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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으로 남은 황제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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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달리 여름 폭염은, 20세기 초 미국 발명가 윌리스 캐리어가 현대식 에어컨을 발명하기 전까지 신분 불문 고르게 감당하던 고통이었다. 혼자 밤길을 걸을 때에도 제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신독(愼獨)’을 자랑삼던 조선의 양반들, 그중에도 유학으로 덕을 쌓은 온전한 양반들이 특히 힘들었을 것이다. 비단 용포로 몸을 친친 두른 채 신료들을 맞이해야 했을 임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궁 밖 나들이조차 자유롭지 못해 계곡의 탁족 피서도 엄두 내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한족의 중원을 정벌한 북방의 왕들을 가장 괴롭힌 것도 베이징의 무더위였다. 자객이 두려워 나무 한 그루 심지 않고, 요새처럼 폐쇄적인 구조로 구축된 정궁 자금성은 땡볕에 달궈진 가마솥 그 자체였다. 여진족의 금과 몽골의 원, 만주족 청의 황제들이 베이징 서북부 하이덴구 일대에 정궁을 압도하는 거대한 별궁을 잇달아 지어 머문 까닭이 그거였다. 3산 5원(三山五园)의 황가원림(皇家园林), 즉 정명원(옥천산)과 정의원(향산), 창춘원 이화원(만수산), 원명원이 그 예다. 어쩌면 중국 절대권력의 위용은, 자금성보다 저들 원림에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청나라 황금기를 구가하던 강희제가 1707년 넷째 아들 옹정제에게 지어 하사한 원명원은 자금성의 8.5배 부지에 당시 베이징에 머물던 선교사까지 동원해 설계한 유럽식 정원과 서양 건축물까지 갖춘 중국 원림의 절정이자, 면적으로도 당대 동서양을 아울러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원명원의 건축물은 모두 사라지고 잔해 일부만 남아 있다. 1860년 10월 18일 아편전쟁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자금성보다 먼저 원명원에 들이닥쳐 많은 건축물을 파괴, 약탈했고 이후 의화단의 난과 신해혁명, 중국 혁명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더욱 황폐해졌다.
다만 원명원 총면적의 40%를 차지하는 호수는 남아, 지금도 중국서 가장 화려하고 다양한 연꽃들을 피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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