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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북중관계 악화에도 버텼던 중국 내 북한 노동자, 결국 짐 싸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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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랑 여자 같이 쓸 수 있는 거예요?"
9일 오후 북한과 중국 간 대표적인 접경 도시인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 위치한 신류시장. 20대로 보이는 여성 손님이 세안 비누를 살펴보며 유독 남성 겸용 제품을 찾고 있었다. 함께 쇼핑에 나선 다른 여성이 "남자 거는 왜 찾네"라고 묻자 여성은 "아바이(아버지)도 쓸 거라…"고 답했다. 조선족으로 보이는 점원이 "같이 써도 일없다(상관없다)"고 하자 여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값을 치르고 비누 20여 개를 자신의 대형 트렁크 안에 쓸어 담았다.
신류시장은 각종 생필품을 판매하는 단둥 최대 도매 상가다. 북중 접경 지역인 만큼 이 시장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목격하는 것은 평소에도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최근 들어 이곳을 찾는 노동자들의 발걸음이 유독 늘었다고 현지 소식통들은 입을 모았다. 북중관계 악화 속 '철수하라'는 중국의 압박에도 버티고 있던 북한 노동자들이 결국 하나둘 떠나고 있고, 귀국 전 중국산 생필품을 대량 구입하려는 노동자들로 연일 시장이 붐비고 있다는 것이다.
4층 규모 시장 건물 안에선 "이 물건 집에 없겠지?", "60원(위안)에 맞춰 주시오" 등 쇼핑에 나선 북한 노동자들의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평소라면 공장에서 한창 일해야 할 평일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4, 5명씩 무리를 지어 샴푸, 세안도구, 냄비, 속옷, 이불 같은 생필품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있었다. 시장 점원은 "어제도 한창(많이) 와서 이것저것 사갔다"며 "10월 무렵부터 조선(북한) 애들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주말의 경우 한 공장에 소속된 북한 노동자 수십 명이 동시에 이 시장을 방문해 '조별 쇼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인솔자가 "1조 들어가라"고 하면 5명 정도가 상가로 들어가고, 잠시 뒤 2조, 3조가 차례로 들어가는 식으로 물건을 사갔다고 상점 직원들은 전했다. 북중 간 무역 중개업에 종사했던 현지 소식통은 "평양이 결국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본격적인 귀국이 시작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해외 노동자는 북한 외화벌이 사업 주력 부대다. 중국에는 최대 5만 명의 북한 노동자가 피복 공장, 수산물 시장, 식당 등에서 일해 왔다. 그중에서도 단둥은 북한 노동자들이 몰려 있는 핵심 거점이다.
북한 노동 인력 교체는 통상 2, 3년 주기로 이뤄져 왔다. 북한 정권이 꾸린 무역회사가 중국 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중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하면 2, 3년 뒤 기존 노동자는 귀국하고 북측의 다른 무역회사가 신규 인력을 파견하는 식으로 체류 인원이 유지됐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북중 국경이 봉쇄됐고 인력 교체는 잠시 미뤄졌다. 지난해 북중 국경이 재개방되며 노동자 교체가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으나 최근까지 이렇다 할 인력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단둥 현지 소식통들은 "매일 수십 명의 인원이 북으로 돌아가고 있는 반면 새로 단둥에 유입되는 북한 노동자는 전혀 없는 상태"라고 입을 모았다. 중국 체류 북한 노동자 수가 '순감' 중이라는 뜻이다.
신규 노동자 유입은 없고, 북한으로 송환되는 노동자 수는 늘고 있는 현재 흐름은 중국이 북한 노동자 사용을 피하고 있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신류시장의 한 상인은 "평소 오지도 않던 (중국) 공안들이 며칠 전 시장에 들이닥쳤다"며 "알고 보니 북한 노동자를 단속하러 나온 것이었다"고 전했다. 실제 올해 초까지만 해도 시장 곳곳에 인공기(북한 국기)를 걸고 호객하는 점포가 많았지만 이날 인공기를 걸어둔 상점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물론 북한도 최근까지 자국 노동자를 중국에 잔류시키며 버텼다. 신규 노동자를 파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노동자를 귀국시킬 경우 외화벌이에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를 귀국시키라는 중국 측 압박, 4~7년간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의 스트레스 증가로 결국 철수·송환을 시작한 것으로 분석된다.
10일 오후 단둥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압록강대교(조중우의교) 인근 도로. 근래 신의주로 향하는 버스 운행이 잦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다리 위를 관찰하기 시작한 지 20분 정도 흘렀을 때 초록색 버스 한 대가 단둥을 떠나 신의주로 향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30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크기였다. 북중 간 육로 교역이 주로 화물열차와 트럭을 통해 이뤄지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버스에는 귀국하는 북한 노동자나 정부 인사들이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현지 주민은 "몇 달 전만 해도 가끔 볼 수 있었던 버스가 최근에는 수시로 운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중국 한국대사관은 최근 랴오닝성 선양과 평양을 오가는 북한 고려항공편이 주 2회에서 3회로 증편된 것으로 파악했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 내 북한 노동자들의 귀국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증편으로 추정 중"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최근 북한 노동자 송환이 '전면 철수'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면서도 "인력 교대 없이 북으로 돌아가는 노동자가 늘고 있는 흐름은 감지된다"고 전했다.
이 같은 동향은 '북중관계 급랭', '북러 밀착 강화' 흐름과 무관치 않다. 북한 노동자 채용은 국제법 위반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9년 12월 북한 인력 사용을 금지한 대북 결의 2397호를 통과시키는 등 전 세계에서 북한 인력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왔다. 이에 대해 "진지하게 국제적 의무를 이행 중"이라고 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중국이 최근 들어 태도를 바꾼 것이다.
북중관계 악화 징후는 올해 내내 곳곳에서 포착됐다. 지난 9월 평양에서 열린 북한 정권 수립 기념행사에 왕야쥔 주북한 중국대사가 '휴가'라는 묘한 이유로 불참했고, 북한은 6월 관영 매체 송출 수단을 중국 위성에서 러시아 위성으로 돌연 교체했다.
수교 75주년을 맞은 양국은 올해를 '조중(북중) 우호의 해'로 지정하고 4월 평양에서 개막식을 열었다. 중국 권부 서열 3위 자오러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당연히 자오러지와 비슷한 급의 북측 인사가 중국을 찾아 폐막식 행사를 여는 게 외교적 관례지만, 개최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올해가 약 2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임을 고려하면 '북중 우호의 해' 행사는 '개막은 있고 폐막은 없는' 기형적 모습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경제적 난국에 처한 중국은 미국 등 서방과의 긴장 이완을 우선시하고 있다. 미국의 집중적인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의 '뒷배' 역할은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게 북중관계 급랭 기류의 본질적 배경으로 꼽힌다.
대신 북한은 러시아를 새로운 동반자로 맞았다. 양국은 지난 6월 '포괄적인 전략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 사실상의 군사동맹 관계를 새로 수립했다. 또 코로나19 확산으로 중단됐던 두만강역과 연해주 하산역을 오가는 북러 여객 열차 운행이 16일 재개됐다. 2020년 2월 국경을 봉쇄한 지 4년 10개월 만이다. 양국은 철도 운행에 앞서 지난 5월 항공편 운항도 재개했다.
한국 정보 당국은 북한이 중국 대신 러시아에 대규모 노동자 파견을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시 개통된 열차 등은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될 북한 병력과 러시아에서 일할 노동자 운송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 베이징 외교가에선 "러시아라는 새로운 돈줄이 생기면서 북한이 중국을 통한 외화벌이에는 당장 목을 매지 않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과 멀어지며 생겨난 북한의 외화벌이 '구멍'을 러시아가 메워주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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