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 보였던 '오빠', 그 놈이 범인이었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일상이 지워졌다. 더는 SNS에 추억이 담긴 사진을 공유할 수 없고, 교실에서 친구들과 마음 편히 수다 떠는 게 두렵다. 댄서가 돼 무대에 서겠다는 꿈도 사라졌다. 지난여름, 우리 사회를 분노케 한 딥페이크 사건 피해자들의 지옥 같은 풍경이다. 사회적 관심은 계절이 바뀌며 싸늘하게 식었고, 홀로 남겨진 10대들은 더 기댈 곳이 없다.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스는 어린 피해자와 가해자가 유독 많은 국내외 딥페이크 사건 그 후를 추적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교실 안 풍경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아이들이 마음의 벽을 쌓기 시작한 건 지난여름부터다. 10대 여학생을 겨냥한 비슷한 수법의 범죄가 좁은 도시 안에서 잇따라 터진 탓이다. 소식은 인스타그램을 타고 삽시간에 퍼졌다. 범행 장소는 학교와 교회 등 안전해 보이는 공간들이었다. 그리고 3개월이 흘렀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꺼지자 이곳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아이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었고 그들이 생활하는 교실은 혐오에, 도시는 불신에 잠식돼 있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은 수도권의 한 도시에서 발생한 3건의 동종 사건이 10대들에게 남긴 상처를 3개월간 쫓았다. 사실 비극은 이 도시 아이들만 경험한 일은 아니다. 올해에만 전국에서 900여 건의 비슷한 사건이 적발됐고 그 가해자와 피해자는 대부분 10대였다.
"그 오빠도 피해자 아냐? 이름만 도용당했을 수 있잖아."
아빠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하던 지난 9월 4일 밤, 고교생 권다정(17)은 여전히 믿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다정과 열 살쯤 차이 나는 이동석은 그만큼 믿을 만한 남성이었다. 교회 예배 때 눈물을 흘리며 찬양할 만큼 독실했기 때문이다. 다정의 아버지인 권정훈(54)도 딸과 생각이 같았다. 그날 이른 오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인데 따님이 성범죄 피해를 입은 게 확인됐으니 출석해달라"는 전화를 받고도 한동안 믿지 못했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부녀는 분주한 사이버수사대 사무실 한편에 앉았다. 희대의 성범죄자인 'n번방 사건' 주범 조주빈(29)을 잡았다는 팀장이 다정의 사건을 담당한다니 현실감은 더 떨어졌다. 수사관들은 압수한 이동석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 중 일부를 골라 탁자 위에 올렸다.
"학생 얼굴이 맞아요?"
무표정한 수사관의 물음에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이동석은 학교와 교회에서 만난 여성 24명을 범행 표적으로 삼았다. 친밀한 이들의 얼굴 사진을 나체 등과 정교하게 붙인 딥페이크(불법 합성 이미지) 119개를 만들었고 이를 텔레그램 교환방에서 다른 이들과 공유한 혐의를 받았다. 그의 컴퓨터에서는 아동 성착취물도 여럿 발견됐다.
정훈은 그날 이후 매일 딸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태연한 척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아빠는 안다. 다정은 부모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속내를 학교 상담 교사에게 이야기했다.
"범인과 친했던 사람들 얼굴이 한 명씩 떠올라요. '혹시 돌려봤나' 싶어 오싹하죠."
아빠는 고작 10대 후반인 아이가 앞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불신하게 될까 봐 걱정이다. 몇 해 전 지인의 딸이 비슷한 피해를 겪은 뒤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도 떠올랐다.
믿었던 사람이 사이버 공간에 숨어 피해자를 향한 이중성을 드러낸 악행. 딥페이크 범행의 첫 번째 끔찍함은 여기에 있다. 다정뿐 아니라 피해 여성 대부분이 면식범에게 당했다. 한국일보가 딥페이크 처벌 근거(성폭력처벌법상 허위영상물의 반포 등)가 만들어진 2020년 6월 이후 이 조항이 적용된 사건 105건의 판결문을 입수해 분석해보니 가해자의 62.9%(66명)가 피해자와 아는 사이였다.
특히 10대 때 친분 있는 남성에게 범행을 당하면 상처는 더 깊게 파일 수밖에 없다. 청소년 범죄 피해자를 20년간 상담해온 김태경 서원대 심리학과 교수는 딥페이크 범행을 당한 10대의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범죄보다 수치심이 훨씬 크죠. 보통은 범행 사실을 피해자만 알기 때문에 숨길 수 있는데, 딥페이크는 주변에 소문이 먼저 난 뒤 피해자 귀에 들어와요. 게다가 범인이 아는 사람이면 배신감과 무력감까지 더해집니다. '바로 곁에 나쁜 놈이 있었는데 바보처럼 못 알아봤구나'라며 자기 비난까지 할 수 있어요."
다정과 같은 도시에 사는 A중학교 학생 이해은(15)은 지난 10월 중순, 수업을 듣지 않고 급히 보건실로 몸을 피했다. 가해자가 교실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해은이 마치 알몸으로 있는 것처럼 조작한 딥페이크를 여러 장 만들고 다른 남학생들과 돌려보며 낄낄댔던 그 아이다. 범행 일부가 드러나자 임시 등교 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풀렸고,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가 처분 수위를 확정하기 전까지 학교에 올 수 있게 됐다. 가해 남학생은 모두 4명. 같은 학교 여학생 14명과 여교사 1명이 자신도 모르는 새 피해를 봤다.
범죄가 들통난 뒤 도망쳐야 하는 쪽은 늘 피해자였다. 어디에 있든 가해 학생들이 불쑥불쑥 나타난 탓이다. 교문 밖도 두려웠다. 공공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가해자가 옆자리에 앉는 일도 있었다. 풍경이 좋아 평소 천천히 걷던 하굣길도 가해자를 마주칠까 봐 잰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좁아서 더 정이 넘쳤던 동네. 하지만 사건이 터지자 피할 공간조차 없는 작은 지옥으로 변했다. 해은은 부모 앞에서 의연한 척했지만 중간고사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피해자의 고통에 둔감한 일부 아이들은 딥페이크 사건을 흥미로운 에피소드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2차 가해가 판쳤지만 제도와 어른들은 이를 완벽하게 막아주지 못했다. 딥페이크 피해를 당한 전국의 10대들이 흔히 겪는 두 번째 어려움이다. A중학교는 9월 초부터 가해자들에게 임시 등교 정지 처분을 내렸지만, 심리적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기자에게 전하던 피해 학생의 어머니 박명지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남학생 몇 명이 등교 정지 당한 가해자와 교실에서 영상통화를 했대요. 피해자도 있는 공간에서 버젓이. 히히덕거리며 가해 학생에게 '집에서 편하게 공부하니 '개꿀'(굉장히 이득 본 상황을 뜻하는 은어)이겠다'거나 '나도 딥페이크 할 걸'이라는 말까지 했다는데… 피해 본 아이들 마음이 어땠겠어요?"
학교는 학교폭력 매뉴얼상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특히 10월 중순쯤 돌아온 가해자들은 피해 학생과 같은 교실에 배치됐다. 피해자는 또 도망쳐야 했다. 해은의 한 친구는 체험학습을 신청해 며칠간 등교하지 않았다. 묘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었다. 성인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을 당한 뒤 겪는 일과 꼭 닮았다. 조직이 가해자와 제대로 분리해주지 않으면 피해자가 개인 휴가를 써가며 피하는 사례가 흔하다. 10대들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너무 일찍 알게 됐다.
일부 교사가 서투르게 던진 말들도 가시처럼 박혔다. 한 중견 교사는 피해자가 있는 교실에서 수업하던 중 학생들에게 "가해한 친구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혹시 보면 위로해주자"는 취지로 말했다. 다른 교사는 학교 안팎에서 심각한 2차 가해를 당해 괴로워하는 여학생에게 말했다.
"너무 예민해하지 말고 너가 피해자이니 당당하게 다녀."
물론 학교도 난처한 면이 있다. 우선 가해자와 피해자를 완벽히 떼어놓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교실 부족 등 제약이 있는 탓이다. 또, 학교 측은 교사 발언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요청하고 어깨를 펴고 힘내보자'는 취지로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한마디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피해 학생들이 교사를 찾아가 "우리가 웃고 있으니 안 힘들 줄 아느냐"고 따져 묻는 일까지 있었다.
피해 여학생이 느끼는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 배신감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아직도 악몽을 꾼다는 해은은 최근 엄마에게 "용서할 마음이 없으니 선처해주지 말라"고 못 박았다. 이는 딥페이크 피해 10대들의 일반적인 심리다. 본지가 입수한 딥페이크 학교폭력 조치결정 통보서들에서도 이런 점은 명확히 확인된다. 40건의 통보서 중 19건에 피해자의 화해 의향이 적혀 있었는데, 단 1건을 제외하고는 화해 가능성이 아예 없거나 낮았다. 학교폭력 사건을 여럿 맡아온 노윤호 변호사는 안타까워했다.
"딥페이크 피해를 당하고 나면 '가해자가 나를 그동안 성적 도구로만 바라봤겠다'라는 심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죠. 다른 학폭 사안과 비교해 화해와 치유가 어려운 이유죠."
딥페이크라는 '폭탄'이 학교에서 터지면 범행 대상이 된 아이들만 다치는 게 아니다. 이들과 일상을 공유해온 친구들이 모두 상처받는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불안감은 쉽게 전염된다. 자신이 다음 타깃일 수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해은의 학교에서 6㎞ 정도 떨어진 B중학교에서도 3학년 남학생 이장엽(15)이 딥페이크를 제작해주는 텔레그램 '지인능욕방'에 주변 또래들의 사진을 올려 큰 충격을 줬다. 이보미(13) 등 같은 학교뿐 아니라 주변 고교의 여학생 사진도 악용했다. 여자아이들은 디지털 공간에서 황급히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시작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사진을 내리고, 프로필 이름까지 삭제했다. 이들이 느낀 공포심은 어느 정도일까. 성폭력 문제를 연구해온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테러'에 비유했다.
"예컨대 연인 간 불법 촬영 공포가 커졌을 때 여성들에게 '성관계 때 영상을 찍지 말고 조심하라'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딥페이크는 조심할 수조차 없죠. 남자친구가 없고 집에만 콕 붙어 있어도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범행 대상이 안 되려면 존재 자체가 없어야 하는 겁니다. 길을 걷다가 난데없이 공격받는 상황과 비슷한 셈이죠."
남학생들의 태도는 온도 차가 났다. 가해자에게 분노를 드러낸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차분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①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신이 성범죄를 당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판단하기에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고 ②간단한 합성 기술을 활용한 과한 장난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A중학교의 한 남학생은 이런 분위기를 들려줬다.
"남자아이들은 딥페이크 사건을 대부분 심각하게 생각 안 하는 눈치예요. 어쩌다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고 보는 거죠. '어차피 진짜 몸도 아닌데 이 정도로 키울 일이냐'는 이야기도 해요."
교실은 아이들이 공감과 포용을 배워야 할 공간인데, 다른 성(性)을 향한 냉소와 차별까지 퍼뜨리고 있었다. 딥페이크 범죄의 세 번째 끔찍함이다. 10대 때 물든 정서는 성인이 돼서도 쉽게 버리기 어렵다.
남성 성교육 전문강사인 이한은 학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프레임'(틀)을 바꿔야 성별 갈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폭력 사건 안에는 가해자를 두둔하는 동조자부터 방관자, 목격자 그리고 피해자 편에 서려는 지지자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생각하죠. 남성은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가 될 거라는 상상을 잘 안 해요. 그래서 주로 가해자에 이입하는 거죠. 폭력 예방 교육을 할 때 '왜 남자를 가해자 취급하느냐'고 화를 내는 이유도 여기 있죠."
결국 학내 성폭력이 줄어들려면 방관자 대신 지지자가 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 교육에선 이 역할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가해자를 벌해도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딥페이크 등 사이버 성범죄물은 무한복제될 수 있는 까닭에 범인이 잡혀도 계속 퍼질 수 있다. n번방 사건 등을 수사한 유나겸 제주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장은 "피해자 중에는 '가해자는 천천히 잡아도 좋으니 불법 이미지부터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완벽한 삭제는 무척 어렵다. 유 대장은 "고교생이 할머니가 돼도 끝나지 않는 게 사이버 성범죄 피해"라고 설명했다.
진학 제도의 맹점도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A중학교 사건의 가해자 중 딥페이크를 직접 만든 2명은 강제 전학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해은의 머릿속엔 '1년 뒤 그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걱정이 맴돈다. 이 도시가 비평준화 지역(학생들이 진학 희망 고교를 써내면 중학교 내신 성적 등을 기준으로 입학생을 뽑는 곳)인 탓에, 교육청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 임의로 학교 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딥페이크범들이 범행 때 활용한 피해자 사진에는 일상이 담겼다. 수련회에서 활짝 웃거나 교실에서 친구와 수다를 떠는 모습 같은 것들이다. 사건이 종결돼 피해자들이 일상 공간으로 돌아와도 온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딥페이크 범행의 네 번째 잔혹함이다.
지난 10월 말 첫 공판이 끝난 뒤 법정 앞에서 다시 만난 다정의 아빠 정훈은 손수건으로 젖은 눈가를 훔쳤다. 녹색 수의를 입고 피고인석에 앉은 이동석을 보니 그제야 현실임이 인정됐다고 했다. 정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손발이 묶인 채 무차별적으로 얻어맞는 기분 아세요?”
딸이 범죄를 당했는데 아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딸의 마음에 난 상처가 잘 아물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답답했다. 법원이 혹시 사소한 사건으로 보지 않을지도 걱정됐다. 딥페이크 피해를 당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들은 우울감과 분노 속에 본인의 쓸모를 씁쓸히 따지고 있었다.
■한국일보·코리아타임스 특별취재팀
팀장 : 유대근 기자(엑설런스랩)
취재 : 진달래·원다라 기자(엑설런스랩), 김태연 기자(사회부), 정다현 기자(코리아타임스), 이지수 인턴기자
사진 : 하상윤 기자, 류기찬 인턴기자
영상 : 박고은·이수연·김용식·박채원 PD, 김태린 작가, 김가현 인턴PD, 전세희 모션그래퍼
※<제보받습니다> 한국일보는 딥페이크 범죄 피해를 당한 아동∙청소년과 그 가족, 주변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딥페이크 피해와 그 이후 수사, 재판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학교 안팎에서 겪은 부조리, 2차 가해 등이 있으시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가해자의 탄생
아이들을 몰랐다
어떻게 싸워야 하나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