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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피디아] 배경 넘어 인물 감정까지... 뮤지컬 영상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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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국내 초연한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주인공 프란체스카가 미군이었던 남편을 따라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오게 된 여정을 노래한 ‘투 빌드 어 홈(To build a home)’를 부를 때 이탈리아 나폴리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프란체스카가 직접 스케치한 것 같은 흑백 그림의 영상이 무대 뒤를 가득 채운다. 관객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과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프란체스카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차를 타고 움직이는 장면은 배경에 속도감을 더하는 영상을 활용해 표현한다. 주인공들은 제자리에 앉아 있지만 대지 위를 달리고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배경을 표시하고 주인공의 심리를 나타내는 영상이 뮤지컬 무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3D 영상이 물체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프로젝터가 아닌 발광다이오드(LED)에 투사한 영상이 생생함을 배가시키는 등 관련 기술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왜 영상을 쓰나
뮤지컬 공연에서 영상이 활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대 세트보다 나은 편리성과 효용성이다. 예컨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은 미군 병사들이 사이공 함락 직전 헬기에 가까스로 올라타는 장면에서 실물 헬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국 웨스트엔드나 미국 브로드웨이 밖 투어 공연에서는 헬기 장면이 영상으로 대체됐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 뮤지컬에서 특히 영상이 많이 쓰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흔히 말하는 블록버스터 뮤지컬은 특수효과로 감탄사를 내뱉을 만한 볼거리를 통해 관객을 붙잡는다”며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장기 공연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유지ㆍ보수 비용이 적게 들면서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영상을 더 많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장면, ‘미스사이공’의 헬기 등과 같은 볼거리를 영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국내 창작뮤지컬 ‘영웅’에서는 건물에 다양한 영상을 투사해 건물 사이사이로 달려가는 독립군과 일본군의 추격 장면을 박진감 넘치게 보여줬다. ‘윤동주, 달을 쏘다’에서는 벚꽃이 만발한 교정과 경성시내가 영상으로 등장해 윤동주와 친구들의 청춘이 현실감 있게 표현된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무대 세트를 보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영상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영상은 그 자체로 공간이 되기도 하고, 무대 세트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에 초연된 후 이달 30일부터 재공연에 나서는 서울예술단의 ‘신과 함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저승과 지옥을 무대 예술로 표현하는 데 영상이 큰 역할을 했다. LED로 빚어낸 선명한 영상으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신과 함께’에서 영상을 담당한 정재진(38) 영상디자이너는 “콘서트나 방송에서는 LED 활용이 흔하지만, 무대 공연에서는 제작 여건 상 사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평범한 프로젝터 대신 LED를 사용한 이유는 “(배경이)가짜라는 게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보통 뮤지컬 한 편에서 사용되는 영상은 최대 200개를 넘지 않지만 ‘신과 함께’에서는 530개 정도가 쓰였다. 시각적인 모든 부분을 영상으로 표현한 셈이다. 무대 바닥과 벽면에는 500개가 넘는 LED가 설치됐고 지옥을 표현한 3D영상은 이를 통해 더 뚜렷하게 전달된다. 정 디자이너는 이 작품으로 창작뮤지컬 시상식인 예그린 뮤지컬 어워드에서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배경뿐만 감정표현에도 영상 활용
영상은 배경 역할만 하지 않는다. 정재진 디자이너는 “아직까지 영상은 무대에서 배경이라는 인식이 강하긴 하지만, 주인공의 심리를 영상으로 전달하려고 한다”며 “뮤지컬 무대에서 영상은 단순한 편집 그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영상을 맡았던 또 다른 작품인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배경 만이 아닌 양 옆면까지 총 3개 면에 영상을 투사해 하나의 공간을 새로 만들어냈다. 이 때 등장하는 영상은 정 디자이너가 펜화로 그린 궁궐의 건물들로 곧 무너져버릴 듯한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한다.
2014년 초연된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고흐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 700여통을 토대로 예술가로서의 고난과 고민을 그린다. 이 때 둘의 편지와 그림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림에 담긴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것도 영상이었다. 아예 영상기술을 극 연출의 핵심으로 사용하기 위해 무대도 굴곡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영상을 투사할 대상의 크기와 모양, 굴곡을 분석한 후 정밀하게 대응하는 영상을 쏘아 대상 자체가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구현하는 ‘3D 프로젝션 맵핑’을 활용했다. 제작사인 HJ컬쳐 관계자는 “프로젝션 맵핑을 대개 배경으로만 활용하던 기존 뮤지컬과 달리 복합적으로 사용했다”며 “고흐의 그림이 영상화 되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게 했고, 영상이 제3의 주인공이었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영상기술의 진화는 뮤지컬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신과 함께’에서는 3D 프로젝션 맵핑 외에도 다양한 기술을 선보인다. 실시간 음악 연주나 배우의 움직임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해 영상이 연동되는 ‘리얼타임 인터액션’ 기술로 저승차사가 등장할 때 바닥에 퍼지는 아우라를 표현해 낸다. 정재진 디자이너는 “2년 전만 해도 뮤지컬에서 영상을 활용하는 경우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앞으로는 영상 따로, 무대 따로가 아니라 조명과 영상, 무대디자인을 다 함께 버무리는 안목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종원 교수도 “뮤지컬 무대에서 영상은 단순히 배경이나 장소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입체적이고 다각적으로 활용될 것”이라며 “올해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폐막작으로 초청된 ‘폴리타’에서 3D영상이 활용된 것처럼 영상과 무대의 결합을 통해 뮤지컬 영역의 확장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덧붙였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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