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비번·병가도 긴급소집... 경찰 3700명, 그날밤 국회·용산 에워쌌다
'12·3 불법계엄' 당시 국회와 용산에 최소 3,700명의 경찰 병력이 투입된 것으로 파악됐다. 계엄 선포 직후 비상소집으로 서울경찰청 소속 기동대엔 모든 직원이 출근하란 명령이 떨어졌으며, 비번 근무자와 연가자뿐 아니라 아파서 병가를 낸 대원까지 소집됐다. 경찰 근무일지엔 '서울의 밤' 당시 숨 가쁘고 긴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8일 한국일보는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을 통해 12월 3일과 4일, 국회와 용산에 배치됐던 56개 기동대 근무일지를 입수한 뒤 자체 분석했다. 근무일지는 출동 인원과 근무배치 시간 등 기동대 동선과 특이사항을 시간대별로 정리해놓은 문건이다. 계엄이 밤 10시 25분 선포된 뒤 전 직원 출근하란 비상 동원 명령이 전파된 건 밤 11시부터 11시 30분 사이였다. 대원들은 4일 자정쯤 부대 사무실로 출근한 뒤 새벽 1시쯤 여의도 국회와 용산 대통령 집무실, 관저 부근에 속속 도착했다. 비상근무는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새벽 1시) 후 3시간 넘게 지난 새벽 3시 30분쯤까지 이어졌다. 이후 부대로 복귀해 새벽 4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해제 선언 뒤에도 대원들은 수시간을 출동 대기했다. 근무일지엔 난데없는 계엄 선포로 현장 지휘관들이 느낀 고충과 당혹감이 묻어난다.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 대원들의 복무 기강을 잡기 위해 10여 분간의 교양 시간을 갖거나 늦은 시간 소집된 탓에 팀원들의 숙취 점검을 한 제대(군의 소대에 해당, 제대당 보통 20명)도 있었다. '현장에서 차분하게 대응하고, 내부자료를 유출하지 말라'며 보안 유지를 당부하기도 했다. 출동 병력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당일 실제 투입됐던 기동대 소속 A씨는 한국일보 통화에서 "워낙 급박하게 진행돼 (대장도) 정확한 업무 지시를 받지 못하고 일단 목적지(국회)로 향해야 했던 상황"이라며 "복장 완비도 못 하고 급하게 뛰어와 기동버스 안에서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대원들도 많았다"고 떠올렸다. 당일 비번이었으나 명령을 받고 출근한 기동대도 6곳이나 됐다. 연가나 병가를 내고 자리를 비웠던 대원들까지 예외 없이 소집되기도 했다. 연가 중 소집 호출을 받고 강원도에서 출발해 새벽 3시쯤 겨우 도착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휴무 인원의 약 98%가 비상소집 발령 후 (부대로) 출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많은 인원이 향한 곳은 국회였다.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국회에만 32개 기동대에서 최소 2,103명의 경찰관이 투입됐다. 앞서 국회사무처가 추산했던 약 1,500명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다. 기동대는 국회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의 남문과 오른쪽의 동문까지 4개 구역으로 나눠 포위하듯 국회를 촘촘하게 에워쌌다. 평상시 국회에는 주간(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엔 여야 당사와 정문 부근에 2개 기동대(약 120명), 야간(오후 8시부터 익일 오전 8시까지)엔 1개 기동대 중 2개 제대(약 40명)만 근무한다. 현장은 혼란스러웠다. 국회에 새벽 1시쯤 도착했다는 한 기동대 직원은 "(도착했을 땐) 이미 차벽트럭이 세워져 있었고 무전이나 임무 하달도 없어 다들 우왕좌왕하며 벽 부근에 서 있었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의 관저와 집무실이 있는 용산에도 24개 기동대에서 1,598명이 출동했다. 계엄 선포에 따른 우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인다. 평소 용산에서 거점 근무를 하는 주간 기준 3개, 야간 기준 1개 기동대보다 훨씬 많은 경찰이 동원된 것이다. 구체적으론 집무실(1개 기동대, 76명) 포함 국방부와 전쟁기념관 등이 위치한 삼각지 일대에 13개 기동대 소속 904명, 윤 대통령 부부가 머무는 한남동 관저 부근에 11개 기동대 소속 694명이 배치됐다. 이 밖에 광화문 등에도 4개 기동대가 투입됐다. '계엄의 밤'을 지새우고 새벽 4시쯤 각자 부대로 복귀한 후에도 출동 대기는 오전 9시까지 계속됐다. 일부 기동대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오전 7시쯤 광화문이나 국회 일대로 다시 출동해 근무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