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양쪽 귀 뒤와 등에 콩 크기만 한 진드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밥그릇은 엎어져 있고 양동이에는 썩은 물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개의 눈은 초점 없는 푸른색 동태 눈 같았고요."
제주 시민 윤모씨
지난달 초 회사원 윤모(36)씨는 회사의 부지개발 답사를 위해 제주 제주시 제주공항 인근 렌터카 사무실 주차장 옆 들판을 찾았다 저 멀리 줄에 묶여 있는 흰 색 개를 발견했다. 윤씨는 "무릎까지 오는 풀만 무성하고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에 개가 있어서 의아했다"고 말했다.
악취 진동하는 닭장 옆, 다리 다친 백구 발견
윤씨가 해당 부지를 다시 방문한 건 지난달 22일. 개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묶여 있었다. 땡볕 속 사람이 접근하기도 어려운 곳에 개가 묶여 있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던 윤씨는 수풀을 뚫고 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윤씨는 "개 주변에는 쓰레기와 개똥이 수북했고, 바로 옆 닭장에는 수십 마리의 닭이 있었는데 파리가 들끓고 악취가 진동했다"며 "개는 한쪽 다리가 부러져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설명했다.
윤씨는 개의 귀 뒤와 등에 붙은 진드기 해결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고 그 길로 동물병원에 가 진드기 약을 사서 발라줬다.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개는 반기기도, 그렇다고 저항하지도 않고 아무 의지가 없는 듯 윤씨에게 몸을 맡겼다. 윤씨는 지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개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윤씨의 사연을 들은 제주 현지 동물단체 제주동물사랑실천 혼디도랑 김은숙 대표는 처음에는 구조에 나설 계획이 없었다. 제주에는 워낙 묶거나 방치해서 키우는 개들이 많은데 모든 요청을 다 들어주기 힘들어서다. 대신 개를 발견한 시민이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김 대표의 머릿속에 진드기를 매달고 있는 개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고 연락을 받은 지 이틀째인 24일 오후 무작정 남편과 개가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사실 개를 발견했다는 곳까지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렌터카 주차장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무릎까지 오는 풀과 나무를 뚫고 100m가량을 걸어가야 해서다.
10년 넘게 진드기 달고 닭지킴이로 살아
김 대표 부부는 개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방치된 비닐하우스 근처를 서성이던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을 발견했다. 다가가 확인하니 흰 개를 기르는 사람이었다. 김 대표에 따르면 남성은 본인이 챙기는 개가 맞고 진드기가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개가 이곳에서 닭지킴이로 산 세월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남성은 처음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며 개를 내줄 생각이 없었지만 김 대표의 끈질긴 설득 끝에 개를 구조하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정작 개가 보이지 않아 김 대표 부부는 주변에 개를 찾아 나섰고, 비닐하우스에 숨어 있던 개를 찾았다. 남성이 부르자 개는 10년 넘게 묶여 있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끈질긴 설득 끝에 구조… 고비 넘긴 '흰둥이'
김 대표는 곧바로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건강상태를 살폈다. 추정 나이는 10~12세. 오랜 바깥 생활 탓에 모기가 매개하는 질병인 심장사상충과 진드기에 물려 전파되는 바베시아에 감염되어 있었다. 앞다리 한쪽은 부러진 상태였다. 동물병원은 개의 상태가 심각해 회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김 대표는 "남성에게 개의 건강 상태와 치료에 드는 비용을 얘기하니 안락사하라는 답을 받았다"라며 "우선은 개의 건강 회복이 시급해 치료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혼디도랑 활동가들은 개에게 '흰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치료를 이어갔다. 구조 당시 살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던 흰둥이는 고비를 넘기고 현재 혼디도랑이 운영하는 유기동물 쉼터에서 지내고 있다. 현재 치료 중이지만 회복 속도가 빠른 편이다. 개는 쉼터에 온 지 1주일 정도 지나자 산책도 잘 하고 다른 개들과 노는 것도 좋아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사람을 봐도 도망 다니더니 이제는 사람의 손길을 피하지 않게 됐다"라며 "건강을 회복한 이후에는 가능하면 흰둥이의 새 가족을 찾아줄 계획이다"라고 전했다.
유기동물 가장 많고, 안락사 비율 가장 높은 제주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농림축산검역본부 동물보호관리시스템(APMS)에 등록된 유실·유기 동물 공고 57만324건을 분석한 결과, 인구 1만 명당 유기동물 발생 건수가 가장 많은 곳은 제주(414건)로 서울(40건)의 10배 이상이었다. 두 번째로 많은 전북(171건)에 비해서도 2.4배나 됐다.
제주 유기견 가운데는 비(非)품종견, 이른바 믹스견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같은 기간 APMS에 등록한 유기견 중 비품종견은 총 2만3,039마리로 품종견(2,743마리)의 7.8배에 달했다. 또 전국 시도 보호센터에서 유기동물이 자연사하거나 안락사되는 비율 역시 제주가 76.2%로 가장 높았다.
제주에 유기견이 많은 이유는 중성화를 시키지 않고 묶어서 키우는 '마당개'와 방치해서 키우는 개들이 많아서다. 김은숙 대표는 "노년층 가운데는 흰둥이처럼 방치해서 키우는 걸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라며 "동물 등록은커녕 개들이 사라져도 찾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자체가 반려견 중성화 사업에 나서 무분별하게 태어나는 개체 수를 줄이고, 방치하며 기르는 문화도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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