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베이징 문화여행 ④ 스차하이와 홍극장
징과 북을 만들던 후퉁(胡同ㆍ골목)이 있다. 폭이 8m 정도, 남북으로 약 800m에 이르는 난뤄구샹(南?鼓巷)이 베이징의 문화거리로 변신했다. 베이징올림픽이 만든 변화였다. 주말이면 젊은 연인의 번화가로 탈바꿈하고 관광객의 발길도 잦다. 식당과 공예품 가게가 줄지어 자리 잡았고 풍물이 넘쳐난다. 난뤄구샹 골목 양쪽, 동서로 뻗은 골목이 8개나 된다. 골목 속의 골목이 서로 엉켜 있다.
고궁(자금성) 북문인 신무문에서 걸어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유명인사가 살던 저택이 많다. 장제스가 머물던 군영이 있으며 쑨원이 거주하던 행궁도 있다. 민국 시대 삼민주의자 구멍위는 ‘검은깨’라는 이름의 헤이즈마(黑芝麻) 후퉁에 살았다. 허(何)씨가 제사 때 쓰는 종이인 즈마(??)를 만들던 골목으로 깨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발음이 비슷할 뿐이다. 난뤄구샹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문학가 마오둔의 고거가 있다.
‘모자’라는 뜻의 마오얼(帽?) 후퉁에 가원(可?)이 있다. 만주족 출신 청나라 말기의 대학사인 문욱의 저택이다. 베이징 문물로 보호되고 있다. 명나라 시대부터 유교를 포용한 도관인 문창궁(文昌?)이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자리를 차지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부인이자 역시 마지막 황후인 완룽의 생가도 있다. 대부분 전통 가옥인 사합원이다. 한 칸 남쪽 ‘비가 주룩주룩 내릴 듯’한 위얼(雨?) 후퉁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치바이스(?白石)가 살았다.
중국에서는 피카소만큼 유명한 작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독학으로 거장이 된 인물이다. 산수화와 인물화도 돋보이지만 꽃과 새, 곤충과 물고기를 그리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회화뿐 아니라 서예와 전각에도 대가의 자질을 보였다. 거실 벽에 나란히 걸린 회화와 서예 족자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1864년 후난성 샹탄에서 태어난 치바이스는 50대 후반에 베이징에 거주한다. 해방 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1957년 사망한다. 한중 수교 25주년인 2017년, 서거 60주기를 맞아 국내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2019년엔 앙코르 전시까지 열렸다.
문화거리는 어디나 북적거린다. 카페나 식당이 점점 늘어난다. 지나는 사람의 눈을 붙잡는 방법도 다양하다. 벽에 구형 텔레비전을 두고 시선을 끌 만한 메시지를 적었다. 외국인을 생각해서 간체자 대신에 번체자로 썼다. 시광시기억적상피찰(時光是記憶的橡皮擦), ‘세월이란 기억의 지우개’라는 말이니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늙은 홍군 전사도 미소를 보내고 있다. 중국 길거리에는 대장정이나 문화혁명의 흔적이 자연스레 표현돼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마음에서 지우지 않으려는 듯하다.
난뤄구샹에서 서쪽으로 가면 고루(鼓?)와 만나게 된다. 고궁 북쪽의 경산공원에서 바라보면 일직선으로 보인다. 약 1.8km 떨어져 있다. 고루 뒤에 종루(??)가 있다. 고성이나 사원마다 북과 종을 담은 누각이 있다. 공동체와 시간을 공유하는 전통 건축 양식이다. 신종모고(晨?暮鼓), 아침에 종을 치고 해가 질 무렵 북을 친다. 대문을 여닫는 시간이다. 당나라 시인 이함용은 ‘산중(山中)’이란 작품에서 종소리와 북소리도 듣지 않고 영욕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노래했다. 그러나 서민은 동쪽의 종소리와 서쪽의 북소리에 맞춰 바쁘게 살아갈 뿐이다.
해 뜨는 동쪽에 종루, 해 지는 서쪽에 고루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 그렇다. 베이징이라고 남쪽에서 해가 뜨고 북쪽에서 해가 질 리가 없다. 처음 건축한 왕조는 원나라다. 도성 건설의 규범인 ‘주례고공기’에 따라 좌조우사(左祖右社), 종묘사직을 건설했다. 동쪽에 태묘,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내성 안 사방에 천ㆍ지ㆍ일ㆍ월을 위한 제단을 구축했다. 중축선(中??)을 유지하려 했으며 전체의 미감을 고려해 남북으로 고루와 종루를 건축했다고 한다. 당시 도성의 중심이었다. 내성의 성문까지 모두 들을 수 있는 위치였다. 명나라, 청나라도 원나라의 포석을 그대로 유지했다.
고루를 지나 옌다이세제(烟袋斜街)로 들어선다. 청나라 말기에 곰방대를 만들어 팔던 골목이다. 똑바르지 않고 비스듬히 휘어진 길이다. 옛 전통을 살려 지금도 곰방대를 많이 판다. 특히 물담배가 많다. 주변 라이브 카페에 모인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며 긴 줄을 하나씩 물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서화나 표구, 골동품이나 공예품 거리이기도 하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호수가 펼쳐진다. 원나라 시대 10곳의 사찰이 있었다 해서 스차하이(什刹海)라 부른다.
스차하이는 첸하이(前海), 허우하이(后海), 시하이(西海) 일대를 말한다. 옛날 사찰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황제의 형제나 인척이 사는 왕부와 고관대작의 저택이 많다. 남쪽으로 베이하이(北海), 중하이(中海), 난하이(南海)까지 이어진다. 고궁 서쪽에 바다로 부르고 싶은 호수가 여섯 개다. 중하이와 난하이 지역인 중난하이에 국가주석을 비롯해 국가지도자가 거주하고 업무를 보는 건물이 위치한다. 호수는 고궁의 해자와 이어진다.
스차하이는 여름이 되면 사우나로 변한다. 불법이라고 한사코 말려도 베이징의 한여름 더위를 견디기 싫은 서민은 막무가내다.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세계 언론이 베이징에 웃통 벗은 모습이 사라졌다고 대서특필했을 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광객은 보트를 타고 첸하이와 허우하이를 잇는 다리 사이를 오가며 구경한다. 겨울이 되면 스케이트를 탄다. 호수가 바다처럼 깊지 않아 위험하지 않다. 가끔 겨울인데도 수영을 즐기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한다. 북소리조차 사라졌으니 밤마다 환락가로 변한다. 관광으로 그냥 한두 번 찾으면 볼 수 없는 서민의 삶이다.
스차하이에 유명 인사의 고거가 많다. 서민이 사는 민가도 빼곡하다. 둥관팡(?官房) 후퉁에서 무형문화재를 전승하는 바이다청(白大成) 선생을 찾아간다. 민가를 사설박물관으로 등록하고 개방해 일반인이 가도 반갑게 맞아준다. 잘 모를 뿐이다. ‘쟁반 위의 무대’라는 뜻의 판중시(?中?) 족자가 걸려 있다. 손바닥 정도 크기의 인형이 다채롭게 진열돼 있다. 2007년 베이징 무형문화재로 선정된 쭝런(?人)이다. 경극 캐릭터를 작게 옮겨 놓은 모양이다.
경극이 그렇듯 삼국지 인형이 많다. 유비, 관우, 장비는 물론이고 여포, 조조 등이 제작돼 있다. 머리 부분과 바닥을 점토로 만드는데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바닥은 갈기를 이용해 만드는데 주로 돼지의 목과 등에 난 털을 사용한다. 강인하면서도 변형이 쉽고 부드러우면서도 온도의 영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촘촘하게 갈기를 바닥에 붙인다. 쟁반 위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려면 각도와 길이가 중요하다. 얼굴은 인물의 특성에 따라 분장을 한다. 종이나 비단으로 옷차림을 갖춘다. 색칠도 정교하다.
베이징올림픽 마스코트로 만든 인형을 쟁반에 올렸다. 작은 막대기로 쟁반을 ‘땡땡땡땡’ 두드리니 쭝런이 움직인다. 빙글빙글 오른쪽 왼쪽으로 마치 환영 인사하듯 돌아다닌다. 퍼레이드를 펼치듯 움직인다. 삼국지의 두 주인공이자 앙숙인 여포와 전위를 올려놓고 ‘땡땡땡땡, 땡~땡, 땡~땡땡’ 약간의 리듬을 살려 때리니 멋진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연출된다. 진동이 만들고 갈기가 반응하는 판중시 무대다.
바이다청 선생은 3대 전승자라고 소개한다. 쭝런은 경극의 역사와 비슷하다. 청나라 말기 경극이 대중화되자 더불어 생겨났다. 만주족 출신으로 1939년생인 그는 청년기에 병을 앓았다. 취미인 회화와 서예를 배우다가 스승을 만났다. 외국인이 찾아왔으니 신기했던지 질문이 많다. 중국어는 어디서 배웠으며 중국 역사와 문화를 한국도 가르치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묻고 또 묻는다. 그러더니 요즘 젊은이는 문화재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며 한탄도 섞는다. 농담으로 외국인도 가능하냐고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더 머물렀다 가라고 한다. 최근에 그의 아들이 4대 전승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쭝런이 즐비한 그의 자택을 두 번 찾았는데 언제나 반겨준다. 입장료도 따로 없어 옷을 선물로 드렸는데 함박웃음을 잊을 수 없다.
쭝런만큼 신기한 민간 공예가 있다. 스차하이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지점에 국가체육총국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경성백공방(京城百工坊)은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2층 건물에 민간 공예가 많다. 무엇보다 마오허우(毛?)는 볼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져 혼례나 생일잔치를 벌이고 가마를 끌고 길거리 음식도 먹고 가무를 즐기기도 한다. 탁구, 철봉, 역도를 하는 장면도 있다. 하나씩 낱개로도 판매한다. 유리병에 넣어서 파는데 한 마리에 약 2,000원이다. ‘털 달린 원숭이’라는 이름이 볼수록 친근하다.
재료도 독특하지만, 공예가 생겨난 까닭도 재미있다. 청나라 말기 내성 서남쪽에 있던 약방인 남경인당(南?仁堂)이 진원지다. 어느 날 약재를 관리하는 점원이 회계 책임자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저녁도 못 먹게 되자 심통이 났고 무료했다. 약재로 쓰는 매미의 허울을 보다가 갑자기 회계 책임자가 떠올랐다. 심술 궂은 밉상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목련으로 몸통을 감쌌다. 매미의 코로 머리를, 앞다리와 뒷다리로 팔과 다리를 만들었다. 다른 점원들에게 보여주니 모두 너무 똑같다고 난리가 났다. 마오허우가 탄생했다.
공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홍극장이 있다. 입구부터 홍색으로 도배한 극장이다. 충원구 공인문화궁(工人文化?)을 개조해 2004년부터 ‘궁푸촨치(功夫?奇)’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대사가 거의 없고 음악과 무술 위주로 구성돼 외국인도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아이들도 아주 좋아한다. 매일 밤 한 차례 또는 두 차례 무대를 올린다. 소림사를 배경으로 구성된다.
무대가 열리면 소림사가 나타난다. 동자승이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엄마 손에 이끌려 소림사로 들어간다. 허난성 덩펑의 소림사 주변에 있는 수십 개의 무술 학원마다 아이들로 넘쳐난다. 연무장에 모두 나와 구령에 맞춰 연습한다. 소림사 출신의 배우인 리렌제를 꿈꾸며 체력 훈련과 무공을 단련한다. 어디 배우 되는 일이 쉬울까? 마음속으로 응원할 뿐이다.
소림사를 둘러보고 무술관에 가면 소림 무공을 볼 수 있다. 입장권에 포함돼 있으니 그냥 입장이다. 약 30분가량 진행되는데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한 무공이 제법 흥미진진하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공도 많다. 호랑이·학·표범·뱀·원숭이·독수리·두꺼비 등 동물의 동작을 분석해 만든 무공이라 쉽게 공감된다. 폭소가 터지고 박수갈채가 이어진다.
홍극장의 무공도 비슷하다. 동자승은 성장하며 무술을 연마한다. 청년이 되자 소질을 발휘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호랑이나 표범처럼 돌변하고 학과 독수리처럼 날아다닌다. 벽돌을 부수고 창과 칼로 실전을 방불케 한다. 불교의 교리도 배운다. 방황도 한다. 속세로 도망쳐 사랑에 빠진다.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무대는 서커스를 도입해 서로 줄을 묶고 공중을 빙빙 돌고 돈다. 소림사로 돌아온 주인공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승려로 대성한다.
참된 인생의 경지에 오른 대사로 성장해, 그 옛날 자신처럼 동자승인 아이에게 인생의 경험을 이야기해준다. 자막으로 보여준다. ‘순간이 영원으로 된다(瞬?化作了永恒)’고 설명한다. 무대는 막을 내린다. 인생을 달관한 대사의 독백인가? 순간마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일까? 무공을 연마해야 하나? 불교 교리를 배워야 하나? 아리송한 생각을 ‘기억의 지우개’로 지우면 그저 한바탕 신나는 소림 무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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