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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파리지엥은 뜨겁게, 그러나 웃으며 저항했다 "연금개혁 누가 하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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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마지막 날 프랑스는 뜨거웠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연금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더 오래 일하라"는 '마크롱 안'을 한목소리로 규탄했다.
한국일보가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비장했지만, 웃고 있었다. 거센 저항의 물결이 정부의 부당한 시도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 때문인 듯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포기나 타협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금개혁은 마크롱 2기 정권의 상징이어서 물러서기도 쉽지 않다. 프랑스인들의 저항은 계속 커질 전망이다. 주요 8개 노동조합은 이달 7, 11일 추가 파업을 예고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에서 연금개혁 저지를 위한 2차 시위가 열렸다.
마크롱 정부는 연금 수령 시점인 은퇴연령을 현행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단계적으로 늘리고자 한다. 연금 전액을 받기 위한 근속 기간도 현행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릴 계획이다. 프랑스 시민 약 70%는 이 계획에 반대하고 있다.
내무부는 약 127만 명이 집회에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노동총연맹(CGT)은 참석자 규모를 280만 명 정도로 봤다. 정부와 노조의 숫자에 많은 차이가 나지만, 시위 참가 인원이 1차 때보다 늘어났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19일 열린 1차 집회 때 내무부는 112만 명, 노조는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수도 파리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다. 내무부 추산 8만7,000명, 노조 추산 50만 명이 '이탈리아 광장'에 모였다. 노조 '노동자의힘(FO)' 소속 필립 헤벡씨는 "62세도 일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했다. 야당도 화력을 보탰다. '불복하는 프랑스' 소속 매튜(31)씨는 "대부분의 시민이 연금개혁을 반대하고 있다"며 "마크롱 대통령이 포기할 때까지 견제할 것"이라고 했다.
현장의 경찰들은 방패와 총을 차고 시위에 대비했다.
파리의 시위 현장엔 마크롱 정부를 규탄하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과 깃발, 풍선이 가득했다. 마크롱 대통령과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를 풍자한 만화도 곳곳에 붙었다.
노조 등에 소속되지 않은 일반 시민들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광장으로 나왔다. 가족, 친구, 연인 등과 함께 온 이들이 많았다.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안고 온 아빠도 있었다. 프랑스 현지의 언론들은 노조의 결집력은 1차 시위보다 낮아졌지만, 시민들의 참여가 높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시민들은 "우리는 연금개혁을 원한 적이 없다"고 외쳤다.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마흐트(25)씨는 "'일을 더 하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하는 것에 경악했다"며 "이왕 법정 정년이 문제가 된 김에 정년을 다시 60세로 내렸으면 한다"고 했다. 정년이 60세에서 62세로 오른 2010년 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국민의 권리를 지키고자 시위에 왔다는 사람이 많았다. 70세의 한 남성은 "내 아내(53)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며 "아내는 일터에서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1, 2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했다. "19세 딸이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에게 시위 참여는 '가족을 지키는 것'이었다.
마크롱 안이 노동시장의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근무 기간이 늘어나면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출산휴가 등 경력 단절 때문에 여성에게 추가되는 근무 기간은 남성보다 길다. 고등학생 호즈(18)씨도 '성평등'이라고 적힌 종이 판을 들고 시위에 왔다.
연금개혁은 마크롱 정부에 누적된 불만을 토해내는 계기가 된 듯했다. 발자크 고등학교에 다니는 룰리아(17)씨는 "오늘 아침 학교 문을 걸어 잠그는 '폐쇄 시위'를 마친 뒤 곧장 이곳에 왔다"며 "마크롱 대통령 집권 이후 프랑스 공교육이 망가진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시위를 "모두의, 모든 것을 위한 시위"라고 표현했다.
공식적으로 오후 2시에 시작된 시위는 오후 7시를 넘은 시각까지 이어졌다. 시민들은 이탈리아 광장부터 보방 광장까지 6㎞가량을 행진했다. "레지스탕스(저항)"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는 흡사 축제의 한 장면 같았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이들이 많았다. 밤이 깊을수록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시위대 중 일부가 돌발 행동을 해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무부는 "시위는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됐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시위를 통해 마크롱 대통령의 뜻을 굽힐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언론인 나스타시아 하자디씨는 "마크롱 정부 1기 때인 2019년 연금개혁 시도가 있었지만 '강력한 저항'으로 막아내지 않았나"라며 "프랑스에서 시민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2월 국회 논의를 거쳐 9월 개혁안을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고수하고 있다.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 시민들의 반발은 계속 커질 수 있다. 여론조사 기관 엘라베가 25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 64%가 시위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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