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티베트 불교 사원은 왜 마녀의 나신에 그렸을까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 어린 아이를 잡아먹는 마녀가 살았다. 나찰녀(羅剎女)다. 아이 잃은 부모들이 비통에 빠졌다. 석가모니가 교화를 시켰으니 법화경에 기록이 남았다. 전설이나 신화, 소설에 악녀로 자주 출몰한다. 서유기에 요괴로 등장해 손오공과 싸운다. 삼국유사는 수로왕의 설화를 빛내는 조연을 부여했다.
토번에도 등판한다. 1990년대 노블링카의 문물을 정리하다가 나찰녀가 그려진 탕카를 발견했다. 정확하게 언제 제작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모습이 꽤나 독특하다. 다리와 팔을 벌리고 벌렁 누운 나신의 형상이다. 상상해보면 '19금'에 가깝다.
마녀앙와도(魔女仰臥圖)라 한다. 라싸 시내의 박물관에 가면 전시돼 있다. 아쉽게도 복제품이다. 높이 73cm, 길이 152.4cm의 탕카다. 마녀의 머리, 어깨, 손, 무릎, 발, 심장 등 부위마다 사원이 하나씩 그려져 있다.
진마도(鎮魔圖)라고도 부르는데, 이유가 있다. 7세기에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라싸로 시집왔다. 밤마다 마녀가 준동해 재난을 입혔다. 중원의 음양오행과 점성술로 살피니 토번 영토가 나찰녀가 누운 형세였다. 심장인 라싸에 포탈라궁과 조캉사원을 건축했다. 동서남북 가장자리와 팔다리 네 마디와 어깨 부위 네 곳까지 모두 12곳에 사원을 지었다. 티베트 사원의 기원을 기록했고 달라이라마 5세가 지었다고 알려진 ‘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십이불이지정(十二不移之釘)이라 기록했다. 꼼짝달싹 못하게 못을 박았다는 이야기다.
마녀에 대한 진압이 사원의 기원이라는 뜻이다. 선과 악으로 세상을 본 시각이다. 손오공이나 수로왕을 위해 권선징악 이야기의 악녀가 됐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나찰녀는 대오각성했다. 부처의 공덕은 절대적이 아니던가? 아이와 어머니를 위한 수호신이 됐다고 알려진다. 티베트에서는 대지의 어머니라는 해석도 있다. 불경과 함께 온 나찰녀는 불법에 감화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겁탈당한 듯 짓눌린 자세가 아니라 티베트 땅을 너그러이 보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티베트 사람들의 농경생활을 보여주는 그림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원의 토양에서 살아온 민족이다.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표정은 하나같이 평화의 땅에 사는 듯 정겹다. 티베트 불교가 뿌리내렸고 현재 3,000곳이 넘는 사원이 있다. 나찰녀의 왼쪽 옆구리에 그려진 티베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간다.
라싸 시내를 라싸하(拉薩河)가 흐른다. 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티베트의 젖줄이라 불리는 강물과 만난다. 히말라야 산맥 북단에 위치한 해발 5,000m 이상에 위치한 빙하 3곳에서 발원해 합쳐진 후 동쪽으로 흐른다. 티베트 영토만 2,000㎞를 가로지른다. 얄룽짱뽀(雅魯藏布·Yarlung Tsangpo)다.
티베트 문자로 보면 ‘얄’은 ‘야르’로 발음해야 하는데 워낙 이름이 굳어졌다. 얄룽은 ‘정상에서 흘러내린다’는 뜻이며 짱뽀는 강하(江河)란 말이다. 편하게 얄룽강이라 부른다. 동진하던 강은 히말라야 동단의 해발 7,782m 남차바르와(南迦巴瓦) 봉우리를 끼고 우회한 후 남진한다. 국경을 넘으면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이 된다. 인도 아삼 주를 서진하고 방글라데시를 관통해 벵골만으로 빠진다.
얄룽강과 만나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1시간을 더 가면 나루터가 나온다. 나룻배를 기다린다. 멀리 산 능선을 구름이 휘감고 있고 틈새로 슬쩍 눈 덮인 모습이 보일 듯 말 듯하다. 강을 건너 티베트 최초의 사원이 있는 마을로 가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여행자들이 자주 이용하던 교통수단이었다.
2000년대만 해도 라싸 밖으로 여행을 하려면 또다시 허가를 받아야 했다. 지금도 오지로 가려면 곤란한 일이 많다. 검문을 우회하려고 강을 종단했다. 검문을 피하고 대자연에 흠뻑 빠질 수 있으니 행운이다. 운 좋은 불법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슬기로운 장사’가 생겼다. 이제 슬그머니 여행 코스가 됐다.
배가 통통거린다. 모터가 티베트 천지를 때릴 기세다. 시동 소리가 크긴 해도 점점 익숙해진다. 해발이 높다고 강물이 유난히 잔잔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고원이다. 강폭이 넓어서 그렇다. 어느덧 소음이 사라지고 깊은 고요에 젖어간다. 여행자와 주민 20여 명이 제자리에 앉아 명상에 빠진 듯하다.
구름 따라 강물 따라 몸이 스르르 흐른다. 물소리와 바람소리, 가끔 새소리만이 귓전을 간질일 뿐이다. 빙판을 구르듯 배는 미동 하나 없이 미끄러진다. 모터도 물길을 아는지 터덜거리지 않는다. 기온과 수온도 거의 하나다. 간혹 튀어 오르는 물방울만이 여행자의 적막을 깨운다. 1시간가량 지나 강 건너편에 도착한다. 꿈에서 깨는 소리가 들린다.
여행이란 심취하는 일이자 감동의 연속이다. 미처 헤쳐 나오지 못한 풍광에 빠져 머뭇거렸더니 버스가 떠났다. 트럭을 탔다. 운전대 잡고 노는 꼬마는 아빠 따라 나온 개구쟁이다. 밥풀 묻은 뺨에 미소를 짓는다. 외국인인지 아는지라 낯을 가린다. 비포장도로를 30분 쿵쾅거리며 달리니 나타난 마을, 쌈얘(桑耶·bsam yas) 진이다.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이 있다. 775년에 낙성했는데 건축 기간이 12년이다. 조캉사원에 비해 100년도 더 지나 세웠는데 최초의 사원이라?
라싸 조캉 앞에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가 세워져 있다. 토번 200년 역사에서 당나라와 10여 차례의 회맹을 맺었다. 그 중 마지막 회맹을 기념하고 있다. 821년에 장안에서 맺고 이듬해 라싸에서 재확인했다. 비석은 823년에 세웠다.
토번과 당나라는 협약을 통해 화친을 도모했는데 대부분 금방 깨졌다. 783년 6차 회맹인 청수맹약(清水盟約)이 체결됐다. 토번이 침공해 장악한 당나라 영토를 할양 받는 내용이었다. 좋게 말해 회맹이지 당나라에게는 엄청난 굴욕과 다름없었다. 토번의 5대 짼뽀 티쏭데짼(赤松德贊) 시대 일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42년(755~797)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을 보름 동안 점령하고 황제를 새로 책봉했다. 서역 20여 개 나라를 점령해 실크로드를 장악했으며 소발률국(지금의 파키스탄 북부)까지 복속했다. 최대 강역을 확보한 전성기였다. 내부적으로는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정립했다. 승려를 양성하고 불경을 번역했으며 사원을 건축했다. 이때 인도에서 고승 두 명이 토번에 왔다.
산타락시타(寂護·Shantarakshita)가 먼저였다. 이어 제2의 부처로 칭송 받는 빠드마삼바바(蓮花生·Padmasambhava)가 왔다. 고대부터 이어온 전통 신앙인 뵌교(苯教)가 주름잡던 토번에 인도 불교가 전래됐다. 불법승이 갖춰진 최초의 사원 쌈얘사를 775년에 낙성했다. 12년이란 세월을 거쳐 공사했다.
티쏭데짼은 사원이 어떤 모습으로 건축될지 굉장히 궁금했다. 빠드마삼바바가 손바닥 위에 환영으로 펼쳐 보였다. “쌈얘”라고 외쳤다. ‘상상을 초월해 뜻밖이다’는 감탄이다. 그렇게 전설이 사원이 됐고 마을이 조성됐다. 3개의 오색 룽따와 나무를 불사르는 외상로(煨桑爐)가 보인다.
삼얘사는 토번과 당나라, 인도의 건축양식이 두루 적용된 3층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만다라를 구현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우주관을 드러냈다.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는 대전인 우체(烏孜)가 금빛 찬란하다.
작은 백탑 108개가 쪼르륵 담장 위에 놓였다. 양쪽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태양전과 월량전을 배치했다. 사리탑인 영탑도 많다. 네 모서리에는 불탑을 세웠다. 가장 바깥에는 원형의 담장 흔적이 있다. 평면도로 보면 전체가 원과 방형의 조화다. 사원을 찾은 신도들이 탑을 따라 순례를 한다. 따로 정해진 길도 없고 구름의 속도로 걷는 발걸음만 감지된다.
사색(四色)의 불탑은 사대천왕을 상징한다. 정문 오른쪽에 위치한 녹탑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백탑 홍탑 흑탑이 있다. 모두 담장을 두르고 있고 가운데에 약 16m의 탑이 솟아 있다. 순례자를 위해 대문이 열려 있다. 홍탑에서 보면 백탑과 흑탑이 보인다. 녹탑은 대각선이라 시야에 없다.
홍탑 안으로 들어선다. 기단은 방형이고 탑신은 밥그릇을 뒤집어놓은 모양의 복발형(覆鉢形)이다. 중간 즈음에 눈동자를 그렸다. 천왕의 위엄을 보이려는 듯 강렬한 눈빛을 내뿜고 있다. 죄지은 사람의 속내를 꿰뚫는 듯하다. 계단 따라 오르면 탑신 끝으로 좁은 난간이 있다. 조금 좁지만 한 바퀴 탑 순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마니차를 빙글빙글 돌리며 돌아가면 자그마한 불전이 있다.
가부좌로 앉은 수도승 불상이 많다. 벌거벗은 중생을 짓누르고 있는 호랑이가 보인다. 그 위에 올라탄 보살이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다. 당시 성행한 인도 밀교가 전승돼 티베트 불교만의 신상으로 발전했다. 낯선 여행자가 보기엔 무섭다는 느낌이 먼저다. 자주 보면 친근하다. 간혹 극도로 긴장하는 사람도 있다. 조그만 불상이 마치 서랍 속에 담긴 듯 진열돼 있다.
순례자가 남기고 간 지폐가 수두룩하다. 유리에 꼈고 바닥에 떨어졌다. 중국 인민폐 중 일각(壹角)이다. 각은 10분의 1원(元)이다. 가장 낮은 가치의 지폐이긴 해도 빈손으로 빌 수는 없다. 결코 적지 않은 성의에 불심이 가득 느껴진다.
왜 쌈얘에 최초의 사원이 생겼을까? 고진신운(古鎮新韻)이라 쓴 바위가 있다. 아래에 마을 유래를 적었다. 8세기 초에 4대 짼뽀 티데쭉짼(赤德祖贊)의 야영지였다. 쌈얘에서 북쪽으로 4㎞ 떨어진 얕은 능선이었다. 금성공주와 혼인 후 별궁을 지었다. 아들 티쏭데짼이 태어났다. 금성공주의 아들이 맞는지 약간의 논란이 있긴 하다. 어머니 나라인 당나라를 침공해 점령했다. 봉건의 시대였다. 왕조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수도를 라싸로 옮기기 전에는 오랫동안 토번 조상의 거주지였다. 지금도 티베트의 정신적 고향이다.
쌈얘와 라싸를 왕복하는 버스가 사원 앞에서 출발한다. 2~3시간 거리인데, 사원이 있는 마을 여러 곳를 돌아가느라 도착시간을 예측하기 어렵다. 신도들을 위해 순례를 다니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느릿느릿한 속도로 꼬불거리며 이동한다. 얄룽강을 건너더니 남진한다. 고대 토번의 중심이던 쩨탕(澤當)을 통과한다. 30분을 더 가서 토번 최초의 왕궁 앞에 내려준다. 관람을 마치고 모든 승객이 돌아오면 다시 출발하는 버스다.
'서장왕신기'에 따르면 토번 1대 짼뽀인 냐티(聶赤)가 궁전을 지었다. 기원전 2세기 초의 일이라 한다. 언덕 따라 지그재그로 오른다. 산봉우리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윰부라캉(雍布拉康·Yumbulakang)이다.
캉은 신전이다. '윰부'는 어미 사슴, '라'는 뒷다리다. 모자궁(母子宮)이라는 별명이 있다. 궁전으로 오르다 뒤돌아보면 백탑과 함께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토번에서 가장 일찍 농경을 했던 장소다. 토번이란 뜻이 ‘고원의 농토’가 아니었던가.
궁전은 세월이 흘러 사원이 됐다. 입구 앞에 외상로와 마니차가 놓였다. 버스를 함께 타고 온 노부부가 순례를 왔다. 힘겨운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올라와 참배를 한다.
기원전에 지은 궁전은 7세기가 되자 쏭짼감뽀가 접수했다. 궁전이 사원의 형태로 중건됐다. 문성공주와 여름을 보낸 별궁이기도 하다. 부인이 여럿인데 문성공주와 여름휴가를 보냈다는 기록만 있진 않을 듯하다. 사실 둘은 10년 남짓 부부였다. 쏭짼감뽀가 33살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점점 사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다시 천년이 흐른 17세기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다. 실권을 장악한 달라이라마 5세다.
원래 방어 기능을 지닌 망루인 조루(碉樓) 형태였다. 달라이라마 5세가 지금처럼 규모를 키워 지붕과 금정(金頂)을 건축했다. 당연히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빠 사원으로 변모했다. 앞쪽에서 보면 웅장한 사원이다. 계단을 따라 사원을 통과해 뒤쪽으로 가면 여전히 조루의 모습이 남았다.
뒷산에 타르초가 잔뜩 나부끼고 있다. 티베트 문자로 적은 불경이라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저 생로병사의 치유이며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기원이라 짐작한다. 순례자나 여행자 모두 염원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해발 3,600m 넘는 산이다. 바람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펄럭인다. 최초의 궁전과 농토가 깃든 땅이다. 깃발을 스치는 바람이 하늘까지 질주하는 듯하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