내 증시 상황을 진단한다면요.
남산 = “은행이 당장 부실하지 않아도 부실해질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일순간에 자금까지 빠져나가는 걸 뱅크런이라고 하잖아요. 지금 국내 주식시장이 꼭 그런 느낌이에요. 스톡런(stock-run) 현상 초입 같다고 할까요. 투자자에게 신뢰를 못 주는 기업, 그리고 잘못된 제도를 만들어놓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죠.”
- 이 와중에 불법계엄이라는 초대형 사태가 터졌어요. 정치 리스크까지 가세를 하는군요.
남산 = “맞아요. 참담합니다. 기업 거버넌스를 넘어 국가 거버넌스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요. 해외투자자들에게도 한국은 매우 위험한 시장이 되었다고 봅니다.”
숙향 =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양상 자체가 달라졌어요. 예전부터 지정학적 리스크를 가장 큰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봤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요즘엔 대만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디스카운트 요인이 크지 않나요? 최근엔 북한이 미사일을 쏴도 주가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정치 리스크가 훨씬 더 크죠.”
그렇다면 계엄과 탄핵 리스크를 걷어내고 보면 어떨까. 국내 주식의 저평가를 보여주는 대표 지표가 주가순자산비율(PBR)이다. 주가 대비 주당순자산 비율을 말하는데, PBR이 1배 미만이면 주가가 장부상 순자산가치(청산가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재 코스피지수의 PBR은 0.8배를 조금 웃돈다.
- PBR이 지속적으로 1에 못 미치는 건 국내 주식의 저평가가 심각하다는 얘기일 텐데요.
숙향 = “그나마도 평균이 끌어올린 거라고 봐요. 지금 2차전지나 바이오 등 시기총액이 큰 테마로 엮인 주식들은 고평가된 것도 상당히 많죠. 그런 거품을 걷어내고 나면 저평가된 주식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 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보시나요.
남산 = “주식을 투자한다는 건 회사랑 동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동업하는 사람을 믿기 힘드니 선뜻 나서기 힘들 수밖에요. 벌어들인 돈을 주주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대주주가 개인 자산처럼 껴안고 있거나 빼돌리는 경우가 허다하죠. 대기업은 언론이 관심이라도 갖는데 중소형 회사는 대부분 감시망에서 비껴 있어요.”
숙향 = “전 철저히 가치투자를 하니까 수익률이 그나마 괜찮은 편이긴 해요. 배당은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건데요. 이런 주주환원율 부족이 국내 증시의 저평가를 낳았다고 봐요.”
남산 = “살짝 생각이 다른데요. 워런 버핏의 회사 버크셔해서웨이는 배당을 안 해요. 그렇다고 그 회사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잖아요. 배당할 돈으로 회사를 성장시켜서 나중에 주주들에게 꼭 보상을 해준다는, 혹은 주가가 많이 떨어지면 자사주를 사서 부양해준다는 기본적인 신뢰가 있어서라고 봐요. 결국 주주와 회사 간 믿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숙향 = “동의해요. 다만 그런 믿음이 형성되지 않은 우리나라 현재 여건에서는 그나마 배당을 많이 주는 회사가 낫다는 겁니다.”
핵심 주제인 밸류업 얘기로 넘어갔다. 요란했던 밸류업 정책은 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걸까. 밸류업 정책이 이런 문제점들을 일거에 해소시켜주는 만병통치약일 수 있을까.
- 그래서 정부가 밸류업 카드를 꺼내 들었고, 얼추 1년이 됐어요. 결과만 놓고 보면 국내 주가는 역주행을 했는데요.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까요?
남산 = “그렇게까지 보지는 않아요. 밸류업 정책에 호응해서 주주환원 로드맵을 내놓고 있는 기업이 하나 둘 늘고 있는 건 고무적이죠. 이런 기업들의 주가는 그래도 선방했다고 봐요. 다만, 아직은 소수에 그치고 있을 뿐인 거죠.”
하지만 두 사람은 밸류업 정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코리아 밸류업지수’에 대해선 격분했다. 한국거래소는 9월 주주환원이나 밸류업 공시 여부, 수익성 등을 감안해서 100개 종목을 지수에 편입했다. 적절성 논란이 안팎에서 비등했다. 당시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기관 고객들에게 공개한 투자노트에서 이렇게 혹평했을 정도다. “편입 종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KB금융과 하나금융이 빠지고 (주주환원에 소극적이었던) 엔씨소프트, SM엔터, 두산밥캣이 편입될 수 있느냐. 시장 참가자들이 (밸류업 지수 관련) 귀중한 조언을 했지만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 가장 논란이 많은 게 ‘코리아 밸류업지수’인데요.
숙향 = “외국 은행이 어지간해서는 이런 지적을 안 하거든요. 오죽 답답했으면 이랬을까 싶어요. PBR이 무려 10배가 넘어서 고평가 논란까지 일었던 기업도 상당수 포함됐으니까요.”
남산 = “선정 기준을 보면 얼마나 웃긴지 몰라요. 밸류업 정책에 호응해서 주주환원 정책, 장기발전 로드맵 등을 발표한 기업들은 상당수 빠져 있고요. 그냥 각 산업별 대표 기업들 위주로 선정한 거나 다름없어요. 코스피200지수랑 뭐가 다릅니까.”
-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남산 = “밸류업지수라는 게 뭡니까. 밸류업에 적극적인 기업 위주로 지수를 만들어 그렇지 않은 회사와의 차별성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기업들이 밸류업 필요성을 느낄 거 아닙니까.”
비판이 거세자 정부는 인터뷰 뒤인 16일 장 마감 후 지수 종목 개편안을 내놓았다. 기존 100개 종목에 더해 KB금융과 하나금융지주, 현대모비스 등 5개 종목을 추가 편입했다. 발표 후 의견을 다시 물었다. 여전히 평가는 인색했다.
- 말들이 많으니 5개 종목을 지수에 추가 편입시켰는데요.
숙향 = “새로 편입된 주식 선정은 적절했다고 봐요. 하지만 기존 100종목 중에 터무니없는 종목들을 덜어내지 않고서는 그저 땜질에 불과합니다.”
개미투자자들의 이기심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 아닐까. 세금을 깎아주고 면제해주겠다는데 굳이 반기를 들 사람은 많지 않다. 이들도 개인투자자다. 논란 많았던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최전선에서 목청 높이는 개미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 그렇게 아우성을 쳤는데 정작 금투세 폐지 효과는 하루 이틀뿐이더군요.
숙향 = “평소 금투세 때문에 국내 주식이 오르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어요. 당장의 효과는 크지 않을 거라고 봤죠. 이미 정책으로 확정된 걸 나중에 뒤집는 것 또한 옳지는 않다고 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향후 국내 주식시장이 좋아질 때 세금 부담이 없다는 매력 때문에 개인들의 해외 투자금이 국내로 돌아오는 데 도움이 될 걸로 봐요.”
남산 = “만약 그대로 시행됐다면 하락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 금투세 시행을 전제로 증권거래세를 낮췄잖아요. 거래세라도 복원시키는 게 옳지 않나요?
숙향 = “반발이 클 수는 있어도 예전 세율로 복원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남산 = “저도 그래요. 다만 시대에 안 맞는 농어촌특별세(0.15%)는 재고가 필요합니다.”
- 개미들 아우성에 공매도도 금지돼 있어요. 이것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 아닌가요?
남산 = “맞습니다. 우리나라는 10대 경제대국이에요. 공매도를 금지할 게 아니고 공매도를 이용해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잡아서 엄중 처벌하면 되죠.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에요.”
- 공매도가 기관투자자들에게만 유리하게 설계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게 개미들의 불만이었잖아요.
남산 =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치면 되잖아요. 공매도가 아예 없으니 해외 투자자들이 못 들어오는 측면도 굉장히 크죠. 그게 주가를 더 갉아먹는 요인입니다.”
두 사람은 배당소득 분리과세 필요성도 적극 피력했다. 부자감세라는 비판이 있지만,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배당 유인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배당총액을 키우면 세수도, 소비도, 투자도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배당 우수 기업 주주에게 분리과세로 배당소득세를 감면하는 정부의 세제개편안은 무산됐다.
주식시장은 나라 경제를 지키는 근간이다. 개미들이 다 해외증시로 떠나면 그 근간이 흔들린다. 두 사람은 개미들을 국장에 붙잡아 두기 위한 조치를 딱 한 가지만 꼽아 달라는 주문에 공통적으로 ‘상법 개정’을 말했다. 매우 강하게.
- 상법 개정이 왜 필요한 거죠?
숙향 = “상법에 규정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까지 확대함으로써 이사회가 주주 이익을 더욱 고려하도록 하자는 거예요. 이사가 회사, 그러니까 최대주주만이 아니라 주주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상식 아닌가요.”
남산 = “법에 명시돼 있지 않은 나라들은 대다수 판례로 보장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법과 판례 모두로부터 보호를 못 받고 있는 거예요. 모든 주주가 공평하다는 것에서 출발을 해야 그 밑에 하위법이나 하위 규정들이 바로 설 수 있어요.”
- 정부·여당은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대체하자고 해요. 주주 보호 조치들을 자본시장법에 열거를 하자는 건데요. 대체가 안 되는 걸까요?
남산 = “상법 개정은 포괄적 선언이고 나침반이에요. 자본시장법에 건건이 모든 규정을 두는 건 불가능해요.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빠져나가거나 우회할 게 확실하죠. 상법, 자본시장법 둘 다 하는 게 옳아요. 대체가 아니라 보완의 관계죠. 상법 개정은 무너진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해법이라고 봅니다.”
- 이 질문으로 마감할게요. 그래도 국장에 남아야 될까요?
숙향 = "국내 증시에 저평가 주식이 많은 건 분명하니까요."
남산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도 있지만, 그 전에 절을 좀 바꿔보려는 노력이 먼저 아닐까요?”
우리가 밸류업 벤치마킹으로 삼은 일본도 안착을 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비록 밸류업에 경적을 울린 대통령은 탄핵 심판대에 섰지만, 밸류업 정책이야말로 정권과 무관하게 쭉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절을 떠나지 않고 바꿔보려는 투자자들의 마음까지 다치지 않게, 정부가 끊임없이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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