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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맘 편히 먹어"...성공한 스티븐 연이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입력
2024.02.02 15:13
수정
2024.02.02 16: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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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사람들'로 미국서 트로피 10개 이상 휩쓴
이성진 감독과 배우 스티븐 연
"이민자로서의 경험, 진실되게 담으려 노력"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만든 이성진(왼쪽) 감독과 주인공 대니를 연기한 스티븐 연이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를 쥐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아카데미 제공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만든 이성진(왼쪽) 감독과 주인공 대니를 연기한 스티븐 연이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를 쥐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아카데미 제공

"(제게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른) 난폭 운전자에 여러모로 감사해요. 그 운전자가 난폭 운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도 없었겠죠. 삶이라는 게 참 희한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 같아요, 하하하."

재미교포 이성진(43) 감독의 말이다. 그는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 로 지난달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 상인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작품상·감독상 등 8개 부문에서 수상한 공을 그를 위협하며 난폭 운전을 한 운전자에게 먼저 돌렸다. 이 감독이 몇 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백인 남성 운전자로부터 당한 피해 경험에서 출발해 이 드라마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이성진(왼쪽) 감독과 스티븐 연이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촬영하며 대화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한국계 미국인인 이성진(왼쪽) 감독과 스티븐 연이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촬영하며 대화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이 감독, 그리고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이민자 대니 역을 맡아 남우주연상을 탄 스티븐 연(한국 이름 연상엽·41)을 2일 화상으로 함께 만났다. 둘은 지난달 골든글로브를 시작으로 북미 비평가들이 주관하는 크리틱스 초이스에 이어 에미상까지 10개가 넘는 트로피를 휩쓸었다. 찾는 곳이 많아진 이들은 요즘 쉴 틈 없이 바쁘다. 에미상 수상 후 달라진 일상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이 감독은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에선 한국말로 "되게 피곤하다"는 말부터 나왔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며 '성난 사람들'을 통해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은 것은 두 사람에게 벅찬 일이다. 스티븐 연은 "이번 수상으로 인종과 국적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깊이 연결돼 있다는 유대감을 느껴 기쁘다"며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내가 처음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를 고민하게 됐다"고 초심을 떠올렸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미국인 대니(스티븐 연)가 한인교회에서 노래하는 모습. 넷플릭스 제공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미국인 대니(스티븐 연)가 한인교회에서 노래하는 모습. 넷플릭스 제공

'성난 사람들'은 이 시대 성난 사람들을 향한 풍자극으로 주목받았다. 집수리 등을 하며 간신히 먹고사는 대니와 부유하지만 위태롭게 사는 중국계 이민자 에이미(앨리 웡)는 난폭 운전이 기회가 돼 서로를 향해 무자비하게 욕을 퍼붓고 가정까지 파탄 낸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주목받은 이유에 대해 이 감독은 "(드라마에서 욕을 퍼부으며 대립한) 두 사람이 서로의 내면에 깃든 어두움을 바라보며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시청자들 마음에 닿지 않았을까 싶다"고 답했다.

고된 일상 탓에 건드리기만 하면 폭탄처럼 터질 것 같은 대니를 연기하며 스티븐 연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그 안에 빠져들어야 해서 힘들었고 연기하면서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받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 위기를 이겨냈다.

이성진(뒷줄 오른쪽) 감독이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 촬영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이성진(뒷줄 오른쪽) 감독이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 촬영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한국에서 태어나 12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 감독은 한국 이민자를 대변하는 코드를 드라마 곳곳에 넣었다. 대니는 동생에게 "김치찌개를 끓여 놓고 (남편을)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고 가부장적인 충고를 하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한인교회를 찾아간다. 이 감독은 "스티븐 연과 전화통화에서 '한인교회 찬양팀에서 뭐 불렀어?'라고 묻고 웃으면서 대화한 내용을 드라마에 반영했다"고 말하며 또다시 웃어 보였다. 드라마에서 대니는 미국 록밴드 인큐버스의 히트곡 '드라이브'(1999)를 부르는데, 실제 이 감독과 스티븐 연이 한인교회에서 찬양팀으로 활동할 때 연주하고 불렀던 곡이다. 스티븐 연은 "이번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이야기였다"며 "이민자로서 직접 겪은 현실을 함께 얘기하며 진실성을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성진(왼쪽) 감독과 스티븐 연이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8관왕을 차지한 뒤 애프터 파티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이성진(왼쪽) 감독과 스티븐 연이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8관왕을 차지한 뒤 애프터 파티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미국 동부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드라마 제작의 꿈을 품고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을 때 이 감독의 통장 잔고는 "마이너스"였다.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에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스티븐 연도 무명 시절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생의 존재'에서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감독과 배우로 우뚝 선 두 사람은 여태 힘들게 버텨 온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괜찮아, 마음 편히 먹어.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해주고 싶어요."(스티븐 연)

"저도요. 제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중심을 잡고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해 준 친구들에게 고마워요."(이 감독)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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