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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증 환자?... ‘후쿠시마 원전’ 영업사원은 왜 여자화장실서 얼어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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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89년 2월 28일 일본 후쿠시마현 다무라군(郡)의 조용한 시골 마을인 미야코지촌이 발칵 뒤집혔다. 이곳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직원 숙소 화장실에서 젊은 남성의 시신이 발견된 탓이다. 20대 여성 교사인 A씨가 퇴근해 여자화장실에 들렀는데, 변기 안에서 낯선 신발 한 짝이 보였고 놀란 마음에 정화조로 가 보니 사람의 다리가 있었다. 당시 일본 화장실은 재래식이었고, 그날 따라 이상하게도 정화조 철제 뚜껑은 열려 있었다.
변사체 신원은 경찰과 소방대원이 출동해 정화조를 부수고 시신에 묻은 오물을 씻어낸 뒤에야 밝혀졌다. 교직원 숙소에서 10분 떨어진 곳에 사는 26세 청년 간노 나오유키였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하청업체 영업사원이었던 간노는 A씨 남자친구의 지인이라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다. A씨 입장에선 의문의 장난전화에 시달리던 자신을 위해 해당 전화 음성을 녹음한 뒤, 경찰에 신고해 줄 정도로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왜 여자화장실 정화조에서 숨진 채 발견된 걸까.
현장은 의문투성이였다. 추운 날씨였지만,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간노의 상반신은 알몸 상태였다. 사망 당일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점퍼와 운동복을 돌돌 말아 배에 움켜쥔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 정화조에 갇힐 당시엔 의식이 있었다는 얘기다. A씨가 발견한 그의 신발은 머리맡에 있었다. 부검의가 밝힌 사인은 저체온증과 흉부순환장애. 키 169.5㎝, 몸무게 69.5㎏인 그가 좁은 정화조(폭 125㎝·높이 107㎝)에서 장시간 다리를 웅크린 탓에 심장으로 향하는 혈류가 막혀 질식했고, 추운 날씨까지 겹치면서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간노는 그해 2월 24일 오전 10시 실종된 상태였다. 아버지에게 잠시 외출하겠다며 집을 나선 게 마지막이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으나, 일본의 제124대 일왕 히로히토의 장례식 거행 때문에 임시공휴일이 됐다. 회사에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부검 결과, 그의 사망 추정 시점은 시신 발견 이틀 전인 2월 26일이었고, 타살 흔적은 없었다. 술에 취하거나 약물 중독 상태도 아니었다.
수개월 수사 끝에 경찰은 “간노가 자발적으로 정화조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해 얼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름이 36㎝에 불과한 정화조 원통형 입구에 들어가려면 본인 의지에 따라 척추와 관절을 움직이면서 몸을 욱여넣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20대 남성의 평균 어깨너비는 40.4cm. 수차례 실험을 거듭한 결과, 타인이 간노를 기절시킨 상태에서 억지로 정화조에 밀어 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정화조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점도 이 같은 수사 결과에 힘을 실었다. 다른 누군가가 간노를 위협해 살해하려 했다면, 그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도록 뚜껑을 닫아야 했을 테니까.
수사는 종결됐지만 의문은 증폭됐다. 사건은 ‘미제 아닌 미제‘로 남았다. 간노가 정화조에 들어간 이유를 경찰이 밝혀내지 못한 게 가장 컸다. 유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사건 현장인 화장실은 A씨 혼자 쓰는 개인 공간으로, 경찰 말마따나 간노가 정화조에 몰래 침입했다면 ‘A씨가 용변 보는 모습을 훔쳐보려는 의도’라고밖에 설명이 안 됐기 때문이다.
사건 당일 간노가 아무리 용변이 급했다 해도, 여자 혼자 쓰는 화장실에 들어간 건 비정상적이다. 용변을 보다가 정화조에 빠진 물건을 꺼내려 했다고 추정하는 것도 무리였다. 정화조에서 발견된 건 그의 옷가지와 신발 한 짝뿐. 대소변이 유발하는 악취와 유독가스를 감수할 정도의 물건은 아니었다. 동네 청년회에서 오락부장을 할 정도로 쾌활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 하루아침에 여성 대소변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추접한 변태 성욕자이자 관음증 환자가 돼 버렸다. 성욕을 충족하려다 사망한 자기색정사(自己色情死)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이 재수사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냈다. 그럴 만한 객관적 이유도 있었다. 우선 간노의 신발 한 짝이 사건 현장에서 1.5㎞ 떨어진 제방에서 발견된 데다, △그의 차량이 사건 현장 인근 농협 정문에 키가 꽂힌 채 주차됐으며 △간노가 생전 A씨에게 “당신을 괴롭힌 장난전화의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말한 사실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간노가 장난전화 용의자에게 쫓기다가 A씨 화장실로 피신하던 중 변을 당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더구나 A씨 역시 임시공휴일인 2월 24일부터 사흘간 고향으로 휴가를 떠나 집을 비운 상태였다. A씨를 몰래 훔쳐볼 의도였다면 애초 날짜 선택부터 잘못됐다는 게 탄원서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결론을 뒤집을 결정적 증거는 아니었다.
사건 발생 넉 달 후인 7월 4일, 아사히신문 계열 주간지인 AERA에 실린 삽화가 주민들 혼란을 부추긴 측면도 있었다. 삽화에선 가로(125㎝)와 세로(107㎝)의 정화조가 정사각형에 가깝게 표현됐고, 간노는 신장 2m가 넘는 거구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신장 170㎝도 안 되는 그가 무릎을 구부린 채 다리를 바짝 올리고, 고개까지 들었는데도 정화조에 온몸이 끼었기 때문이다. 또 삽화대로라면 A씨는 신발이 아니라 그의 머리를 먼저 발견했어야 했다. 현장을 왜곡한 삽화는 사람들에게 간노가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정화조에 갇혔다는 인상을 줬고 타살에 무게를 두도록 했다.
사건을 둘러싼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던 데에는 후쿠시마 원전의 영향도 컸다. 간노의 일터인 후쿠시마 원전은 미야코지촌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 거리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그 의미가 남달랐다. 에도 시대(1603~1868년) 때 마을이 전멸될 정도의 기근을 겪는 등 가난에 시달렸던 이곳 사람들에게 원전은 일자리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마을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였다. 원전이 가동된 1971년 전후, 주민들은 원전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렸다. 마을 촌장 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주요 변수가 됐다.
간노는 원전 찬성파였다. 그해 2월 마을 촌장 선거를 앞두고 그는 같은 찬성파이자 재선을 노리던 와타나베 유이시로 촌장으로부터 “투표일에 찬조 연설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선거 당일 갑자기 마음을 바꿨고, 아흐레 뒤 시신으로 발견됐다. 찬조 연설 거부에 앙심을 품은 촌장이 그의 죽음에 연루됐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지만 물증은 없었다.
이런 의혹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인 와타나베 이츠키가 1996년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바리조곤’을 제작하면서 또다시 조명을 받았다. 원전에 결함이 많은데도 계속 원전 찬성 입장을 취하는 촌장의 행태에 불만을 품은 간노가 부정선거 전말을 알게 되자 촌장에 의해 제거됐다는 게 다큐멘터리의 줄거리다. 그러나 사건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간노가 A씨 화장실 정화조에 들어간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간노가 후쿠시마 원전을 운영하는 도쿄전력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사건 발생 50일 전, 간노 동료의 극단적 선택이 단초가 됐다. 1989년 1월 6일 후쿠시마 2원전에서 재순환 부품 이상으로 사고가 났는데 책임자들이 신년휴가를 가는 바람에 무고한 간노의 동료가 도쿄전력에 소환돼 질책을 받았고, 후쿠시마로 돌아가던 중 우에노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분노한 간노가 그 진상을 파헤치다 도쿄전력의 타깃이 됐다는 것이다.
도쿄전력 배후설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전이 폭발하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원전 현장 감독으로 20여 년간 일했던 히라이 노리오가 1996년 원전 결함을 폭로한 사실이 재조명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 사건은 미야코지촌 주민들에게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간노의 부친은 아들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바로잡겠다며 방송에 수차례 출연했고, 촌장과 그 가족은 살해범으로 몰렸다. 간노의 관음증 대상이었을지 모르는 A씨의 정신적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마을의 뜨거운 감자였던 후쿠시마 원전과 엮이면서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사건을 입에 올리는 걸 극도로 꺼린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겪으면서 몸과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다. 변사 사건 발생 30여 년이 지난 2020년, 한 방송사에서 진상 규명을 위해 이 마을을 찾았으나 주민들은 “그런 사건이 있었느냐”며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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