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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탑·경화역·황해당… 100년 근대사의 향기, 벚꽃 아래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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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물결의 속도가 바람보다 빠르다. 지난주 남쪽 지방에서 하나둘씩 터지던 벚꽃이 ‘화르르~’ 전국으로 번졌다. 서울에서도 창문만 열면 꽃바람이다. 남쪽으로 봄꽃 구경 가려던 발걸음이 머쓱해졌다. 벚꽃으로 치면 진해를 빼놓을 수 없다. 1963년 시작한 국내 최대의 벚꽃놀이 축제인 군항제가 환갑을 맞았다. 지난 24일 개막한 올해 축제가 다음 달 4일까지 계속된다. 여좌천을 비롯해 가로수로 심은 36만여 그루 벚나무 가지마다 일제히 망울을 터트려 시내 전체가 화사한 봄기운에 휩싸였다. 밀려드는 인파로 이때만큼은 꽃 몸살을 앓지만, 평시 진해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창원시 진해구 원도심은 중원, 북원, 남원 3개의 로터리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형성돼 있다. 1905년 일제의 계획도시로 출발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해군의 거점으로 발전했고, 로터리에서 연결된 각 골목마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해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진해구는 원도심의 오래된 건물과 기념물을 연결해 ‘근대역사문화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3개 로터리를 중심으로 넓지 않은 구역에 흩어져 있어서 2시간이면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다.
시작은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매년 벚꽃이 필 무렵 열리는 군항제도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추모제로 시작됐다. 1950년 해군 창설 제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성삼 통제부사령관의 제의로 ‘동상건립기성회’가 구성돼,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60년이 된 1952년 4월 13일 완공했다. 전국의 수많은 이순신 동상 중에서 최초의 동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 동상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얼굴 모양도 많이 다르다. 당시 수집할 수 있는 문헌자료와 자손의 골상 등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어서 의미가 더 깊다. 동상은 장복산을 배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최근 뒤편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조금은 왜소해 보인다.
중원로터리는 무려 8개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원도심의 중심이다. 어쩌면 진해는 탄생부터 모순을 내재한 도시였는지 모른다. 주변 도로변에는 아직도 100년 세월의 흔적이 남은 건물이 많다. 찻집이나 식당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자격지심’이었을 일본식 가옥에 주민들의 삶이 더해져 진해의 복고 감성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식 2층 건물인 장옥(長屋·나가야)의 일부는 원형대로 남아 있다. 장옥은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다가구주택으로 1층은 상점, 2층은 살림집 구조다. ‘황해당’ 간판을 건 도장가게에서는 올해 우리 나이로 구순인 정기원 할아버지가 여전히 손님을 맞고 있고 뒤편으로 5, 6채의 살림집이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있다.
옛 사진을 보면 커다란 중원로터리에는 무려 1,2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고사하고 말았다. 이후 팽나무가 있던 자리에 시계탑을 세웠는데, 진해 사람이면 누구나 집안에 ‘인증사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명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의 로터리는 텅 비어 있다.
북원로터리로 이어지는 도로 귀퉁이에 깔끔한 외관의 2층 건물이 눈에 띈다. ‘흑백’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1912년 세워진 이 건물은 창원시 근대건조물4호로 등록돼 있다. 작곡가 이병걸이 ‘칼멘’이란 상호로 다방을 하고 있었는데, 1955년 친구인 화가 유택렬이 인수해 ‘흑백다방’으로 개명한 후 2008년까지 운영했다. 1960~70년대 변변한 전시관 하나 없던 시절,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차도 마시고, 이따금씩 전시회도 열리던 진해의 문화 구심점이었다. 멋진 곳에서 분위기 잡고 싶어 하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뒤편 귀퉁이에 역시 1912년 지은 건물을 개조한 ‘군항마을 역사관’이 있다. 일제의 도시계획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해 근대사가 투영된 350여 점의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바로 옆 여좌천을 복개한 공간은 ‘군항마을 테마공원’으로 꾸며졌다. ‘도만이들에서 일본 육전대를 쫓아내다’라는 제목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05년 12월 일본 군인과 측량사가 도시 계획을 획정하기 위해 도만이들(도만포) 염전과 논밭에 대해 측량을 실시하자 마을 사람들이 측량기구를 넘어뜨리고 그들과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다. 이때 도만동 청년 우찬옥은 일본 헌병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평생을 불편하게 지냈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 당시 진해 계획도시에는 일인들만 거주할 수 있었고, 도만이들에서 쫓겨난 주민들은 현재의 경화동으로 삶터를 옮겨야 했다.
공원 뒤편에 조금은 이질적인 건물 한 채가 눈에 띈다. 1938년 지은 6각 지붕의 중국풍 3층 건물로, 그 모양 때문에 ‘뾰족집’이라 불렸다. 한때는 지역 유지들을 상대로 하는 요정이었는데 오랫동안 ‘수양회관’이라는 식당으로 이용되다 현재는 문을 닫은 상태다. 맞은편 원해루도 1949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이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 포로였던 장철현씨가 ‘영해루’라는 상호로 문을 연 중국집인데 상표 등록을 하지 않아 현재는 ‘원해루’ 간판을 달고 있다. 진해를 방문한 당대의 명사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고,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중원로터리 동쪽 귀퉁이에는 산뜻한 우윳빛 외관의 진해우체국이 자리 잡고 있다. 1912년 지어 현존하는 국내 우체국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국가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진해우체국은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위해 우편환저금, 전기통신 업무를 주로 취급했다. 러시아풍의 이국적인 외관 덕분에 영화 ‘클래식’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 건물은 우체국에서 창고를 겸한 부속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깔끔한 외관을 보면 내부 모습이 궁금해지는데 들어갈 수 없으니 아쉬움이 크다.
우체국 뒤로 돌면 제황산 정상으로 오르는 모노레일(왕복 3,000원)이 나타난다. 이름은 큰 산인데 실제는 높이 90m의 동네 뒷산이다. 원도심 중심에 위치하고 꼭대기에 박물관을 겸한 탑이 세워져 있어서 지역에서는 흔히 ‘탑산’이라 부른다. 탑 위에 오르면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계획도시 진해와 섬으로 둘러싸인 진해 앞바다가 소담스럽게 내려다보인다. 뒤편으로는 장복산 자락으로 넓혀진 도심 풍광이 한눈에 조망된다. 진해탑은 일제가 세운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을 헐고 1967년 해군 군함을 본떠 지었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길의 끝도 이순신이다. 마지막 남원로터리에는 ‘김구 선생 친필 시비’가 자리 잡고 있다.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진해를 방문해 해안경비대(현재 해군)를 격려하고 남긴 친필 시를 화강암에 새긴 비석이다. 비문은 ‘이충무공 전서’에 실린 ‘진중음(陣中吟)’의 한 구절이다.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誓海魚龍動),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는구나(盟山草木知).” 나라를 잃을 절체절명의 시절, 장부로서 해야 할 바를 다잡는 충정이 읽힌다. 일제가 건설한 최초의 계획도시지만, 진해의 상징은 대한민국 해군이자 충무공 이순신이다.
군항제가 열리는 기간 진해에는 벚꽃만큼 사람이 넘친다. 원도심으로는 차를 가져갈 생각을 버리는 게 현명하다. 창원시는 주말(4월 1, 2일) 성산구 공단로와 두산볼보로에 대규모 주차장을 확보하고 10~15분 간격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할 계획이다.
외지에서 온 벚꽃 나들이객들은 여좌천과 경화역에 집중적으로 몰리지만 인파를 피해 주민들이 찾는 곳은 따로 있다. 여좌천 상류 내수면환경생태공원이 대표적이다. 1929년 진해양어장으로 출발한 내수면양식연구센터지만 실상은 잘 꾸며진 생태공원이다. 저수지 주변으로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고, 간간이 벚나무가 섞여 있다. 벚꽃이 질 무렵이면 바람에 날려 수면에 떨어지는 꽃잎이 환상적이다. 벚나무 외에 수선화, 꽃창포, 비비추 등 습지식물과 4,000여 종의 수목을 심어 화려한 봄의 색감을 즐길 수 있다.
진해 시가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장복산조각공원도 빠지지 않는다. 1979년 태풍으로 산사태가 발생한 곳을 휴식 공간으로 꾸몄다. 장복터널이 뚫리기 전 창원과 진해를 잇던 마진터널까지 1.5㎞ 도로 양쪽으로 아름드리 벚나무가 개나리와 어우러져 있다. 소나무, 벚나무, 편백나무 등이 조화를 이룬 숲속에는 쉼터와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시내 동쪽 외곽 장천동에는 별도로 ‘진해벚꽃공원’이 조성돼 있다. 바다가 보이는 얕은 언덕에 여러 수종의 벚나무를 심어 다양한 색과 모양의 벚꽃을 즐길 수 있다. 동심원 형식으로 낸 산책로를 따라 꼭대기에 오르면 진해만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진해로 접어들기 전 창원대로 양편에도 벚나무가 심겨 도시가 환하다. 그중에서 창원교육단지가 지역의 벚꽃 명소로 이름나 있다. 내동공원과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벚꽃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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