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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후? 두둑한 은행 잔고 보다 중요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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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초고령화 대책의 핵심 가치, ‘에이징 인 플레이스’
일본 사회에 대해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고령화 사회에 대한 것이다. 일본은 2007년에 초고령화 사회(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가 되었다. 한국도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이 문제를 먼저 겪은 일본의 대응이 궁금한 것도 당연할 듯하다.
일본 사회의 초고령화 대책의 핵심 가치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영어 표현인 ‘Aging in Place’를 그대로 옮겨 일본어로도 ‘エイジング・イン・プレイス’라고 쓴다.)라고 한다. 행복한 노년 생활의 이상적인 상황을 뜻하는 개념으로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한국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듯하다.
에이징 인 플레이스란 자신이 원래 살던 곳에서 친숙한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노화를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의료 시설과 대중 교통 수단이 좋은 도시로 이주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젊어서 모은 돈으로 ‘실버타운’에 입주하겠다는 사람도 보았다.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에게 이상적인 노년이란, 가장 편안한 장소인 자기 집에 계속 살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일 것 같다. 요즘에는 대단히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나 요양 시설, 혹은 실버타운도 있다지만, 서비스가 훌륭하다고 한들 낯선 곳에서 친분이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생활에 만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삶을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 같다. 오죽하면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가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원제는 『在宅ひとり死のススメ』)라는 책을 썼겠는가? 독신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으며, 혼자서 집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주장을 담은 이 책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2025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일본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자를 위한 복지 제도나 의료, 요양 시설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어도, 전 인구의 30%가 고령자를 위한 사회적 보살핌에 의존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에이징 인 플레이스라는 개념은, 고령자가 살기 편한 지역 사회를 만들자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보다는 경제력이나 신체 장애 등 고령자의 개별적인 사정과 무관하게 자립할 수 있는 생활 환경을 구축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둔다. 고령자가 지역 주민과 상부상조하고, 때로는 지역 곳곳에 배치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늙어가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고령화 대책의 방향성은 고령자가 스스로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에 있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은 돈보다 사람”
일본 정부는 2015년에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초고령화에 대비해 지역 사회의 인프라와 공동체를 재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해 왔다. 에이징 인 플레이스라는 개념을 실현한다는 목표 아래, 2025년까지 고령자를 위한 의료, 요양, 주거, 생활지원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지역 포괄 케어 시스템’을 만든다는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고령화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의료 및 돌봄 서비스 영역에서는 인력 부족 현상이 점차로 심각해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취업의 기회를 개방해서 모자라는 인력을 확충하거나 원격 진료, 돌봄 로봇 등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의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고령자가 자립할 수 있는 생활 환경의 구축을 지향하겠다는 방향성에 개인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여전히 과제가 많고, 생각지 못한 과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노인을 오로지 사회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 치부하지 않고, 나름의 역할이 있는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발상이 미래지향적이다. 다만, 에이징 인 플레이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 동거자가 있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거동이 불편해도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거주 공간을 개선한다든가, 필요한 때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역 사회의 의료, 복지 정보를 미리 파악해두는 등 생활 요령도 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노인이 고립되지 않도록 스스로 지역 사회의 다양한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노인이 다양한 연령, 문화, 직업의 지역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속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서포터’들을 만나고, 어떨 때에는 스스로 누군가의 ‘서포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바쇼(居場所)’라는 일본어 단어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뜻이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직역하면 ‘있는 장소, 거처’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이 말이 물리적인 장소보다는 단체나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개인이 집단이나 사회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가질 때에, ‘이바쇼’를 찾았다고 말한다. 고령자가 소외되거나 고립되지 않는 지역 사회를 만드는 것이 에이징 인 플레이스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데, 다시 말하자면 고령자가 자기 집 이외에 안정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이바쇼’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부분은 정부의 정책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인의 노력만으로도 극복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만큼, 일본 시민 사회가 적극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지역 주민들의 폭넓은 네트워킹을 돕는 ‘이바쇼 서밋’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지역이 있다. 그 지역에 산재하는 비영리 조직, 사회 운동 단체, 봉사 모임, 취미 동호회, 혹은 그런 모임을 구상 중인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고 홍보하는, 일종의 네트워킹 ‘박람회’다. 은퇴자나 홀로 사는 노인이 이를 통해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할 기회를 찾기도 한다. 결국 고령자가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고급 의료 시설이나 복지 서비스보다 지역 주민과의 우호적인 관계와 상부상조의 네트워크라는 것. 이것이 일본 사회가 20년 가까이 초고령화 사회를 경험하면서 찾아낸 해법이다.
◇노후가 걱정된다면 ‘사람 농사’에 힘을 쏟길
한국에서는 노후대책이라면 경제적인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돈이 있어야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고, 아프면 병원에 가기 위해 택시라도 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행복한 노후를 돈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래전부터 초고령화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가 시사하듯, 나이가 들수록 물질로 인한 행복감은 줄어드는 반면, 고독과 외로움은 커진다. 문득 나의 노후가 걱정된다면, 잠시 하는 일을 멈추고 나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둘러볼 것을 권하고 싶다. 가족과의 관계는 돈독한지,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지, 취미를 공유할 지인이 있는지…. 만약 은행 잔고는 두둑하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더 많은 돈을 벌 궁리는 여기에서 멈추고, 지금까지 소홀히 했던 ‘사람 농사’에 힘을 쏟으라. 그대의 행복한 노후를 위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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