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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국극 팬들, 혈서까지 보내"...'정년이' 원작 웹툰 이렇게 만들었다[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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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시청자들도 "배우들이 소리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새로운 문화 경험"이라고 호평 중인 12부작 드라마 '정년이'는 동명의 웹툰(글 서이레·그림 나몬)이 원작이다. 2019년 시작해 3년간 연재하며 입소문을 탔다. 195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였던 공연예술 '여성국극'을 이야기의 큰 줄기로 삼고 주인공 '윤정년'이 최고의 국극스타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여성국극이 등장하는 웹툰은 사실상 국내 최초였다.
웹툰 속 정년이는 1941년 태어나 1956년부터 국극 판에 첫발을 딛는다. 15세의 소녀는 전남 목포에 살면서도 "서울 가서 국극하면 부자 된당께요?"라고 큰소리칠 정도로 당시 국극의 위상과 인기를 알고 있었다. 여성국극의 매력이 대체 무엇이기에 정년이는 이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게 됐을까. 웹툰 '정년이'의 스토리를 쓴 서이레 글작가를 23일 만나 물어봤다. 서 작가는 "정년이는 여성국극 무대에 서면서 비로소 '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여성국극은 여성으로만 조직된 배우들이 모든 배역을 맡는 국악연극이다. 기존 판소리를 각색하거나 창작한 소리에 춤과 연기를 함께 선보인다. 여성국극 배우는 여성 역할(여역)은 물론 남성 역할(남역)도 맡는다. 이런 무대가 실재했다는 것은 서 작가가 여성국극을 '정년이'의 큰 줄기로 선택한 가장 큰 계기가 됐다. 웹툰과 드라마에서 정년이가 처음 맡는 배역도 '춘향전' 속 남성 노비인 방자다.
서 작가는 "웹툰에서 정년이는 남자로 분장하고 행동할 때와 여성으로 대중 앞에 설 때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 무대에서 더 자유롭게 나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여성국극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정년이가 극단에 입단한 계기는 큰돈을 벌기 위해서지만, 여성국극 배우로 살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대가 준 '자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여성국극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직후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가장 낮았던 시기에 탄생해 1950년대 최전성기를 누린다. 서 작가는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굉장히 흥미로운 현상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무대의 자유를 갈망한 어린 여성들은 끊임없이 여성국극단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연구생(연습생) 신분으로 합숙 생활을 하며 수련했고 전국 순회공연도 했다. 정년이가 소속된 '매란국극단'이 단원 수십 명이 함께 쓰는 숙소와 연습장을 둔 것으로 묘사된 건 당시의 인기를 반영한 결과다.
배우들의 수입과 팬덤도 상상을 초월했다. 대형 극단의 경우 무대를 올리는 날엔 하루 2~4번씩 공연했는데, 관객이 너무 많이 몰려 기마경찰까지 동원됐다. 공연이 끝나고 수입을 정산할 땐 80㎏ 쌀가마니 몇 개에 현금이 가득 찰 정도였다. 서 작가는 "이때 여성국극 배우들은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면서 "팬들이 식사나 의복을 챙겨줘 자기 돈으로 사본 적 없다는 증언도 있었고, 팬들이 좋아하는 여성 배우에게 혈서를 써서 보내는 것도 보편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서 작가는 여성국극의 인기가 높았던 또 다른 이유로 연습생 또는 배우들 간 관계의 역동성을 꼽았다. 다양한 여성이 갈등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의 무대가 탄생하는 과정에 많은 장면을 할애한 이유다. 서 작가는 "드라마 '정년이'를 보면 윤정년이 (국극 엘리트로 평가받는) 허영서와 세게 부딪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웹툰에서 그려진 것보다 더 심하게 붙는 것 같다. 작품을 쓰면서 의도한 부분이 잘 반영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웹툰 '정년이'는 왜 1956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상황을 다뤘을까. 1세대 여성국극 배우로 꼽히는 조영숙 배우 등의 증언집을 보면 이 시기 여성국극의 인기는 영화 산업 발전 등과 맞물려 정상을 찍고 내리막을 탔다. 서 작가는 작품을 기획할 때부터 꿈을 향해 달려가는 여성배우들이 국극의 쇠퇴기와 부딪치는 갈등 상황을 염두에 두고 "황혼기의 이야기를 다루게 됐다"고 했다. 애초 구상한 결말 역시 국극의 인기가 떨어졌음에도 모두 열정을 갖고 공연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작화를 담당한 나몬 작가와 상의해 이를 바꿨다. 서 작가는 "픽션 안에서라도 배우들이 노력의 보상을 받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 현실과 다르게 여성국극의 명맥을 잘 잇는 상황으로 끝냈다"고 밝혔다.
서 작가는 특정 여성국극 배우를 모델로 삼지 않고 주인공 정년이를 창작하면서도, 그가 처음 살던 곳과 연령에는 현실감을 부여했다. 윤정년은 판소리 실력을 갖춘 상태로 등장하는데,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시작된 것에 착안해 그가 등장하는 첫 공간은 목포로 잡았다. 이때 정년이가 15세였던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당시 여성국극단에 입단하는 여성 중엔 10대 후반도 있었다는 사실 등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생생한 '정년이' 속 여성국극 배우들의 삶은 2년에 걸친 자료조사 끝에 탄생했다. 그러나 1950년대 여성국극단 내부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는 부족했다. 무엇보다 상연 중인 공연이 드물었다. 그나마 2013년 제작된 여성국극 배우들의 다큐멘터리 등을 보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여성국극 전성기의 공연 자료를 보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이에 그는 해외의 유사한 극장예술을 참고했다. 일본의 '여성 가극' 다카라즈카다. 1913년 설립된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여성만으로 조직돼 노래·춤이 섞인 뮤지컬 형태의 공연을 100년 넘게 이어왔다. 여성국극처럼 여배우가 남역과 여역을 모두 맡는다.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와 도쿄에 전용 극장이 있고 공연에 투입될 여배우를 육성하는 다카라즈카 음악학교까지 있다.
서 작가는 "다카라즈카는 초기에 주로 서양식 극 등을 무대에 올렸다. 우리 소리를 활용한 극을 올린 여성국극과 차이가 있다"면서도 "다카라즈카는 여성만으로 구성된 가극단이 명맥을 잇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사례여서 극단의 구성, 연출, 연기 방식 등을 집필에 참고했다"고 밝혔다.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해 웹툰 '정년이'는 여성 서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지난 7월 21회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올해로 데뷔 10년 차가 된 서 작가는 '정년이'를 두고 "작업을 계속해도 되겠다는 응원이 된 작품"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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