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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처럼 흩뿌려진 섬... 지리산 끝자락 바다 위 수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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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로서 경남 하동은 많은 사람에게 지리산과 섬진강으로 기억된다. 영호남 교류의 상징인 화개장터, 드넓은 악양들과 최참판댁(소설 ‘토지’의 배경), 찾아가기도 힘든 깊은 첩첩산중의 청학동 등이 먼저 떠오른다. 산 높고 강 맑은 곳이니 하동이 바다와 접한 해안지역이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섬진강 끝자락 금남, 진교면 앞바다는 크고 작은 섬들이 몰려 있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이다.
그 풍광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 금오산이다. 지리산 줄기가 남쪽으로 내달리다 바다를 코앞에 두고 우뚝 솟은 봉우리로 정상(849m)에 서면 사방으로 시원한 전망이 펼쳐진다. 남쪽 바다에는 육지와 이어질 듯 분리된 수많은 섬이 점점이 떠 있다. 멀게는 동쪽 사천시에서 남해군으로 이어지는 창선대교, 서쪽 광양제철단지와 여수 돌산도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북측으로 눈을 돌리면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능선이 우람하게 이어지고,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섬진강 물줄기까지 그림처럼 펼쳐진다.
정상까지는 예전에 개설한 군사도로로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다. 다만 급경사에 굴곡이 심하고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폭이 좁은 구간도 있어 운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더 쉽게 오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하동 플라이웨이 케이블카(왕복 2만 원)를 타면 약 10분 만에 정상에 닿는다.
지난 21일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금오산에 올랐다. '금오산 일출'을 검색해 보면 바다에 벌겋게 불기운이 번지거나 운해에 덮인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멋진 풍광이 대부분인데 그날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예보와 달리 날씨가 좋지 못했다. 구름이 두껍게 하늘을 가려 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구나 황사까지 심해 섬과 바다의 윤곽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상중하로 구분하자면 하바리 금오산 전망인 셈인데 그래도 고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장쾌함이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다. 가파른 능선 아래 해안마을과 들판이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덮여 있고, 그 앞바다에 먹물을 듬뿍 찍어 흩뿌린 듯 크고 작은 섬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흩어져 있다. 이따금 구름 사이로 겨우 새어 나온 빛줄기가 수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랐으니 바다 전망만 보고 그냥 내려가기엔 조금은 아쉽다. 정상 봉우리를 한 바퀴 돌아오는 약 1.2㎞ ‘하늘길’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경사가 거의 없는 순탄한 길이라 시원한 산바람 맞으며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남동쪽에 3개의 바다 전망대, 북측에 지리산 전망대 겸 쉼터가 있어서 느긋하게 쉬어가기 그만이다.
간략하게 그려놓은 안내도는 그리 친절하지 못하다. 길 잃을 염려는 없는데 딱 한 곳 예외가 있다. 순환 산책로에서 돌출된 선으로 ‘석굴암 / 금오산봉수대 / 금오산마애불’ 표시가 있다. 지도상 조금만 걸으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거리 표시가 없으니 지나친 건가 긴가민가하다.
커다란 바위 안쪽에 희미하게 음각된 마애불은 겨우 찾았지만, 바로 앞 돌무더기가 봉수대 자리인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나중에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다보니 석굴암이라는 암자는 산 중턱에 동떨어져 있었다. 안내도만 믿고 내려갔다가는 힘들게 등산을 해야 할 판이었다. 고려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했다는 금오산성의 흔적도 끝내 찾지 못했다.
금오산 바로 앞의 해발 500m 깃대봉은 지역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철쭉 군락지다. 금남면 대치리에서 대송리로 넘어가는 도로 중간에 주차장이 있다. 산 중턱 고갯마루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30분가량 걸으면 정상에 닿는다. 절반은 임도를 따라가는 순탄한 길이고 나머지 절반은 계단이 포함된 급경사 오르막이다.
철쭉 군락은 오르막부터 시작된다. 탐방로를 덮어 터널을 이룰 정도로 자란 나무도 있지만 대개는 사람 키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나무인 것으로 보아 근래에 추가로 심은 것으로 보인다. 진홍빛부터 연분홍까지 빛깔도 다양하다. 산꼭대기에서는 금오산에서 보았던 남해의 섬들이 한결 가까이 보인다. 왼편으로 방아섬 솔섬 토끼섬 채도, 오른편으로 대도 넓은섬 둥글섬 주지섬 등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바로 앞에 깃대봉과 엇비슷한 높이의 산이 하나 더 있는데 연대봉이다. 금오산과 마찬가지로 산꼭대기에 옛날 봉화를 올리던 작은 성이 있고 바로 아래로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남해군과 경계인 노량해협이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었고 이순신 장군은 이 승리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9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이어 육지에서도 고전을 계속했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왜군은 철수 작전을 서둘렀다. 11월 18일 밤 200여 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퇴각과 협공작전으로 나온 500여 척의 왜선과 맞섰다. 다음 날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장군의 독려로 왜군 선박 200여 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됐다. 나포한 왜선도 100여 척에 이르렀다.
여세를 몰아 관음포로 도주하는 패잔병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뜻하지 않게 총을 맞고 쓰러졌고,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관음포는 현재의 남해군 고현면이다. 주요 이순신 유적이 남해에 위치한 이유다.
영웅의 마지막 바다, 노량해협에는 현재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2개의 해상교량이 놓여 있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마을은 각각 하동 금남면 노량리, 남해 설천면 노량리다. 남해 노량리에서 보면 가파른 연대봉 아래 올망졸망 자리 잡은 하동 노량리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에는 충무공의 넋을 기리는 남해 충렬사가 위치해 있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서거한 충무공의 유구를 처음 안치한 곳으로, 지역 선비들이 순국한 지 30년째 되던 인조 6년(1628)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남해 충렬사는 효종 9년(1658) 다시 지었고 현종 4년(1663)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 준 현액을 받았다.
사당 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무이공묘비’가, 후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초빈했던 곳에 가묘를 조성해 놓았다. 초빈은 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시신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 바깥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관례다. 웅장하지 않지만 그의 뜻을 기리는 시설로 단아하고 경건함이 묻어난다.
하동 금남면 중평리에는 경충사라는 또 하나의 호국 시설이 있다. 조선 중기 무신이자 곤양 정씨 시조인 정기룡(1562∼1622) 장군을 기리는 유적이다. 정기룡은 선조 19년(1586) 무과에 급제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 등 여러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고 토왜대장,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1931년부터 그의 고향인 이곳에 주민들이 추모시설을 지으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와 협박으로 사업이 중단됐고, 광복 후에야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할 수 있었다. 유허지에는 현재 사당과 함께 초가지붕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케이블카 정류장 바로 옆이지만 안타깝게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경충사 아래 바닷가에는 중평마을이 평온하게 터를 잡고 있다. 포구 방파제는 물고기 조개 오징어 등 해산물 그림으로 산뜻하게 단장해 놓았다. 이곳부터 약 4km 떨어진 술상리까지는 바다와 바짝 붙은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금오산에서 아득히 내려다보았던 여러 섬이 두 마을 사이 바다에 떠 있다.
모두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무인도인데 중평마을 앞 솔섬은 최근 ‘하동 미라클 해상정원’이라는 관광지로 개발됐다. 섬 중앙에 숙박 시설인 청소년수련원을 짓고 주변에 250여 종의 나무와 꽃을 심어 정원으로 꾸몄다. 개장을 기념해 4월 말까지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중평항에서 섬까지 하루 4회 도선이 운항한다.
조그만 포구인 술상리 마을은 지역에서 전어로 유명한 곳이다. 남해에서 상대적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사천만에서 잡히는 전어가 유난히 맛이 좋다고 소문난 덕이다. 집은 몇 채 되지 않지만 마치 술상처럼 동그란 마을 포구에 작은 어선이 수십 척 정박해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해상 덱 산책로가 놓여 있다. 길지 않은 구간에서 어촌마을의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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