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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물도 나도 절로"... 발아래 섬진강에 봄이 흐른다

입력
2024.03.06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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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용궐산 하늘길과 채계산 출렁다리

가파른 암벽에 설치한 덱 산책로 순창 '용궐산 하늘길'에 오르면 섬진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가파른 암벽에 설치한 덱 산책로 순창 '용궐산 하늘길'에 오르면 섬진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매화든 벚꽃이든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오르는 게 꽃 차례의 순리지만, 몸으로 느끼는 봄은 꼭 그렇지도 않다. 산골짜기 얼음장 밑에도, 눈 녹은 물에도 봄이 흐른다. 섬진강 하구에 매화꽃이 만발한 시기, 상류 전북 순창의 섬진강에도 물소리가 요란하다. 주변 산자락은 아직 겨울 색인데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골짜기를 굽이굽이 흐르는 푸른 물줄기에 완연한 봄기운이 감지된다.

봄날 꿈결 같은 섬진강, 장군목 유원지 주변

순창 섬진강 여행은 장군목에서 시작된다. ‘장군목’은 인근 용궐산(645m)과 남쪽 무량산의 형상이 큰 장군이 자리를 잡고 앉은 모양이고 이곳이 그 목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붙인 명칭이다. 전통악기인 장구의 잘록한 허리 부분에 비유해 ‘장구목’으로도 부른다.

진안 데미섬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임실 순창 곡성 구례를 거치며 차츰 넓어져 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을 경계 지으며 남해로 흘러든다. 순창은 섬진강 최상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폭도 좁고 하류처럼 넓은 모래사장도 없다.

장군목 일대에는 오랜 세월 깎이고 닳은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다.

장군목 일대에는 오랜 세월 깎이고 닳은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다.


장군목의 상징 요강바위. 현재는 수량이 많아 먼발치에서 볼 수 있다.

장군목의 상징 요강바위. 현재는 수량이 많아 먼발치에서 볼 수 있다.


장군목 주변 강바닥에는 밀가루 반죽이 굳은 듯 하얗고 특이한 모양의 바위 군상이 약 3㎞ 구간에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절구통처럼 속이 매끈하게 깎이고 파인 ‘요강바위’는 장군목의 상징이다. 높이 2m, 폭 3m, 무게가 15톤이나 되는 바위로, 한국전쟁 때 빨치산 토벌대에 쫓기던 마을 주민이 이 구멍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93년에는 인근 마을로 이주해 온 사람이 그 독특한 모양새가 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크레인을 동원해 반출했다가 주민들의 노력으로 1년 6개월 만에 되찾아오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다행히 강 한가운데 원래 자리를 되찾은 요강바위는 물이 많지 않을 때에 바로 앞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수량이 많아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다. 바로 위 자전거도로 교량 위에 서면 요강바위와 주변을 흐르는 강물 소리가 맑고 청량하다.

장군목 주변 섬진강에서 한 주민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장군목 주변 섬진강에서 한 주민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섬진강 상류의 봄은 청량한 물소리로 시작된다. 장군목 주변에 맑고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다.

섬진강 상류의 봄은 청량한 물소리로 시작된다. 장군목 주변에 맑고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다.

상류 임실의 천담마을, 구담마을과 함께 장군목 유원지 일대는 섬진강의 옛 모습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아름다운 시절(1998년)’을 촬영하기도 했다. 봄날이면 영화 제목처럼 꿈결같이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곳이다.


인공 산책로 ‘하늘길’이 왜 필요할까 싶은데…

장군목 바로 아래 용궐산은 산 중턱에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수직 암벽을 이루고 있는 산이다. 워낙 크고 가팔라 감히 오를 엄두가 나지 않는데, 2020년 지그재그로 1,010m 길이의 덱 탐방로를 조성하여 이제는 수월하게 오를 수 있게 됐다. 발아래로 아스라이 섬진강 물줄기가 휘돌아 아찔함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이름하여 ‘용궐산 하늘길’이다.

용궐산은 원래 용골산(龍骨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용처럼 골격이 우람한 산이라 해석할 법도 한데, 한편으로 ‘용의 뼈다귀’에서 죽음이 연상된다. 결국 2009년 주민들의 요구로 산 이름은 ‘용이 사는 대궐’이라는 의미의 용궐산(龍闕山)으로 바뀌었다. 용의 기운처럼 생동감 넘치는 산이기를 바라는 뜻은 하늘길 개통으로 관광객이 몰리며 현실화했다.

용궐산 하늘길은 산 중턱 가파른 암벽에 지그재그로 연결돼 있다.

용궐산 하늘길은 산 중턱 가파른 암벽에 지그재그로 연결돼 있다.


용궐산 자연휴양림에 매화 몇 그루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용궐산 자연휴양림에 매화 몇 그루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용궐산 하늘길 끝의 비룡정. 대부분 산 정상까지 가지 않고 이곳에서 하산한다.

용궐산 하늘길 끝의 비룡정. 대부분 산 정상까지 가지 않고 이곳에서 하산한다.

하늘길 산행은 섬진강과 맞닿은 용궐산 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된다. 정상까지는 약 3km, 왕복 4시간가량 소요되지만, 대개는 하늘길이 끝나는 암벽 위 비룡정을 목적지로 잡는다. 왕복 3.2km, 일반적으로 2시간이 걸리고, 3시간을 잡으면 느긋하게 산과 강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입장료(4,000원)의 절반은 순창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거리에 비해 산행은 만만치 않다. 매표소를 지나면 곧장 험한 바위가 깔린 계단이 이어진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고 바닥이 가지런하지 못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가파른 경사에 삭막한 바위 지대임에도 탐방로 주변에 나무가 울창해 여름에는 그늘이 넉넉할 것으로 보인다. 바위 지대가 끝나고 아래서 보던 커다란 암벽과 마주하는 지점부터 덱 탐방로가 설치돼 있다. 한쪽 끝에서 계단을 올라 한동안 평평한 길을 걷다가 맞은편 끝에서 다시 계단을 오르는 식으로, 산허리 암벽에 걸린 4단 구조의 덱 탐방로다.

사실 용궐산 자체는 경관이 빼어나다고 하기 힘들다. 큰돈을 들여 이런 시설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걸으면 걸을수록 진가가 드러난다. 중간중간 설치된 쉼터 겸 전망대에서 한숨 돌릴 때마다 섬진강 물줄기와 산줄기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물이 아니면 강이 아름다울 수 없고 강이 아니면 산이 빼어날 수 없다. 용궐산 하늘길 풍광은 강과 산이 한데 어울림으로 완성된다. 섬진강 덕분에 비로소 생명을 얻고 살아 꿈틀거리는 산이다.

용궐산 하늘길 초입은 투박한 바위 지형이다.

용궐산 하늘길 초입은 투박한 바위 지형이다.


용궐산 하늘길 탐방로에서 섬진강 물줄기와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섬진강 덕분에 존재감이 돋보이는 산이다.

용궐산 하늘길 탐방로에서 섬진강 물줄기와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섬진강 덕분에 존재감이 돋보이는 산이다.


용궐산은 섬진강과 더불어 빛이 나는 산이다. 하늘길 탐방로 아래로 섬진강과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용궐산은 섬진강과 더불어 빛이 나는 산이다. 하늘길 탐방로 아래로 섬진강과 주변 산세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용궐산 하늘길 잔도를 오를수록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 풍광도 점점 넓어진다.

용궐산 하늘길 잔도를 오를수록 섬진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 풍광도 점점 넓어진다.


멀쩡한 암벽에 인공 잔도를 설치했으니 자연훼손 아니냐는 비판은 순창군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애초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부족한 이야깃거리를 보태느라 무리수를 둔 것도 눈에 거슬린다. 하늘길을 걷다 보면 암벽 곳곳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 추사 김정희 작품이라는 ‘계산무진(溪山無盡·계곡과 산이 끝이 없다)’, 한석봉의 글에서 집자한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안중근 의사의 ‘제일강산(第一江山)’, 출처도 없이 선인들의 글에서 땄다는 ‘용비봉무(龍飛鳳舞·용이 날고 봉황이 춤춘다)’ 등이 있는데 지역과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순창과 인연이 있는 신경준과 김인후의 어록은 바위를 훼손하지 않고 안내판만 세워 오히려 다행이다. 순창이 고향인 신경준(1712~1781)은 영조 때 실학자로 동국여지도를 완성해 조선 팔도의 산천 도리를 밝혔고,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해 한글의 과학적 연구에 공헌했다. 하늘길 안내판에는 그의 저서 ‘산수고(山水考)’ 서문에서 발췌한 문장이 적혀 있다. ‘하나의 근원에서 만 갈래로 나눠진 것은 산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 하나로 합쳐진 것이 물이다.’ 그가 태어난 순창읍 남산대에 조상이 세운 귀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신숙주의 동생이자 조선 전기의 문신 신말주가 부인 설씨의 병 치료를 위해 귀향한 후 지은 정자다.

용궐산 하늘길 암벽에 추사 김정희의 글 ‘계산무진(溪山無盡)'이 새겨져 있다.

용궐산 하늘길 암벽에 추사 김정희의 글 ‘계산무진(溪山無盡)'이 새겨져 있다.


용궐산 하늘길 암벽 곳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굳이 필요할까 싶어 눈에 거슬린다.

용궐산 하늘길 암벽 곳곳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굳이 필요할까 싶어 눈에 거슬린다.


용궐산 하늘길 아래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너머로 높고 낮은 산줄기가 물결친다.

용궐산 하늘길 아래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너머로 높고 낮은 산줄기가 물결친다.


어머니와 처의 고향이 순창인 조선 중기 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지은 자연가(自然歌)의 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산도 절로, 물도 절로, 산수간 나도 절로.’ 자연을 대하는 대학자의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문구로, 보지 않고도 이곳의 감회를 제대로 읊은 듯하다.


채계산 출렁다리와 향가유원지

용궐산에서 섬진강 하류로 약 11㎞ 내려가면 채계산(342m)이 있다. 회문산, 강천산과 더불어 순창의 3대 명산으로 꼽히는 산으로 화산이나 적성산으로도 불리고, 바위가 책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 책여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적성강(이 구역 섬진강을 이렇게 부른다)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비녀 꽂은 여인이 달을 보며 누운 형상이라 월하미인(月下美人)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외에 고려 말 최영 장군이 화살보다 늦었다고 말의 목을 베고 후회했다는 전설, 원님 부인을 희롱한 금 돼지 설화 등의 이야기를 간직한 것을 보면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예사롭지 않게 여기는 산이다.

순창에서 남원으로 통하는 국도 위 최고 높이 90m에 설치된 채계산 출렁다리.

순창에서 남원으로 통하는 국도 위 최고 높이 90m에 설치된 채계산 출렁다리.


채계산 출렁다리는 순창 적성면과 동계면으로 분리된 산줄기를 이었다.

채계산 출렁다리는 순창 적성면과 동계면으로 분리된 산줄기를 이었다.


270m 채계산 출렁다리는 중간에 지지대가 없어 아래로 크게 휘었다가 다시 오르는 모양새다.

270m 채계산 출렁다리는 중간에 지지대가 없어 아래로 크게 휘었다가 다시 오르는 모양새다.

산은 순창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적성면 채계산과 동계면 채계산으로 구분되는데, 2020년 둘을 하나로 잇는 출렁다리가 개설됐다. 최고 90m 높이에 매달린 길이 270m 현수교는 아래서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출렁다리를 직접 걸으려면 제법 발품을 팔아야 한다. 주차장에서 다리 입구까지는 약 500개 계단으로 이어진다. 거리는 짧지만 쉬지 않고 오르기엔 숨이 차오른다. 지지대 없이 허공에 매달린 출렁다리는 중간이 아래로 내려앉았다가 맞은편으로 이어진다. 이름처럼 흔들림이 제법 심해 짜릿함이 온몸에 전해지는데, 서편으로 한층 넓어진 섬진강 줄기가 마을과 들판 사이로 평화롭게 흐르고 있다. 채계산 출렁다리는 별도 입장료가 없다.

채계산에서 다시 찻길로 16㎞ 떨어진 향가유원지는 순창 섬진강의 끝자락이다. 향가리는 산세와 물빛이 향기롭고 아름다워 예부터 시인 묵객과 지역 한량들이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라 한다. 그 옛날의 넓은 백사장이며 기암과 어우러진 노송의 흔적은 희미해졌지만, 조용한 강 마을 풍경은 지금도 여전하다.

향가터널은 일제강점기 철로를 건설하려다 완공하지 못한 터널이다.

향가터널은 일제강점기 철로를 건설하려다 완공하지 못한 터널이다.


향가터널과 이어지는 교량도 교각만 남았다가 근래 자전거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향가터널과 이어지는 교량도 교각만 남았다가 근래 자전거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전북 순창 섬진강 주변 여행지도. 그래픽=김문중 선임기자

전북 순창 섬진강 주변 여행지도. 그래픽=김문중 선임기자


일제강점기 잔재인 터널과 다리가 여행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384m 향가터널은 광주와 남원을 잇는 철로를 가설하기 위해 뚫었지만 광복과 함께 공사가 중단돼 미완의 상태로 남았다. 터널 안에 굴착 당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주민들 모습을 비롯해 여러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이어지는 다리도 10개 교각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2013년 상판 공사를 마무리해 자전거도로 활용되고 있다. 이따금씩 자전거가 지나는 다리와 주변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순창=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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