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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년, 이번 연도…

입력
2024.12.11 19:00
25면

편집자주

세상 언어들의 이모저모를 맛보는 어도락가(語道樂家)가 말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틈새를 이곳저곳 들춘다. 재미있을 법한 말맛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숨겨진 의미도 음미한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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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일부에게 뜬금없이 알려진 영어 낱말이 있다. 당구 속어 ‘겐세이’의 어원으로 잘못 알려진 gainsay(부정/반대하다)이다. 물론 그 말은 ‘견제’의 뜻인 일본어 牽制[겐세이]에서 유래했다. 차용어야 여러 방식으로 유입될 수 있으나 gainsay는 다소 어렵고 예스러운 글말이 나오는 성서나 법률 문서에서만 간혹 보인다. 서로 전혀 격이 안 맞고 쓰임새도 너무 다른데 난데없이 일본이나 한국에서 당구 용어가 되기는 어렵다.

누가 장난삼아 갖다 붙인 가짜 어원을 진짜로 믿는 사람도 생겨서 약간 퍼졌을 텐데 시작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신문이나 책에서는 안 보인다. 이런 가짜 어원이 굳이 공식 매체나 출판물에 실리는 일은 드물어 그렇겠지만, 2000년대 초부터도 몇몇 블로그에서 보이므로 이미 그전에 퍼졌을 법하다.

이 영어 단어는 사전에 나오는 용법 표시에 주로 부정문(이나 의문문)과 쓰인다고 명시돼 있다. 대개 There is no gainsaying(반박/부정할 여지가 없다) 뒤에 말이 이어지는 상투 어구다. 이게 당구나 다른 비유에서 훼방을 놓는 행위를 일컫기에는 넘을 산이 너무 높다.

이 말의 앞머리는 against와 뿌리가 같다. 네덜란드어 ontegenzeglijk(반박/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도 비슷하다. 이 형용사는 동사 tegenzeggen(반박하다 tegen=against, zeggen=say)에서 파생했는데 정작 이 동사는 옛말이 됐다. 여기에 부정 접두사 on-(영어 un-에 해당)이 붙은 형용사만 남았으니 영어 gainsay가 흔히 부정문에 쓰이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한국어에서 부정어가 붙은 파생어가 어근의 뜻과 아예 달라진 괜찮다(공연하지 않다), 귀찮다(귀하지 않다), 점잖다(젊지 않다)도 이와 다른 듯 유사하다.

영국과 미국의 영어라든가 중국과 한국, 일본의 한자어처럼 원산지에서는 사라진 말이나 표현이 수입국에서 남는 경우도 꽤 흔한데 gainsay도 이와 비슷하다. 여전히 고급 학습자용 사전에도 나오므로 죽은 말은 아니지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언론 기사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나이지리아 등지의 아프리카 신문 기사나 교회에서 쓰는 말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일전에 ‘쿠마르’라는 인도 사람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동영상을 봤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 아흐레, 열흘’ 날짜 헤아리는 법을 알려줬다. 요즘 애들이 ‘사흘’을 ‘사일’과 헷갈린다지만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현상이다. 대개 하루, 이틀 다음에는 ‘삼일’이라는 이가 더 많다. 나이도 마흔여섯 대신 ‘사십육 살’이라고 잘못 말하는 이도 드물지 않다.

언젠가부터 ‘올해’를 ‘이번 연도’, ‘작년/지난해’를 ‘저번 연도’라고 이상하게 말하는 이도 늘었다. 해외 교포 2세들이 ‘올해’를 this year를 직역해 ‘이년’이라 한다는 우스개도 있다. 한국어 습득의 단계상 직역투 ‘이년’을 교과서대로 올바른 ‘올해’로 고쳤다가 실생활에서 어울리며 ‘이번 연도’로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외국어 교과서를 잘 익혀 현지에 갔더니 옛날 말투라고 놀림받았다는 뒷얘기도 예전에 흔했다. 이런 현상을 자연스러운 언어 변화로 봐야 할까, 잘 가꿔야 할 우리말에 놓는 훼방(겐세이)으로 봐야 할까. 언어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잠시 함께 생각해 봐도 좋을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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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견식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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