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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차별과 싸우며 생명 구해”… 소방관 퇴직 후 상담소 연 '성소수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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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편견, 혐오. 40년간 소방관으로 헌신한 정은애(60)씨가 맞서 싸운 단어다. 정씨는 국내 처음으로 여성 소방관을 뽑은 1984년 소방관이 됐다. 여자 화장실도 없고, 담배 연기가 자욱한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남자 동료들이 쓰는 재떨이를 비우거나 커피 타는 일도 도맡았다. 억울했지만, 여자라서 차별받는 게 아니라 막내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며 버텼다. 세월이 흘러 사회 인식도 변하고 근무 환경도 나아졌지만, 정씨에겐 복병이 기다렸다.
딸 한결(30)씨가 타고난 성과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정씨는 좁게는 직장, 넓게는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혐오를 혹독하게 체감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돌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어”라는 한결씨의 말은 정씨의 가슴을 후볐다. 정씨는 2017년 4월부터 성소수자 부모 모임과 퀴어축제 등에 참여하며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하는 실천을 하고 있다.
전북소방본부 최초 여성 지휘팀장,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소방노조 초대 위원장 등을 지낸 정씨는 지난 7월 30일 군산시 금동 119안전센터장을 끝으로 제복을 벗었다. 대신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정씨는 퇴임 후 고향인 군산시 영화동에 심리상담소 ‘레인보우 심리코칭’을 열었다. 지난달 15일 상담소에서 만난 정씨는 인권 교육가로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2~3일은 군산에서 인권 상담에 매진하고, 나머지는 전주(전북특별자치도청)와 서울(국가인권위원회) 등을 오가며 인권 강사 교육을 받고 있다. 정씨는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기보다 누구든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권 강사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다.
정씨는 한결씨와 2021년 변규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트랜스젠더 아들을 둔 엄마 ‘나비’로 이름이 알려졌다. 성소수자 부모들이 자녀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영화 출연 이후 정씨를 ‘나비님’이라고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도 늘었다.
하지만 정작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주변인도 적지 않았다. 소방관 재직 시절 일부 동료는 ‘자녀가 트랜스젠더인 게 무슨 자랑이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정씨는 그럴 때마다 “쉰 살 넘어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준 내 아이가 자랑스럽다"고 의연하게 응수했다고 한다.
정씨의 이런 용기는 소방관 시절 내내 누군가에게 든든한 생명 줄이 됐다. 그는 가정폭력 쉼터에 빈자리가 없어 당장 지낼 곳이 없는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서슴없이 자기 방을 내줬다. 2018년 부하 소방관(고 강연희 소방경)이 구급 활동을 하다 취객에게 폭행당해 숨졌는데도 순직이 인정되지 않자 앞장서 목소리를 냈다. 정씨는 2019년 당시 ‘피는 펜보다 강하다’고 쓰인 피켓을 들고 동료들과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인사혁신처는 같은 해 4월 재심에서 결국 강씨를 위험직무순직으로 인정했다.
정씨는 “소방관은 육체를 많이 쓰는 직업이면서 동시에 구조 현장에서 폭언·폭행 등에 시달리는 ‘감정 노동자’”라며 “위험을 무릅쓰고 시민을 구한 소방관의 헌신이 폄하됐다고 느껴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경험은 정씨가 상담소를 트라우마나 우울증을 겪고 있는 소방관 후배들을 돕기 위한 소방관인권센터로 활용하는 원동력이 됐다.
정씨 상담소에는 소방서에서 의무 복무하다 트라우마가 생긴 20대 취업 준비생부터 가정 불화로 고통을 겪는 40대 여성 등 다양한 이들이 찾고 있다. 정씨는 “구조·구급 현장에서 40년 넘게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심리적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돕고 싶다”며 “내담자에겐 ‘당신이 여태 살아온 방식은 당신의 그간 삶에 꼭 필요했고, 유효했다’고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한국 사회는 ‘공존’보다 ‘혐오’라는 감정이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서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단 한 명이라도 손길이 닿지 않는 이에게 힘이 돼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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