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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 도둑 막아내는 느리고 긴 클래식 음악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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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정보도 많고 변화도 빠른 시대를 살다 보니 일할 때는 물론 쉴 때도 시간을 아끼려 한다. 궁금했던 소설, 영화 감상도 몇 시간씩 할애하기보다는 줄거리를 요약해 주고 특징과 비화를 포함해 명장면, 인상적 대사까지 정리한 콘텐츠를 찾는다. 그런데 소개 콘텐츠를 보고 소설과 드라마, 영화를 처음부터 시청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용도 알게 된 것 같고 짧은 시간 내 머리를 비워낸 휴식 효과도 봤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내 클래식 음악을 소개해 주는 콘텐츠도 있다. '쇼팽, 5분 만에 알려드림', '이것만 알면 베토벤 정복' 등 작곡가와 유명 작품의 특징을 정리해 준 콘텐츠들은 클래식 음악이 어렵고 지루하다 생각하는 입문자들에게 환영받는다. 그런데 누군가가 짧은 콘텐츠를 보고 쇼팽이 어떤 사람인지, 베토벤이 왜 위대한 작곡가인지 궁금증을 해소했다면서 정작 음악 들을 시간은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뭘 알고 뭘 모르는 것일까.
빠르게 정보를 취한 것만으로 '안다' 생각하는 것의 맹점은 그 기억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제의 도서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 애나 렘키의 '도파민네이션',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 등은 디지털 편이를 통해 시간을 절약해 온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주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짚어 준다. 지금까지는 영리하고 부지런하게 큰 성취를 이루며 산 것 같지만 시간과 노력을 당겨쓰는 바람에 중독과 편향, 불안과 집착, 우울과 불면, 조바심과 산만함, 무관심과 몰이해라는, 생각보다 심각한 청구서를 받게 됐다. 무엇보다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도둑맞거나 스스로 내주면서 우리를 단단하게 지탱해 줄 것들을 잃게 됐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생각과 입장, 태도에 몰입하게 할 때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진다. 다양한 인물을 통해 그들 입장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갈등하는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을 들이는 동안 우리는 인물이 느끼는 슬픔과 설렘, 분노와 사랑의 감정을 같은 속도로 느끼며 울고 웃게 된다. 오페라에는 시대와 역사, 문화적 배경은 물론 인종과 신분이 다른 사람들(혹은 신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휴식을 위해 써도 모자랄 3시간 30분을 음악과 함께 몰입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거나 전율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분명 관심 없던 사람인데 그에 대한 깊은 공감이 이뤄지고, 선입견이 깨졌으며, 불합리하게 흘러가는 사회 현상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접근할 일이 없었던 문제에 강한 끌림을 갖게 된 이것은, 단 1분도 절약하지 않은 절대 시간의 음악이 만들어낸 변화다.
시간을 줄이면 어떻게 될까. 같은 소설이라도 책으로 읽을 때와 화면으로 볼 때, 내용에 대한 기억은 물론 감정의 몰입 상태가 달라진다. 화면으로 보는 소설은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 여러 페이지를 빨리 넘겨볼 수 있다. 빠른 전환이 가능해질 때, 우리의 뇌는 부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문단에 먼저 시선을 가져간다. 같은 내용을 읽는 것 같지만 휘리릭 쉽게 넘겨 버린 페이지는 감정 이입의 순서와 맥락을 꼬이게 만든다. 전막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과 아리아만 떼어 듣는 갈라 콘서트의 스피디한 감상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감정이 움직이는 경험은 무언가에 충분히 공감한 각자의 속도 안에서 이뤄진다. 그 시간을 아까워하는 동안 타인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공감을 미루게 된다. 사회 속에서는 빠른 성취라는 강력한 도파민이 뿌듯한 기분과 자부심에 도취되게 만들지만 개인의 일상에서도 과부하된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산만해진다. 괜히 분주해지고 그것 때문에 다시 헛헛해진 기분은 또 다른 도파민을 찾아 떠돌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상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베토벤 생가에 다녀왔고, 소나타는 눈 감고도 연주할 수 있으며, 명반과 뛰어난 오디오 조합을 갖췄고, 수없이 많은 공연장을 찾아다녔다는 등의 활동에 스스로 속게 될 때가 있다. 음악을 듣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감동이 전환된 경험은 살면서 그리 자주 만나는 일은 아니다. 음악은 유형으로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연주 영상을 촬영하려 애쓰는 등 더욱더 주변 기록에 집착하게 만들지만 이 또한 소설과 영화에 대한 요약 정보만 나누고 있는, 알맹이 없는 분주함이 될 수 있다. 느림은 기억하게 만들고 내 몸에 흔적을 남긴다. 주어진 시간은 무한대가 아니니 나를 위해 시간을 붙잡아 두자. 음악 감상 자체에만 몰입하는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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