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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원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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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불법 추심 취재를 맡은 후배에게 인스타그램 계정 주소 하나를 받았다. 사채업자가 온전히 추심만을 위해 개설한 곳으로 보였다. 성별도 나이도 다른 40명의 얼굴이 그야말로 '박제'돼 있었고, 각자 자필로 쓴 차용증을 카메라를 향해 보여주며 그 내용을 읊었다. 주민번호 같은 개인정보가 빼곡히 담긴 차용증의 한 대목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빌린) 금액: 20만 원, 금액: 40만 원, 금액: 50만 원. 그 이상은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업체는 채무자의 지인들 번호를 받아다가 막무가내로 괴롭혔다. 해당 계정 링크를 지속해서 전송하는가 하면, '돈을 갚으라고 전하라' '당신 개인정보도 팔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그 대상은 친척으로, 직장 동료로, 자녀 학교 교사로 뻗어나갔다. 실제 돈을 갚으면 게시물이 사라지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50만 원을 빌리고 아직 못 갚았단 이유로 감내하기엔 너무 가혹한 일로 보였다.
불법 추심에 시달리다 숨진 30대 싱글맘의 노트 속 '고 부장 40만 원' 같은 문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 사례를 통해 더 깊이 새겼다. 벼랑 끝에서, 혹은 멋모르고 손을 뻗은 곳에서 만난 사채업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채무자들의 목을 죄고 있다. 수십만 원을 빌렸을 뿐인데 원리금이 금세 불어나 수천만 원 수준이 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눈앞은 암흑처럼 깜깜해졌을 것이다.
얼마 전 공개된 통계는 또 하나의 위태로운 신호를 준다. 올해 7월 기준 20대 신용유의자(옛 신용불량자)가 6만5,800명으로, 2021년 말에 비해 25%나 늘었다는 내용이다. 같은 기간 전 연령에선 8% 증가한 점을 고려하면 20대의 빚 부담은 유독 많이 불어났다. 이제 막 사회로 나선 청년의 발목을 잡은 빚 규모는 대체로 많아야 수백만 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불황을 먹고 사는 불법 사채업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 취약 계층을 추심의 굴레로 빠트릴까. 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올해 열 달 동안 집계한 불법사금융 피해는 지난해보다 58%나 늘었고, 환수된 범죄수익도 169억 원으로 지난해(37억 원)보다 4.6배 치솟았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본인이 피해자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잃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불법 추심에 꽤나 무뎌졌다. '돈을 빨리 갚으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 속에 이 문제를 가둬두고 쉬쉬해왔기 때문이다. 경찰이 '싱글맘 사건'의 지인으로부터 일찍이 신고를 받고도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은 데에는 이 같은 인식이 반영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행법이 빚 독촉 방법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추심 연락을 할 수 있는 시간대까지 버젓이 정해놨는데도 말이다.
관계 당국이 일제히 불법사금융을 엄단하겠다고 나섰지만 공들여야 할 지점은 하나 더 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곳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례들을 그저 개인의 사연으로만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어떤 제도의 사각지대가 그들을 내몰았는지,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면 그 이유는 뭔지, 신용불량 낙인이 한 청년의 선택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두루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싱글맘 사건'은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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