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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 외교'에 현혹된 한국… 의원들은 트럼프 관심사가 아니다 [문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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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지금 국회의원 무시합니까? 당장 이쪽으로 오세요!"
2005년 1월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조지 W.부시 대통령 취임식 무도회에 참석했던 한 국회의원은 주미대사관 관계자에게 이같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고 합니다. 해당 의원이 취임식에 참석한 시간은 단 15분. 주미대사관 인력과 예산, 업무용 차량 등이 동원돼 취임식 초청장 입수와 싱크탱크 인사들과의 일정 조율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고작 15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딱히 떠오르는 성과가 없습니다.
미국 정치에서 가장 전통이 오래된 행사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대통령 취임식일 것입니다. 미국 민주주의와 대통령제를 상징하는 핵심 행사지요. 1789년 이후 올해까지 60차례 열리며 국가적 축제로 자리매김한 이 행사에는 성경에 손을 얹는 취임 선서에서부터 화려한 퍼레이드까지 각종 정치적 의미가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치인들이 '눈도장'을 찍고 싶어합니다. 가능할까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취임식 주인공인 대통령 외에 미국이 주목하려는 '고객'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려면 먼저 대통령취임위원회(Presidential Inaugural Committee)와 미 의회 합동취임식준비위원회(JCCIC)를 보면 됩니다. 취임 관련 모든 행사를 총괄하는 건 대통령취임위원회입니다. JCCIC는 20일 열리는 취임식과 무도회 행사를 주관하죠.
자연히 행사 진행자금이 필요합니다. 이는 대부분 기부와 후원으로 충당합니다. 연방 예산은 미 국토안보부나 워싱턴의 공식 지역명칭인 컬럼비아특별구 등 취임식 안전과 치안 문제를 책임지는 정부기관에만 대부분 할당되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점은 기부 상한선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버락 오바마나 조 바이든 대통령처럼 자발적으로 상한선을 정하지 않는 이상, 취임식 위원회는 외국인이나 외국법인을 제외한 모든 개별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제한없이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업의 직접적인 기부 및 후원을 금지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때와 다른 점이죠. 그래서 미국 기업들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릴 때마다 막대한 후원금을 쏟아내곤 했습니다(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현대자동차는 취임식에 어떻게 기부를 한 것일까요? 미국 법인 명의로 후원이 이뤄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막대한 후원금을 뿌린 기업들에게는 18일과 19일 열리는 트럼프 취임식위원회 주최 행사와 JCCIC가 주관하는 20일 대통령 취임식 초청장이 전달됩니다. 특히 18, 19일 행사는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 취임위원회 전담 행사로서 최소 100만 달러 이상 기부한 티어-1(tier 1) 후원자들만을 위한 행사라고 하죠. 그런데 이런 '1등급'후원자만 5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20일 취임식의 경우, 'VIP좌석'이 핵심입니다. JCCIC이 기본적으로 전직 대통령들과 대법관, 상·하원 의원들에게 제공하는 자리인데요. 워싱턴 주재 각국 대사관 내외 등 외교사절단도 VIP좌석을 제공받습니다. 이외에 100만 달러 이상 기부한 이들이 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약 1,200명이 VIP석을 차지합니다. 그외 약 22만장의 초청장은 대통령 측과 상·하원 연방의원들에게 전달돼 지역구민이나 지인들에게 보내는 취지로 전달됩니다.
취임식 후 열리는 만찬 및 무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상적으로는 특정 주(州)나 단체의 주최로 진행되는 약 10여개 태마의 무도회는 테이블당 초청장이 3만 달러~5만 달러에 팔립니다. 로비업체나 로펌이 대량으로 구매해서 고객이나 지인, 이해관계자들에게 뿌리죠. 그리고 각 주의 정치 거물들이 후원 규모 순으로 참석자들과 길게는 3분, 짧게는 1분 가량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미국 '퍼블릭시티즌(Public Citizen)'과 같은 시민단체는 대통령 취임식을 검찰 수사, 관세 폭탄 등을 피하기 위한 기업들의 청탁 창구라고 비난합니다.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석'처럼 기부한 돈의 단위에 따라 '급'을 나누고 미국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예우를 해주죠. 트럼프 1기 취임식 위원회는 기부 액수에 따라 내각 주요 인사들과의 오찬과 부통령 만찬에 참석할 수 있는 이른바 'VIP 패키지'상품까지 만들기도 했습니다. 뉴욕 맨해튼 연방검찰이 해당 상품과 관련해 대가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 수사까지 벌이기도 했죠. 취임식 후원 자체는 합법이지만, 대가가 직접 오가거나 자금이 취임식 외 다른 곳에 쓰였다면 법률 위반에 해당하거든요.
이처럼 취임식에서 미국 대통령이나 미국 정계 인사들과 찍을 수 있는 눈도장 뒤엔 철저히 돈의 논리가 있습니다. 돈을 잔뜩 내지 않은 이상 미국의 중량감 있는 인사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는 행사가 바로 미국 대통령 취임식입니다.
자,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돈을 내지 않은 우리나라 국회의원과 '접견'하며 시간을 보낸다? 저라면 어떤 업체의 지원을 받았고, 어떤 약속이 오갔는지 취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미국 연방선거위원회(FEC)와 대통령인수센터(Center for Presidential Transition), 미 의회조사국(CRS), 문서관리기록관리청(NARA), 공공청렴센터(CPI) 자료를 통해 모두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럼 돈냄새가 잔뜩 나는 미 대통령 취임식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설 자리가 있을까요? 후원을 하지 않은 한국 의원들은 '어떻게'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을 계기로 활발한 외교를 펼칠 수 있을까요?
우리 국회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받은 초청장의 등급을 살펴보죠. 일단 미 연방의원 이름으로 배부된 초청장은 노란색, 파란색, 붉은색, 초록색 등 4개의 색깔로 구분됩니다. 이 색깔은 입석 여부와 위치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참고로 의원 여러분, 노란색이나 초록색 초청장이 아니면 대부분 입석이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루종일 서 있어야 합니다. 각 초청장 색깔마다 입구가 다르다는 것도 모두 알고 계시죠?
참고로 외교사절단 신분으로 VIP좌석에 앉을 수 있는 이들은 미국 주재 대사 부부나 초청 받은 외국 정부인사들입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외에도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등이 초대를 받았다고 하죠. 일본의 경우 이와야 다케시 외무장관이 정부대표로 초대를 받아 참석합니다. 그러나 1874년 이후 국무부 기록상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다른 나라의 정상이 참석한 전례는 없습니다. 그만큼 미 대통령 취임식은 그동안 철저히 국내 행사였으며, 외교사절단이 참석을 하더라도 천문학적 단위로 후원한 이들에게 밀려 외면 당하기 쉽습니다.
사실 한국 의원들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 대통령 취임식 참석 경쟁의 처참한 결과는 20년 전에 이미 확인됐습니다. 2005년 아들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 국회의원 40여명이 미 헤리티지재단(후원은 암웨이)의 초청을 받았을 때죠. 결과는... 부시 대통령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직접 후원을 하지 않은 인사를 적극 환영하며 맞이해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신 의원들에게 의전과 취임식 관련 행사를 지원해야 하는 주미대사관이 혹사를 당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 받지 못하는 행사에 따분함을 느낀 국회의원이 차량 의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전화를 걸어 항의한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취임식으로 미 내각과 의회 모두 굵직한 후원자 맞이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바다 건너 온 한국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맞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체될 가능성이 높은 미 국무부와 국방부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관료들의 면담을 부랴부랴 성사시킨 게 전부였죠. 이렇다 할 '의원 외교' 성과는 없었습니다.
이번 여야 방미 의원단은 좀 다를까요? 일단 주미대사관에서 워싱턴의 특정 싱크탱크와 현 한국의 정치상황을 궁금해 하는 의원을 중심으로 면담을 조율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는데요. 국회에서 대사관에 과도한 의전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2021년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했을 당시, 미국의 한 로비스트는 본보 기자에게 자신이 주미한국대사관과 주미일본대사관에 "트럼프는 반드시 재선에 도전하려고 할 테니, 지금부터라도 한 달에 한 번씩 식사 대접을 하는 등 만남을 가져라"라고 공통적으로 조언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로비스트를 통해 관련 네트워크 구축에 공을 들인 일본 외교관은 현재 외무성의 핵심인 북미국의 주요 보직으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이와야 외무장관의 취임식 참석과 트럼프 내각 인사들과의 면담은 이런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뤄낸 투자의 결과겠죠.
한국 정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한 외교 당국자는 "저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인력도, 예산도, 여건도 되지가 않아요"라고 한탄했습니다. 주미일본대사관의 인력과 예산은 주미한국대사관보다 2배 가량 많다고 하죠. 바이든 행정부 인사들과 미 의회 네트워크 관리만으로도 벅찬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주미대사관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동향 파악과 대처 속도가 느렸다며 질타를 받기도 했죠. 연말이면 주요국의 공관은 공식 외교관이 아닌 외교관 후보생을 파견받아 이른바 '견습'을 시키는데요. 외교부의 한 인사는 이러한 교육제도가 "사실은 임시로 인력을 지원받기 위한 꼼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네트워크를 다양화할 수 있는 여건되지 못한다는 의미겠죠.
외교자산을 꾸준히 키우기 위한 예산이나 증원 문제는 모두의 관심 밖입니다. 일회성 있는 이벤트인 취임식에만 시선이 가죠. 돈잔치로 시작해 돈잔치로 끝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대 받았냐 안 받았냐를 두고 각 정당의 정치력과 외교력을 평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사이 주미대사관의 시간과 자산(차량 및 인적 네트워크)이 낭비되는데도,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건 의전과 이벤트입니다.
복잡해지는 국제정세와 또다시 등장한 '트럼프 리스크'로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외교 전략의 난이도는 높아지기만 하고 있는데, 우리가 적용하는 평가기준은 여전히 낮기만 하네요.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외교관 출신이자, 주미대사관 근무 경험자로서 방미 의원단에 참석하지 않은 위성락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원 외교에 소홀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이 일에 관련되는 모든 분들이 이런 점을 양지하시고 판단을 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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