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역린 건드린 K드라마·예능, 떨어진 수출... 미운털 박힌 이유

입력
2023.04.24 04:30
수정
2023.04.24 06:53
2면
구독

'장사천재 백종원' 등 예능·드라마 제3세계 정체성 훼손 잇따른 논란
북미 등에 치우친 콘텐츠 전략... 타 문화 몰이해 부메랑
잡음 잇따르며 수출도 폭락... 말레이시아선 내년부터 K팝 공연 단속

2일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장사천재 백사장'에 표기된 모로코 영토. 서남부 서사라하 지역이 빠져 현지에서 논란이 일었다. 분쟁 지역의 영토 표기를 부주의하게 표기해 모로코 시청자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논란이 확산하자 제작진은 다시보기에서 해당 지도를 삭제했다. tvN 방송 캡처

2일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장사천재 백사장'에 표기된 모로코 영토. 서남부 서사라하 지역이 빠져 현지에서 논란이 일었다. 분쟁 지역의 영토 표기를 부주의하게 표기해 모로코 시청자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논란이 확산하자 제작진은 다시보기에서 해당 지도를 삭제했다. tvN 방송 캡처

외식사업가 백종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엔 최근 아랍어로 그를 비난하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백종원 등이 모로코에 가서 찍어 지난 2일 방송된 tvN 예능프로그램 '장사천재 백사장'이 '모로코의 정체성과 이슬람 문화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말레이시아에선 K팝 아이돌그룹 공연 반대 움직임도 일고 있다. 최근 일부 아프리카 및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일고 있는 반(反)한류 흐름이다.


"모로코 지도 '반쪽' 표기" 현지 비판 폭주에 삭제

K콘텐츠의 문화적 남용이 한류 확산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떠올랐다. K콘텐츠가 동남아시아와 아랍권,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고 때로는 비하하는 경향까지 드러내 역풍을 맞고 있다. 오랫동안 일본과 북미, 유럽에 치우쳐 콘텐츠 전략을 짜다 보니 그 외 지역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낮은 감수성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K콘텐츠의 문화 남용 논란이 불거진 일부 국가에선 방송 프로그램과 K팝 음반 수출 금액이 많게는 3분의 1 토막이 난 것으로 파악됐다.

드라마 '수리남'은 수리남에서 벌어진 마약 비리를 다룬다. 실존 국가 이름을 그대로 써 현지 정부의 반발을 샀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수리남'은 수리남에서 벌어진 마약 비리를 다룬다. 실존 국가 이름을 그대로 써 현지 정부의 반발을 샀다. 넷플릭스 제공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최근 6개월 동안 K콘텐츠를 둘러싼 타 문화 훼손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남미의 수리남 정부가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2022)이 자국을 마약과 비리의 온상으로 그렸다며 공식 반발하고 나선 데 이어 같은 해 드라마 '작은 아씨들'도 베트남 전쟁 역사를 왜곡했다는 논란에 휘말려 베트남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서비스 도중 퇴출당했다. 이런 행태들이 제3세계에서는 문화제국주의로 비쳐 반한 감정으로 번질 수 있다. K콘텐츠 산업이 문화 다양성을 해치지 않는 콘텐츠 제작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모로코 시청자들은 '장사천재 백사장'에서 ①모로코 영토를 표기한 지도에서 서사라하를 뺀 이미지를 노출하고 ②무슬림이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뒤에서 찍은 뒤 한국 연예인들이 웃는 장면을 내보낸 것을 문제 삼았다. 모로코 지도를 '반쪽'만 표시했고 이슬람 문화를 희화화했다는 비판이다. 김강석 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는 "모로코는 과거 스페인이 지배하던 서사하라를 1970년대 중반부터 사실상 장악하고 통치해 왔다"며 "서사하라 주민들이 '폴리사리오 전선'을 꾸려 독립운동을 해왔지만 모로코는 여전히 이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현지에선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제작진이 한국 음식을 매개로 한 양국 문화 교류를 위해 모로코로 건너가 촬영을 해놓고선 분쟁 지역 영토를 부주의하게 표기해 모로코 시청자들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다. 방송의 다시 보기 영상엔 모로코 영토 표기 이미지가 삭제된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YG엔터테인먼트가 블랙핑크 '하우 유 라이크 댓' 뮤직비디오에 힌두교 신 중 하나인 가네샤 이미지(왼쪽 아래·코끼리 모양)를 함부로 사용했다가 인도 누리꾼의 비판이 제기되자 삭제했다. 뮤직비디오 캡처

YG엔터테인먼트가 블랙핑크 '하우 유 라이크 댓' 뮤직비디오에 힌두교 신 중 하나인 가네샤 이미지(왼쪽 아래·코끼리 모양)를 함부로 사용했다가 인도 누리꾼의 비판이 제기되자 삭제했다. 뮤직비디오 캡처


"공연 중 옷 벗는 것 금지" K팝 저항 커져

K콘텐츠는 영미권에서 백인 중심 콘텐츠의 대안 문화로 영향력을 넓혀왔다. 그렇게 세를 키워 온 K콘텐츠 내에선 제3세계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 극히 단편적이고 일방적이어서 논란에 휘말린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YG엔터테인먼트가 블랙핑크 '하우 유 라이크 댓'(2020) 뮤직비디오에 힌두교 신 중 하나인 가네샤 이미지를 함부로 사용했다가 인도에서 비판이 일자 뮤직비디오를 수정한 일이 대표적이다. 드라마 '라켓소년단'(2021)도 배드민턴 국제 경기를 주관하는 인도네시아를 자국의 승리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꼼수를 쓰는 나라처럼 그려 현지 시청자의 분노를 샀다. 상대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K팝의 일방적 진출에 대한 저항도 커지는 분위기다. 말레이시아 일간 더 스타 등에 따르면, 현지 정부는 2024년부터 K팝 등 해외 가수 공연 규제를 강화한다. 성별에 관계 없이 공연 중 옷을 벗는 등의 퍼포먼스 등이 단속 대상이다. K팝 공연 등이 현지 이슬람 문화를 위협한다는 설명이다.

인도네시아를 비하하는 듯한 대사가 등장하는 드라마 '라켓소년단' 5회 장면. SBS 방송 캡처

인도네시아를 비하하는 듯한 대사가 등장하는 드라마 '라켓소년단' 5회 장면. SBS 방송 캡처


베트남·인도네시아 등 수출 반토막

이 같은 잡음이 잇따르면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의 동남아와 아랍권 국가의 수출에는 비상이 걸렸다. 동남아 한류 거점이었던 인도네시아에선 K콘텐츠 수출액이 많게는 3분의 1 토막이 났다.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와 문화체육관광부가 2월에 낸 'K콘텐츠 산업조사'에 따르면, 2021년 K팝 음반 3대 수입국(959만 달러)이었던 인도네시아의 지난해 수입액은 368만 달러로 뚝 떨어졌다. 한국 드라마와 예능 등 방송 프로그램 수입액도 2019년 262만 달러에서 2021년 152만 달러로 줄었다. 같은 기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에선 한국 방송 프로그램 수입액이 250% 급감했고, 베트남에선 80%가 떨어졌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지난달 발간한 '2022 해외한류실태조사'를 보면, 중동 국가와 이집트 등 아프리카에서 K팝 호감 저해 요인 중 '한국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한 주위 반응이 좋지 않아서'란 답변이 두 번째로 많았다. 보고서는 "문화다양성 관점에서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베트남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 8회 일부 장면을 캡처해 빨간색으로 'X'자를 한 뒤 온라인에 공유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많은 사람을 죽인 과거를 무용담처럼 말한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이 장면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용기는 "한국군이 베트콩 100명을 죽였다"고 말한다.

베트남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 8회 일부 장면을 캡처해 빨간색으로 'X'자를 한 뒤 온라인에 공유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많은 사람을 죽인 과거를 무용담처럼 말한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이 장면에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용기는 "한국군이 베트콩 100명을 죽였다"고 말한다.

대안 문화를 넘어 세계 주류 문화로서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K콘텐츠도 문화 다양성을 더욱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동열 부산외대 아랍학과 교수는 "방탄소년단은 사우디아라비아 공연(2019) 때 여성 스태프들이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현지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 등을 가리려고 입는 전통의상인) 아바야를 착용하고 멤버들도 노출을 자제했다"며 "문화적 친밀성이 낮은 문화에 콘텐츠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상대 문화에 관한 충분한 이해와 해당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승준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