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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역의 네비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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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학은 현대 특수부대의 기원을 2차대전 영국 코만도 부대(British Commandos)에 둔다. 코만도는 1940년 5월 됭케르크 철수로 대륙에서 퇴각한 윈스턴 처칠이 침투 게릴라전을 위해 한 달 뒤인 6월 창설한 소규모 엘리트 부대. 코만도와 레지스탕스의 활약 덕에 유럽은 아예 절망으로 질식하지 않을 수 있었고, 대반격의 교두보 즉 북아프리카 ‘횃불작전(42년 11월)’과 노르망디 상륙작전(44년 6월)에 나설 수 있었다. 코만도는 미 해군 ‘네이비실(62년)’과 육군 델타포스(77년) 등 전후 창설된 세계의 모든 특수부대의 모델이 됐다.
영국군 제8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군단에 맞선 북아프리카 전역(戰域)에는 육군 ‘공수특전단(SAS, Special Air Service)’이 있었다. 41년 7월 창설돼 45년 8월 해산된 그들을 전쟁사는 48년 재출범한 특수전사령부 소속 현 SAS와 구분해 ‘원조 SAS’ 또는 줄여서 ‘디 오리지널스(The Originals)’라 부른다. 하지만, 부대 이름과 달리 원조들의 찬란한 전공은 낙하산 강하 침투가 아닌 육상 침투로 이뤄졌다. 그 배경에는 사하라-리비아 사막이라는 전역의 특수성과 SAS보다 앞서 1940년 7월 창설된 장거리사막정찰부대 즉 ‘LRDG(Long Range desert Group)’의 활약이 있었다.
유럽 남부와 지중해 제해권, 중동 자원을 두고 각축한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투를 흔히 ‘사막 전투’라 부르는 건 실제 전투가 사막에서 벌어져서라기보다 이집트와 튀니지 모로코 리비아의 주요 도시와 기지, 지중해 거점 항구를 공략하려면 사막을 가로질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막 모래바람과 극한의 일교차, 광활하고 변화무쌍한 지형과 먼저 싸워야 했다. 마을도 도로도 특징적 지형-지물도 거의 없어 무용지물이나 다를 바 없던 전술 지도와 나침반만 믿고 툭하면 고장나는 낡은 군 트럭으로 수백㎞ 너머의 타격 지점까지 길을 잃지 않고 이동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게 1957년이었으니 현대전 필수 장비인 GPS는 상상도 못할 때였고, 미 해군의 인류 최초 위성항법체계(일명 Transit)도 1960년에야 시험가동에 성공했다. 주 전선의 먼 배후 즉 동서 1,100㎞, 남북 1,000㎞에 이르는 리비아 사막은 양측 모두에게 불락의 성채이자 천혜의 해자였다. 당연히 감시와 방비도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32년 그 사막을 횡단한 뒤 ‘리비아 사막: 죽음의 세계로의 여행(1935)’이란 책까지 낸 영국 공병대 소령 랠프 배그놀드(Ralph A. Bagnold, 1896~1990)는 39년부터 사막 정찰-기습부대 창설을 사령부에 건의했다. 사막을 관통해 적의 등뒤를 치자는 그의 계획은, 너무 무모해서 번번이 묵살되다가 롬멜 전차군단이 이집트 국경까지 들이닥친 41년 6월에야 승인됐다. 300명 남짓의 자원병으로 구성된 LRDG는 주야간 사막 길 찾기 교육 등을 받고 9월부터 정찰과 정보 수집 활동에 투입됐다. 만 스무 살의 대전차병 마이크 새들러 병장이 자원한 게 그 무렵이었다. 그는 “별빛으로 길을 찾으며 칠흑의 사막을 누빈다”는 말에 매료됐다고 훗날 말했다.
그는 발군의 방향 감각과 담력을 갖춘 LRDG 원년 요원으로서, 또 42년 6월 아예 SAS로 차출돼 특전단의 네비게이터(길 안내역)로서 주요 작전에서 “총 한 발 쏘지 않고” 맹활약해 군십자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고, 전쟁영화의 주인공 같은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역 코만도들의 영웅이자 LRDG와 원년 SAS의 마지막 생존자 마이크 새들러가 별세했다. 향년 103세.
41년 11월 SAS의 첫 작전(Operation Squatter)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원 65명이 리비아의 추축군 비행장 인근 사막에 낙하산으로 강하했지만 적 방공포에 수송기 한 대가 격추돼 병사 15명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나머지도 사막 폭풍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낙하산을 못 풀어 모래 위를 끌려다니다 숨진 병사도 있었다. 대원들은 비행장에 총 한 발도 못 쏴보고 22명만 살아 귀환했다.
SAS 창설 주역이자 원년 지휘관이던 데이비드 스털링(David Stirling, 당시 중위)은 공중 침투 대신 차량을 활용한 야간 사막 침투로 작전을 변경, LRDG에 도움을 청했다. 그때 나선 게 LRDG의 '에이스' 새들러였다. 그는 잘로(Jalo) 오아시스에서 리비아 해안 ‘타멧(Tamet)’ 비행장까지 약 650㎞의 길 없는 사막을 2박3일 동안 가로질러 SAS 대원들을 정확하게 인도했다. 심야에 비행장에 잠입한 대원들은 시한폭탄으로 적 전투기 24대와 파일럿 막사, 탄약고, 연료 저장고 등을 파괴했고 전원 무사히 복귀했다. 해체설까지 돌던 SAS는 저 작전으로 비로소 진가를 인정받았고, 롬멜은 비행장 외곽 경비를 강화하고 전투기마다 24시간 경비병을 두도록 했다.
42년 7월 SAS는 적 거점 공군기지였던 리비아 ‘시디 하네이시(Sidi Haneish)’ 기지에 대한 더 대담한 작전에 나섰다. 갓 보급된 미국산 지프 ‘윌리스 밴텀스(Wilys Bantams)’의 기동력으로 아예 적 기지를 돌파해 유린한다는 전면적인 ‘치고 빠지기’ 전술. 저 작전에 앞서 SAS로 전출된 새들러는 전조등 없는 18대 지프 행렬을 이끌고 385㎞ 밤의 사막을 건넜다. 지프들은 공항 정문을 돌파해 활주로를 휘저으며 지프에 장착된 각 두 정의 비커스(Vickers) 기관총으로 약 10분 간 기지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나치 전투기만 37대를 파괴한 그 작전에서 SAS 전사자는 단 1명. 부상자 수습 임무를 맡아 기지 외곽에 대기해 있던 새들러는 아군이 철수한 뒤 맨 마지막에, 전사자와 함께(일부 기록에는 매장하고) 나치 추격부대를 뚫고 작전지역을 빠져나왔다. 새들러는 두 작전으로 각각 훈장을 탔다.
마이크 새들러(Willis Michael Sadler, 1920.2.22~ 2024.1.4)는 합성플라스틱 원료 공장 관리자였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2남 중 장남으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햄프셔 피터스필드의 비데일스 스쿨(Bedales School)에서 초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몬테소리 교육철학에 따라 개성과 창의, 자율을 중시하는 학교였다. 그는 초-중학교 시절(prep school)부터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급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초원과 사막, 맹수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한다. 37년 중등과정을 마치자마자 그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의 한 담배농장에 일자리를 얻어 떠났다. 2년 뒤 전쟁이 터지자 곧장 로디지아 연대에 입대했고, 인도 북서부 국경 곡사포부대를 거쳐 대전차병으로 아프리카로 파병됐다. 훗날 그는 역사학자 개빈 모티머(Gavin Motimer)에게 “군사주의의 극단적인 면들, 예컨대 명령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위로 아래로 행군하는 건 내게 전혀 흥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41년 하사 계급을 단 분대장이던 그는 군화를 벗지 말고 침낭에 들라는 지휘관 명령을 무시하고 분대원들에게 간편화를 신게 했다. 그는 군화 차림으로는 위급 상황에서 침낭에서 빠져나오는 게 더 어렵다고 항변했지만, 그 일로 그는 병장으로 강등됐다. 카이로의 한 술집에서 LRDG 대원들을 만나 자원한 게 그 무렵이었다.
그는 이집트 쿠프라(Kufra)의 LRDG 본부에서 약 2주 간 나침반과 경위의 사용법, 태양빛과 별빛으로 방위와 거리를 관측하는 법을 익혀 곧장 작전에 투입됐다. 야간 사막 정찰 임무는, 낭만적인 상상과 달리 자신과 부대 전체의 운명을 건 두렵고도 위험한 모험이었다.
SAS 역사 논픽션 ‘SAS: 거친 영웅들(Rogue Heroes, 2016)’의 저자 벤 매킨타이어(Ben Macintyre)는 “사막에서의 길 찾기는 선박의 항해처럼 정확한 수학과 관측이 관건이지만 (항해와 달리) 예술적 감각과 직관, 본능에 크게 의존해야 한다. 고르지 않은 사막 지면 탓에 태양나침반 그림자는 왜곡되기 일쑤였고 늘 감각과 직관으로 보정해야 했다. 새들러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거의 정확하게 파악하는 기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책에 썼다.
내비게이터는 이동해온 방위와 거리, 속도를 꼼꼼히 기록(기억)해 그걸 토대로 자신의 위치(기준점)와 목적지까지의 거리 및 방위를 탐색해야 한다. 그게 ‘추측항법’이다. 군 차량 장비들의 자성 때문에 자기나침반 대신 태양나침반으로, 즉 수직 바늘의 그림자로 방위를 측정해야 한다. 관측 조건이 양호할 때는 태양과 별의 고도를 관측해 경도와 위도를 확인하는 휴대용 경위의(deodolite)를 쓸 수 있지만, 그 역시 오차 보정은 전적으로 감각의 영역. 1/100도라도 벗어나면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잃게 되고, 최소한의 물과 비상식량만 휴대하는 기습전 병사들에게 낙오는 곧 죽음이다. 훗날 새들러는 “흥미가 있으면 뭐든 더 잘 배우게 되지 않는가. 또 내겐 타고난 감각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의심이 마음에 스미지 않게 하는 것이다. 특히 밤에는 잘못 가고 있다는 불안감, 더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길을 찾는 것은 도전이었지만, 나는 그 도전이 좋았다”고 말했다. 적어도 어설픈 장교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군하는 것보다는 좋았을 것이다.
42년 9월 ‘뱅가지(Benghazi) 기습처럼 실패한 작전도 있었다. 43년 1월의 ‘토치 작전(Operation Torch)’, 즉 튀니지 마레스 라인의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영미 제1군과 합류할 수 있는 사막 루트를 열기 위한 작전에서는 적 매복에 걸려 SAS 지휘관 스털링을 비롯한 대원 12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파국적 상황을 맞기도 했다. 새들러는 다른 대원 두 명과 함께 극적으로 피신, 나침반도 지도도 물도 없이 오직 별빛과 그림자로만 길을 찾으며 5일 동안 약 160㎞ 사막을 건너 제1군 기지에 도착했다. 얼굴 화상과 굶주림, 탈수 상태로 구조된 그들은 독일군 첩자 혐의로 심문을 받기도 했다. 당시 현장 취재 중이던 ‘뉴요커’ 종군기자(A.J. Liebling)는 새들러를 인터뷰해 소문으로만 듣던 SAS와 LRDG의 활약상을 미국 시민들에게 상세히 알렸다. 기자는 새들러를 “동그랗고 파란 눈동자에(…) 턱수염과 수척한 얼굴, 살짝 엿보이는 주근깨로 (19세기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을 연상시키는 풍모”라고, 43년 11월 기사에 소개했다.
43년 5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을 평정한 뒤 그는 SAS와 함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본토 침공전에 투입됐고, 노르망디 상륙전을 앞두고는 영국으로 복귀해 상륙부대원 교육을 담당했다. 44년 8월 그는 파리 남쪽 약 100㎞ 지점인 루아레(Loiret)로 강하, 현지 레지스탕스와 사보타지 작전을 벌였고, 지프로 몽따흐쥐-오를레앙(Montargis-Orleans) 도로를 이동하던 중 독일군을 만나 총격전 끝에 적을 제압하고 빠져나오기도 했다. SAS는 45년 10월 공식 해체됐다.
그는 40년대 말 영국 정부의 남극 탐사대에 자원, 본토에서 스토닝턴 섬(Stonington)까지 빙하 횡단 루트를 개척함으로써 연구기지 건설에 기여한 공로로 극지훈장을 받았다.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그 기지는 폐쇄됐지만, 그가 개척한 경로는 지금도 ‘새들러 루트’라 불린다. 그는 소령으로 예편한 뒤 미국 대사관에서 약 2년 근무했고, 영국 비밀정보부 MI6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일했다. 당시 임무와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했지만, “대양 항해, 특히 카리브해 항해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은퇴 후에도 요트 항해를 즐겼고, 항해 가이드북 ‘대서양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47년 군에서 만난 앤 헤더링턴(Anne Hetherington)과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했고, 58년 외교부 동료였던 패트리샤 벤슨(Patricia Benson, 2001년 작고)과 재혼해 딸(Sally) 하나를 두었다.
새들러와 2차대전기 SAS의 활약상을 담은 다수의 책이 출간됐고, BBC는 2022년 매킨타이어의 책을 토대로 동명의 드라마 시리즈를 제작, 지금도 방영 중이다. 그는 “고급 정장보다는 시골풍 트위드 재킷이 더 어울리는” 신사의 풍모에 부드러운 말투와 겸손함으로 MI6에서도 무척 인기 있는 동료였다고 한다. 2018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SAS 출신 예비역 모임인 SAS연대협회는 2017년 잉글랜드 헤리퍼드(Hereford) 본부에 LRDG 공훈탑을 건립했다. 탑에는 “그들은 우리의 길을 인도했다(They Showed Us The Way)”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 무렵 새들러는 이미 노화로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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