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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처럼 괴롭힌 시부모에 오히려 죄책감 갖는 내가 이상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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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스스로 ‘착한 아이 강박’에 빠져 있다고 느낍니다. 평생 최고 등급 모범생이었어요. 부모님부터 선생님, 회사 상사까지, 어른의 말이라면 최대한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고 여기며 4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책임감이 너무 강해 일이 잘못될 경우 스스로를 탓하면서 심하게 자책하기도 합니다.
3자매 중에 장녀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공부도 썩 잘했습니다. 부모님의 기대가 컸어요. 특히 저와 동생들을 키우느라 좋은 직업을 포기하신 어머니가 “내가 못다 펼친 꿈을 네가 활짝 펼쳐라. 있는 힘껏 지원해 주겠다”며 헌신하셨습니다. 교육비 투자도 아끼지 않으셨어요. 그런 두 분의 기대와 희생에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마음이 헤아려져 눈물을 흘리고는 합니다. 제 마음속엔 어머니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했을 때도 이런 일을 겪는 자신이 미웠고, 또 속상해하실 어머니에게 죄송하기만 했습니다.
장녀로서 부모님께 빚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 사회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뤘습니다. 이른바 좋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 자격증 있는 전문직 종사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같은 직종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뤘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도 효도라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네요.
시가는 친정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합니다. 그것 때문인지 시부모님이 저와 친정을 은근히 무시하십니다. 결혼 초부터 저를 가부장제의 전형적 며느리의 틀에 맞추려 하셨어요. 시부모님의 탄압으로 건강이 상할 정도였고, 친구들은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시가 같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특히 시부모님은 제 면전에서 부모님을 여러 차례 모욕하기도 하셨습니다. 모종의 사건으로 결혼 직후 양가 부모님이 교류를 끊어 부모님은 저와 시부모님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세요. 그래도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결혼으로 독립한 뒤 완벽한 행복을 일구지 못한 점이 죄송스럽고, 부모님을 욕보인 것도 죄송스럽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어 부모님을 안심시키지 못한 점도 죄송스럽습니다.
남편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남편은 시부모님께 직접 항의하진 않았지만, 저를 이해하고 보호해 줍니다. 저는 10여 년째 시가에 최소한의 도리만 하고 있어요. 시가만 빼면 가족과 친정은 모두 화목합니다. 이대로 행복을 찾으면 좋으련만, 잘되지 않습니다. “시부모님이라는 중요한 어른들이 흡족해하는 며느리가 되지 못한 건 결국 내 잘못 아닐까” “내가 더 잘해서 가족 전체의 관계를 원만하게 끌고 가야 부모님이 더 좋아하지 않으실까” 같은 생각을 떨치지 못하겠어요.
시부모님이 밉지만, 제가 거리를 두는 것 때문에 섭섭해하시는 걸 보면 죄책감이 들기도 해요. 남편이 제 앞에서 서운함을 감추려고 애쓰는 것도 느껴지고요. 그래서 “눈 딱 감고 그냥 내가 잘하자”고 잠시 다짐하다가도 “엄마가 나를 그렇게 굴욕적인 사람이 되라고 키운 게 아니잖아”라는 마음이 들어서 마음이 차갑게 식고는 합니다. 솔직히 과거를 잊고 시부모님께 정말 잘할 자신도 없어요.
이런 감정들 사이를 무수히 오가지만, 가족에게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어요. 제 감정 토로로 남편이나 제 부모님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게 두려워서요. 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유혜영(가명·45·직장인)
혜영씨. 사연을 읽으면서 부모님, 특히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는 부채의식이 얼마나 큰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아닌 어머니에게 맞춰진 듯 보입니다. 이 때문에 시부모님과의 원만치 않은 관계를 두고서도 본인의 행복 자체보다는 부모님에게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다는 점이 더 큰 스트레스 요소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혜영씨는 또 성인이 되어 결혼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헤아리며 동일시하고 있죠. 시부모님에게 거리를 뒀다는 사실로 인해 드는 죄책감 역시도 부모님을 향한 당신의 죄책감과 이어져있을 수 있습니다.
느끼고 계신 것처럼 혜영씨는 어려서부터 모범적으로 열심히 살아오신 분입니다. 동생들을 둔 장녀로서, 또 엄마의 기대를 받는 착한 아이로서 결코 가볍지 않은 ‘책임감’을 짊어진 당신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모든 일을 헤쳐 나가곤 했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상대에게 의지하고 또 떼도 쓰면서 자라야 합니다. 일종의 강박성 성격은 이처럼 성장 과정에서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의존 욕구로 인해 형성된 경우가 적지 않은 까닭입니다.
자연스레 자신에 대한 기준이나 잣대도 높아졌을 겁니다. 이런 높은 기준에 맞춰 제대로 무언가를 수행하지 못하고, 또 완벽하지 않아서 처벌받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셨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왔고, 성과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자존감 상승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습니다. 내부의 동기에 의한 성취가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하거나 만족시키려는 노력이었기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강박적 성격은 같은 이유로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이답게 굴었다가 어머니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범적인 행동만 하는 것처럼요. 감정의 억압은 가족뿐 아니라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힘들었던 학창 시절의 교우 관계는 물론이고, 시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부부관계, 또 친정 가족들과의 관계도 사실은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자신보다 어머니를 위한 삶을 살았던 혜영씨에게는 무엇보다 어머니와 관련된 구체적인 감정의 인식이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는 자연스레 원망이나 미움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혜영씨가 쓰신 사연에서는 오직 어머니를 향한 죄책감만이 느껴집니다. 과거 왕따 경험을 놓고서도 얼마든지 ‘어머니가 제대로 위로해 주지 못했다’거나 ‘어머니의 기대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복잡한 감정을 단순히 ‘내 탓’으로 모는 식으로 금방 해결해 버리곤 했습니다.
이런 죄책감은 혜영씨의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그다지 살피지 않는 것이 이미 굳어진 상황에서는 당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을 인식해 보셔야 합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어머니와 관련된 어떤 순간에 혜영씨가 슬픔이나 동정, 안타까움 등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와 어머니가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어머니 이외의 타인과도 혜영씨를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연습을 권해 드립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잘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해야지 이런 경계 짓기는 가능해집니다. 취미, 운동, 명상, 휴식 등 무엇이든 혜영씨 본인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 자신에게 집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성취를 계속 탐색해보세요. 우선순위가 본인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무언가를 혜영씨 위주로 해보았을 때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 시부모님, 남편과 아이 등이 어떻게 볼지 두려움이 생길 겁니다. ‘나를 이기적이라고 여기거나 비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자신도 모르게 또 본인이 아닌 타인에게 시선이 가고 남을 우선순위로 두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지금 또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구나”라고 다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혜영씨는 살아오면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경험이 없었기에 이런 연습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간 알게 모르게 당신의 안에 쌓인 해묵은 감정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을 일종의 폭발이나 분출로 이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지금까지 억눌려 쌓인 모든 것을 터뜨릴 것 같고, 그랬다가는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라 두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두렵더라도 표현을 조금씩이라도 해보셔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 자체는 결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억압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실 뿐입니다. 자꾸 표현하고 또 내비쳐야 주변의 소중한 이들과 진정한 의미의 정서적 지지 관계를 맺는 일이 가능해지고 또 그때야 비로소 내면의 평안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혜영씨 자신입니다. 자신을 먼저 돌보는 혜영씨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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