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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안개·야경도시… 어둠이 내리면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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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은 시각보다 깊게 각인된다. 20여 년 전 처음 충칭을 방문했을 때 남방의 향신료 같은 특유의 냄새에 비릿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골목에 매캐하게 퍼지던 조리 연기와 상인의 고함소리, 도로의 매연과 경적소리가 뒤섞여 꽤 무질서한 도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난 4월 충칭공항에 내렸을 때 진한 후각으로 남아있던 그 도시는 없었다. 겉보기에 잘 정돈된 외관은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베이징, 상하이, 톈진과 함께 성급 직할시다. 인구 3,000만 명의 거대 도시라는 수식에는 과장이 섞여 있다. 면적이 남한의 80%에 이르기 때문이다.
충칭을 여행하는 한국인이라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다. 중일전쟁을 치르던 국민당 정부는 1937년 충칭을 전시수도로 정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함께 이동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부터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 중심 위중구에 정착했다. 한 나라의 정부 청사라 하기에는 소박하지만 각 부처 사무실과 집무실을 두루 갖추고 있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내 우리 손으로 광복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항일독립투쟁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흑벽돌 건물 3개 동으로 구성된 단아한 청사는 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다. 베란다에 빨래가 주렁주렁 내걸려 있다. 도심의 가장 중심부지만 삶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이 충칭 시민들에게 오롯이 퍼지는 듯하다. 청사는 영화 ‘암살’을 실제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외무부 집무실에서는 독립기념관에서 제작한 임시정부의 여정과 노력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다만 제작한 지 오래된 듯 화질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근에 충칭의 상징 ‘해방비’가 있다. 높이가 27.5m에 이르러 사실상 탑에 가깝다. 1941년 국민당 정부가 항일전쟁 승리를 염원하며 처음 세웠고, 1950년 공산당 정부에서 '항일전쟁승리기념비'를 '인민해방비'로 명칭을 변경했다. 충칭은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본토의 마지막 수도였다. 당시 일대에서 가장 높았던 해방비는 이제 사방으로 고층 빌딩에 포위당한 형국이다. 건물 벽면의 대형 전광판에서 끊임없이 광고를 쏟아내고 있다. 자본주의에 포위된 인민해방비라니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해방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보행자 전용 대로가 연결돼 있어서 주변은 항상 인파로 붐빈다. 바로 인근에 충칭음식거리가 있다. 대부분 식당이 재료를 잔뜩 진열해놓고 즉석에서 조리해 판매한다. 사천요리의 매운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성도시, 안개도시, 야경도시. 모두 충칭을 지칭하는 말이다. 양쯔강(揚子江)과 자링강(嘉陵江) 합류 지점으로, 건물이 대부분 강 언덕에 산성처럼 자리 잡고 있다. 경사가 심해 중국에서는 드물게 자전거가 다닐 수 없는 도시다. 여름에는 특히 습하고 무더워 우한, 난징과 함께 중국 3대 화로라는 별명도 보유하고 있다.
쓰촨, 간쑤성과 함께 지금도 중국에선 변방으로 인식되는데 야경만큼은 세계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밝고 화려하다. 그 휘황찬란한 불빛에 관광객이 불나방처럼 몰린다. 틱톡에 앞다퉈 동영상을 올리려는 ‘왕홍(網紅)’도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다. 왕홍은 '왕뤄홍런(網絡紅人)'의 줄임말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터넷 유명인이다.
왕홍이 가장 많은 곳은 단연 홍야동(洪崖洞)이다. 2006년 아무것도 없는 자링강 절벽에 층층이 세운 청나라식 건축물이다. 어둠이 내리면 나무 기둥, 하얀 회벽, 기와지붕에 은은한 주황색 경관조명이 켜진다. 고층 빌딩 속에서도 돋보이는 만화적인 모습이다.
경사면을 따라 11개 층위를 이루며 지어진 건물에는 골동품과 공예품 가게, 음식점 등이 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충칭은 팔팔 끓는 육수에 온갖 채소와 고기를 데쳐 먹는 샤부샤부 요리의 발상지라 자부한다. 태극 문양 냄비에 빨갛고 뽀얀 육수를 분리해 끓이는 훠궈요리가 대표적인데, 양쯔강과 자링강이 합류하는 모양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허드레 고기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서민 음식이었지만 이제 중국을 대표하는 요리로 자리 잡았다.
두 강줄기가 만나는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충칭의 중심이었다. 남송시대에 원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성벽을 쌓았고 명나라 때는 모두 12개의 성문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고풍스러운 옛 성은 이제 없지만 홍야동 일대는 밤마다 불야성이다. 어둠이 내리면 주변은 차와 사람으로 넘친다. 곳곳에 배치된 경찰이 차량과 인파의 흐름을 조절한다. 차도만큼 넓은 인도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휴대전화 앱을 켜고 인터넷 생방송을 하는 왕홍까지 가세해 명절 시장처럼 붐빈다. 그윽하게 야경을 감상하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기꺼이 축제의 현장에 뛰어들 준비가 돼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강 건너편은 충칭의 금융지구다. 하늘 높이 솟은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여러 건물이 하나의 구조물인 것처럼 외관 조명이 시시각각 변하며 현란한 쇼를 펼친다. 불을 밝힌 유람선이 끊임없이 자링강을 오르내리고,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도 조명이 은은하다. 매일 밤 일상으로 펼쳐지는 충칭의 빛 축제다.
전철 2호선 리즈바역(李子壩站)도 왕홍의 단골 방문지다. 전체 19층 건물 중 6~8층이 전철역인 독특한 구조다. 1~5층은 상가, 전철역 위층은 주거용이다. 바깥에서 보면 강 언덕을 달리던 전동차가 장난감처럼 건물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자 역 아래 인도를 확장해 전망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전철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손가락으로 잡는 시늉을 하거나 입을 크게 벌려 전동차를 삼키는 듯한 자세로 인증사진을 찍는다.
리즈바역이 현대적 명소라면 탄자석 옛 거리와 자기구고진은 충칭의 오랜 역사가 중첩된 곳이다. 자기구고진(磁器口古鎮·츠치커우)은 도심 서쪽 자링강과 인접한 오래된 마을로 고풍스러운 골목에 상가가 밀집해 있다.
수운을 이용한 물류가 편리한 곳이라 청나라 때부터 도자기 산업이 발달했다. 자링강 중상류의 여러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비롯해 섬유와 도자기, 소금과 설탕, 철물과 종이 등이 거래되는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민국 7년(1918)에는 현지 도자기 상인들이 자금을 모아 '사천 도자기 공장'을 설립하며 다시 한번 도자기 마을로 명성을 떨쳤다. 전성기에는 관련 기업만 70개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의 자기구고진은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상가가 밀집된 거리다. 서울 인사동과 전주한옥마을을 섞어 놓은 것과 비슷하다. 1 ,2층 낮은 기와집이 좁은 골목길을 형성하고 있고, 양쪽으로 고만고만한 가게가 늘어서 있다. 중국 전통 요리보다는 ‘퓨전’ 음료와 간식이 대부분이다. 마당이 있거나 전망이 괜찮은 집은 어김없이 카페다. 감성 여행을 주도하는 2030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이다. 곳곳에 구두수선공과 차 따르는 점원 등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그나마 축적된 역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데, 사진 찍기에 몰두하는 관광객의 눈길을 끌지는 못한다.
탄자석노가(弹子石老街·단즈시)는 근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양쯔강과 자링강이 합류하는 이곳은 100여 년 서구 열강의 조계지였다. 청나라 광서제 17년(1891) 충칭이 개항한 후 1901년 일본과 조계를 맺었고, 외국인이 점차 늘면서 일대는 변화를 맞는다. 프랑스 해군이 진을 치고, 영국인 회사가 설립되는가 하면 그들을 위한 문화 공간과 즐길거리, 음식점도 덩달아 생겨났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자연스럽게 쇠퇴한 거리는 2018년 도시재생사업으로 국가 관광명소로 지정됐다. 이를테면 인천의 개항장, 군산의 근대문화거리처럼 전환기 중국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겉모습만 보면 이곳이 왜 ‘옛 거리(老街)’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표고 80m가 넘는 언덕에 고층 아파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빌딩숲 사이로 난 옛 거리는 지붕 없이 노출된 지그재그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다. 한 층씩 오를 때마다 근대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낮은 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의 밀랍인형을 전시하는 마담투소, 충칭 주재 프랑스 영사관이 된 해군막사, 육교 대신 재건한 청나라 시대 청운교, 일본풍 상가가 고층 빌딩 사이사이에 숨어 있다. 상업으로 성공을 거둔 중국인 저택도 여럿이다. 전망대에서는 두 강줄기가 만나는 조계지 항구가 코앞에 내려다보인다. 지상 85층, 높이 356m, 8개 타워로 구성된 래플스시티를 비롯한 고층 빌딩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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