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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가 후보 '텔레 마케팅'으로 변질... 민심 왜곡하는 '정치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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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선에서 이재명 경기지사와 윤석열 검찰총장이 맞붙는다면 선생님께서는 누구를 지지하시겠습니까? 보기는 순환됩니다. 1번 이재명 경기지사, 2번 윤석열 검찰총장, 3번 그 외 후보···."
2021년 2월 9일, 대선을 앞두고 미래한국연구소 의뢰로 PNR(피플네트웍스)이 진행한 첫 여론조사 질문지 내용이다. 당시 보수진영의 대선주자로 꼽힌 인물은 윤 대통령과 홍준표 대구시장, 유승민 전 의원 등 6명이었다. 하지만 양자 가상대결 질문은 ‘이낙연 대 윤석열’ ‘이재명 대 윤석열’ ‘김두관 대 윤석열’뿐이었다. 당시 현직 검찰총장 신분의 윤 대통령만을 넣어서 여론조사를 진행한 것이다. PNR은 같은 해 3월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도 2월 조사 때와 같은 양자 대결만 진행했다. 4월 조사에서 '이재명 대 홍준표' 문항이 추가됐지만, 7월 21일부터 8월 29일까지 6차례 조사에서는 다시 보수진영 양자 대결 후보로 윤 대통령만 포함시켰다.
한국일보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 홈페이지에 등록된 미래한국연구소와 시사경남이 의뢰한 PNR 여론조사를 20일 전수 분석했다. 미래한국연구소와 시사경남은 최근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중심에 있는 명태균씨가 관련된 곳이다. 지난 대선 당시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홍준표 대구시장이 최근 "지난 대선 경선 때 명씨가 운영하는 PNR에서 윤 후보(대통령) 측에 붙어 여론 조작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았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PNR은 2021년 2월 9일부터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결정된 같은 해 11월 5일까지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양자 대결' 조사를 27차례 했다. 이 가운데 9차례는 보수 진영의 다른 후보를 배제했다. 윤 대통령만으로 이 대표, 이낙연 전 국무총리, 김두관 전 의원,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진보 진영 후보와 '양자 대결' 조사를 진행했다. 같은 기간 홍준표 대구시장이 포함된 여론조사도 18번 이뤄졌다. 이 중 이 대표와 이 전 총리가 포함된 양자 대결 조사는 4차례에 불과했고, 14차례는 이 대표와 양자 대결만 물었다. 역시 당시 여권 대선주자였던 유승민 전 의원과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은 민주당 후보가 이 대표로 결정된 후 세 차례의 조사에서만 양자 대결 후보로 올랐다. 27차례 여론조사에서 진행된 전체 양자 대결 조사는 83회, 이 중 윤 대통령이 들어간 양자 대결은 55회에 달했다.
특정 후보에 치우친 여론조사는 사실상 '텔레 마케팅'이나 마찬가지다. 실제 민심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다. 특히 해당 후보가 '유력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는 양자 대결의 경우, 유권자 수가 적은 지방선거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통상 기초단체장 선거 여론조사가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다고 가정하면, 유권자 5만 명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여론조사 한 번으로 유권자 1%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는 셈이다. 선거 브로커들이 여론조사를 들이대며 정치 신인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출마자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여론조사는 선거 때마다 반복돼 왔다. 하지만 2017년 법 개정으로 후보자가 직접 여론조사를 4번 이상 진행하면 초과분을 '선거비용'에 포함하게 하는 규제가 생겼다. 이런 틈새를 정치 브로커들이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1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지난 4월 총선과 함께 치러진 상반기 재보궐선거 출마 예정자의 '1인 인지도 조사'를 사전 선거운동으로 규정하고, 출마 예정자와 해당 여론조사업체 대표를 고발한 사례도 있었다. 이에 대해 한 정치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소지역구 단위에서 예비 후보자의 이름이 포함된 여론조사가 몇 번만 진행돼도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가 크다"며 "만약 브로커가 여론조사 업체를 운영하거나 공모를 할 수 있는 업체가 있다면 그 자체가 마케팅 포인트"라고 지적했다.
정치 브로커들은 여론조사 사전 신고를 피해가기 위해 '유사 언론'을 활용한다. 공표 여부와 상관없이 선거 관련 여론조사는 시작 2일 전까지 여론조사 목적, 표본 크기, 조사 지역·일시·방법, 전체 설문 내용 등을 사전 신고해야 한다. 하지만 방송 사업자와 신문 사업자, 정기간행물 사업자, 뉴스통신 사업자 등이 여론조사를 의뢰하는 경우는 예외다. 인터넷신문의 경우 하루 평균 이용자 수 10만 명 이상인 곳만 해당되는데, 신문이나 잡지는 이런 기준이 없다.
명씨의 여론조사 조작 의혹 논란에 등장한 미래한국연구소와 시사경남에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정기간행물 등록 현황을 보면 미래한국연구소는 주간신문 '시사경남'과 같은 제호의 인터넷신문을 발행했다. 대선 기간 미래한국연구소와 시사경남은 대부분 다른 언론사와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의뢰했는데, '미래한국연구소·시사경남' 의뢰 여론조사를 진행한 사례도 한 차례 있었다.
선거 컨설팅 업체를 표방한 정치 브로커들은 여론조사업체와 언론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규제를 피해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여론조사 업체 A사의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본 결과, 사업 목적으로 '여론조사 및 리서치업' '선거 전반 컨설팅 사업' '정기간행물 발행 등 신문, 언론사업'을 동시에 등록해 놓았다. 실제 A사는 B신문이라는 주간지를 발행하는데, A사가 선관위에 등록한 여론조사 103건의 여론조사 중 29건이 B신문 의뢰로 진행된 사실상의 자체조사였다. 해당 업체는 지난 4월 총선에서 특정 정당의 경선 과정에서 특정 후보와 함께 불법 여론조사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곳이다.
브로커와 여론조사업체, 언론사가 공모하는 과정에서 불법을 자행해 적발된 사례도 있다. 2016년 총선 당시 수도권 지역구 예비후보로 나섰던 C씨는 언론인 D씨에게 당원 명단을 전해 주면서 여론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D씨는 여론조사업체 본부장 E씨를 통해 여론조사를 진행했고, 조작된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이 과정에서 C씨는 D씨에게 350만 원을 건넨 사실이 드러났고, 법원은 C씨와 D씨 모두에게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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