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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개념”의 정치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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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질’이라는 표현이 있다.
주로 게임에서 많이 사용되는데, 협동 플레이를 요하는 상황에서 실책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하고 이간질할 때 ‘정치질’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어떻게 취급되는지 보여주는 쉬운 사례다. 다른 곳에서도 정치는 자주 부정적 뉘앙스로 쓰인다. 이를테면 ‘사내정치’라던가 ‘정치적인 사람’,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할 때 대개는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일을 연상한다. 연예인들은 정치에 관심이 있거나 알은체했을 때 잇따를 구설이 무서워 정치와 거리를 두기 위해 특히 조심한다. 이상한 일이다. 뉴스와 SNS에는 정치 관련 소식이 쏟아지고, 영화관에는 제대로 된 정치의 부재가 만들어낸 비극을 소재로 한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었다는데, 여전히 정치는 혐오스럽거나 금기로 여겨진다. 당장 내년 4월 총선이라는 거대한 정치 이슈를 앞두고 한창 시끌벅적한 지금,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정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정치와 함께 살아간다. 당장 대중교통과 각종 생필품 가격부터 매달 꼬박꼬박 납부하는 세금, 학교 교육과 대학 진학, 회사 정책, 동네 공원까지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없다.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배분을 위해 인간은 늘 정치해왔다.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정치는 당연히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다. 당장 그 시작부터 그랬다. 18세기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여성의 권리가 부재한 문제를 꼬집으며 '여성인권선언문'을 작성한 페미니스트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수 있다면 연단에 설 권리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20세기 초 영국의 서프러제트(Suffragette) 역시 여성의 참정권을 두고 목숨을 바친 투쟁을 이끌었다. 거기에 더해 페미니즘 제2물결의 한 기조를 보여주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만 보더라도 페미니즘 운동과 정치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여성 대통령에 이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부도 경험했으며 여전히 여성가족부도 있으니 이만하면 우리나라에도 페미니즘 정치가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냉정하게 숫자를 통해 살펴보자. 우선 국회의원 중 여성 의원 숫자부터 알아보자. 21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은 지역구 29명, 비례대표 28명으로 비율로 치면 고작 19% 수준이었다. 관련 통계가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평균인 33.8%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고 순위로 따지면 37개국 중 34위다. 각국 여성의 정치참여 정도를 나타낸 국제의원연맹(IPU)의 자료에 따르면 180여 개국 중 우리나라 순위는 120위(올해 1월 기준)다. 지역 정치 상황도 마찬가지다. 1995년 우리나라에 지방선거가 만들어진 이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여성 광역단체장이 선출된 적이 없다. 2022년 민선 8기 지방선거 광역의회는 당선자 전체 872명 중 여성은 173명으로 비율로 따지면 19.8%다. 기초의회 당선자는 전체 2,987명 중 여성 998명으로 33.4%다. 행정부로 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나라 여성 장관 비율은 16.7%로 세계 평균 22.8%에도 미치지 못한다. IPU에 따르면 순위는 공동 111위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서,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 등 45개 기관 190명 핵심 고위공직자 중 여성은 총 14명뿐으로 고작 7.4%에 불과했다. 사법부는 어떨까? 2019년 기준 전체 법관(대법원장 대법관 판사) 2,918명 중 여성은 889명으로 비율로 따지면 30.5%다. 평판사 가운데 여성(40%)이 많아지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답답한 지점은 남아있다. 2023년 발표된 기사에 따르면 법원장 48명 중 여성 법관은 4명으로 비율은 8.3%였다. 고등법원 법관 363명 중 여성은 78명으로 21.5%다. 사법부에서도 유리천장은 여전했다. 그러니까, 분명 여성 인구 비중은 50%에 달할 텐데, 그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근간인 입법·사법·행정부 어디에서도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게으른 반응은 “아직 어쩔 수 없다”거나 “안 뽑혔는데, 인재가 없는데 어떻게 해!”다. 아니, 그것은 게으름을 빌미로 현실의 차별적인 문제들을 방치, 유지하자는 목소리다. 애써 성별 분리 통계를 만들고 발표하는 것이 불편한 현실을 몰라서일까? 그럴 리 없다. 조사를 통해서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고 그 대책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점검하여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함이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이 차별적인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이론과 정책을 시도해 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치 분야의 여성 할당제다. 여성 할당제는 여성의 정치 대표성을 확대하기 위해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제도로 우리나라에도 일부 시행 중이다. 공직선거법 제47조에 따르면 국회, 지방의회 비례대표에서 50%의 여성 할당을 의무화하고 있고 지역구 공천에서는 30% 여성할당제를 권고하고 있다. 현실은 어떨까? 2022년 지방선거를 살펴보면 그나마 비례대표의 경우 광역의원 후보자의 70%, 기초의원 후보자의 90.1%가 여성이었으나 지역구의원 후보에서 여성 비율은 22.9%뿐이었다. 비례대표를 통한 여성 정치 대표성의 개선 시도는 기대할 만하지만 전체에서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구 의원은 권고사항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요식행위로 여겨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은, 더 나은 실천이 필요하다.
한편 이런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조차 탐탁지 않게 보며 일부 여성 정치인의 행보를 트집 잡아 성평등한 변화 시도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고자 하는 경우를 본다. 그럴 때마다 지금까지 패착을 반복하던 남성 정치인들에게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같은 잣대를 들이대며 비판하는지 묻고 싶다. 나아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 정치인의 아쉬운 모습을 비단 개인의 부족함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성 정치인들은 겹겹의 편견과 차별을 딛고 서 있다. 이를테면 우리 무의식중 편견이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능력을 남성보다 낮게 평가한다. 한 연구 사례가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준다. 이 연구원들은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대학원생이 실험실 관리직에 지원한다고 가정하고 가상의 이력서를 작성하게 했다. 이력서의 내용은 동일했으나 한쪽에는 여성형 이름을, 다른 이력서에는 남성형 이름을 써서 제출했다. 이를 살펴본 교수들은 여성 지원자에게 남성 지원자보다 14% 더 적은 임금을 책정했다. 비단 이 연구 참여자들만의 문제일까? 당장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떠올려보자. ‘부드러운 리더십’ 같은 수식어가 따라오며 주변을 잘 돌보는 ‘여성스러운’ 면모로 주변 인정을 받거나, 그 자리를 꿰차기 위해 ‘남성보다 더’ 악독하고 치열하게 냉혈한처럼 성공을 쟁취해 온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다. 어느 쪽이 되었든 ‘여성’이라는 성별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영역에서 정치적으로 주목받은 몇 안 되는 여성들이 어떻게 쓰여왔나를 생각해 보자. 기존 인물들이 망쳐놓은 곳에 실질적인 권력은 이양하지 않은 채 ‘이미지 쇄신’을 위해 자리에 앉혀놓는다. 잘하면 특혜 받은 여성이 되어 ‘역차별’ 사례가 되고 못하면 역시 이래서 여성은 안 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어 유리절벽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단단한 천장과 아슬아슬한 절벽은 선택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못해도 최소 30% 비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정도면 충분해서가 아니다. 스웨덴 정치학자 드루데 달레루프는 ‘임계수치’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30%가 확보되면 그간 소수자를 대표하던 이들이 상징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라는 압박,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장 우리 국회에서 여성이 30%가 넘기 시작한다면, 이른바 ‘사우나 정치’라 불렸던 남성 중심의 짬짜미 정치 힘이 줄어들고 법안 발의에 실질적으로 큰 역할과 힘을 가지고 있는 자리에 더 많은 여성이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성이 정치적 힘을 갖고, 여성 직업 정치인이 늘어나는 게 곧 유토피아의 도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늘어난 자리만큼 부패하고 무능력한 여성들도 지금 남성 정치인들 못지않게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작가 마리 시어의 말처럼 “여성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개념”의 페미니즘조차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 지금 우리 정치 현실에서 이 바람은 아직 유효하다.
다가오는 4월, 봄처럼 정치가 꽃피울 예정이다.
그때쯤이면 이 글이 구식의 철 지난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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