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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유국 꿈 물거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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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 없다"던 다음 날 산업부 장관의 대왕고래 지키기..."R&D 실패했다 사기극이라 안 한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가스전 개발)' 관련 비판에 대해 "연구개발(R&D) 사업에 1,000억 원을 투자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사기극이라 얘기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안 장관은 7일 YTN에 출연해 '야당이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안 장관은 "이번에 1,000억 원이 들었지만 해저 심층에 있는 지층 구조에 대한 매우 귀한 1,700여 개가 넘는 시료를 확보했다"며 "이를 분석해 대왕고래의 나머지 유망구조나 추가로 나올 수 있는 유망구조의 내용을 오차 보정해 후속 탐사 성공률을 높여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산업부는 전날 대왕고래 1차 시추 결과를 두고 "가스 징후가 나왔지만 경제성이 확보될 수준에 못 미친다고 결론 냈다"고 밝혔다. 안 장관은 이번 1차 시추가 동해 가스전 개발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안 장관은 "국토 내에 유망하게 있는 자원 개발 사업의 시작이 된 부분이라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볼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1차 시추공에서 경제성 있게 가스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나머지 사업을 실패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지금이 시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안 장관은 대왕고래 인근에 위치한 다른 6개 유망구조에는 가스가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안 장관은 "가스가 (1차 시추 유망구조를) 지나갔을 경우에는 (나머지) 6개 유망구조 등 그 부근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안 장관의 주장은 대왕고래와 인근 6개 유망구조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전제 아래 나온 것이다. 국회에는 추가 예산을 요청했다. 안 장관은 "모든 개발비를 해외 투자자들에게만 의존하게 되면 나중에 개발됐을 경우 국부 유출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국회에서 허락해주면 정당한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의 예산으로 이 사업에 참여해 합당한 국부를 지키며 자원개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대통령실 "대왕고래 프로젝트 전체의 실패 아냐"... 여야, 추가 시추 찬반 팽팽

삼성전자 시총 5배라더니... 경제성 전혀 없다는 대왕고래 [영상]

#트럼프發 '관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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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무역대표 후보 "한국 등의 플랫폼기업 규제시도 맞설 것"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USTR) 지명자는 한국 등의 온라인 플랫폼 기업 독과점 규제 움직임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면서 강경 대응을 시사했다. 그리어 지명자는 6일(현지시간) 미 상원 재무위원회 인사 청문회에서 '유럽연합(EU)과 한국 등이 세금이나 특별한 요건으로 미국 기술기업을 겨냥한 조치를 진전시키는 데 대해 강하게 맞설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같이 답하면서 "우리가 다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리어 지명자는 "디지털 분야는 미국이 매우 경쟁력 있는 분야"라면서 "디지털 교역과 기술 기업 등을 어떻게 규제할지에 대해 국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미국 기업에 대한 규제를 EU나 브라질 등 다른 나라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를 차별할 수 없다.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리어 지명자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1기 행정부 당시처럼 관세 등을 무기 삼아 미국 밖으로 빠져나간 제조업 기반을 다시 미국 내로 되돌려 놓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미국은 생산국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라면서 "공급망의 회복 탄력성은 우리의 경제와 국가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리어 지명자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 멕시코 등에 행정명령 등으로 부과를 시사한 보편관세에 대해서도 무역적자 해소와 기업 유출을 막는 잠재적 방안으로 "연구되고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USTR은 미국 통상정책과 무역협상을 주도하는 기관이다. 그리어 지명자는 트럼프 행정부 1기 통상정책을 이끌었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USTR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다.

트럼프 2기 '에너지 압박' 견딜 체력 충분하다...포스코인터내셔널의 자신감 비결은

금거래소 홈피 접속 폭주로 마비... '관세 전쟁'에 금값 고공행진

#딥시크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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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에 답 없는 딥시크…개인정보위 "관련 기술 분석·해외 기관 공조"

중국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딥시크'의 개인정보 침해 논란이 커지자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자체적으로 관련 기술 분석에 착수했다. 보안상 우려가 지속되는 만큼 '신중한 이용'도 당부했다. 개인정보위는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언론 브리핑을 통해 "현재 딥시크의 개인정보 처리 방침과 이용약관, 서비스 사용 시 전송되는 데이터나 트래픽 등을 전문기관과 함께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남석 개인정보위 조사조정국장은 "처리 방침이나 이용약관을 (다른 AI와) 비교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핵심은 딥시크가 수집·처리하는 정보가 합법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느냐다. 정보 주체가 거부 의사를 밝힐 경우 데이터 수집을 멈출 수 있도록 하는 '옵트아웃' 기능 등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도 분석 대상이다. 개인정보위는 분석 결과에 더해 지난달 31일 딥시크 본사로 보낸 질의서에 회신이 오면 종합해 들여다볼 예정이다. 개인정보 수집·처리 과정과 수집 항목, 수집·이용 및 저장방식, 당국과의 공유 여부 등을 질의했는데 아직 답변은 오지 않았다. 남 국장은 "통상 수차례 질의응답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뤄진다"며 "딥시크 측 답변 내용과 (문제점으로 보는) 기술 분석 결과를 대조했을 때 차이점이 있으면 추가 질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용약관 처리 방침과 약관 자체 분석, 기술적인 분석 결과 위법성이 발견되면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른 조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개인정보위는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개인정보 규제·감독기구와 협력 체계도 구축했다. "여러 나라와 공동으로 대응할 때 (딥시크 쪽에서) 받아들이는 부담과 압력도 크기 때문"이라는 게 개인정보위의 설명이다. 또 중국 수도 베이징에 있는 한중 개인정보보호 협력센터를 통해 현지에서 소통을 시도하고, 공식 외교 채널의 협조도 구할 예정이다. 아울러 AI 사용 시 주의 사항을 담은 정책자료를 만들어 1분기 중 배포할 계획이다. 개인정보위는 딥시크로 인한 유출 우려가 클 경우 개인정보 국외 이전 중지 명령 등의 조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남 국장은 "현 단계에서는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며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되면 사후에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안전성이나 위험성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신중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안보에 중대 위협"... 미 의회, 딥시크 사용 규제 법 추진

딥시크로 'AI 서비스 적용' 빨라진 네이버..."외부 LLM 협업도 검토" 전략 바꾸나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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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 최초' 동계 아시안게임 출전... "고국의 동계 스포츠 선구자 되는 것 목표"

부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입양됐던 알파인 스키 선수 첸초 도르지(27)가 부탄 최초 동계 아시안게임에 나선다. 도르지는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알파인 스키 남자 회전 종목에 출전한다. 동계 아시안게임에 부탄 대표가 참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히말라야 산맥 동쪽의 작은나라 부탄에서 태어난 도르지는 두 살쯤 프랑스 가정에 입양됐다. '알프스의 심장'으로 불리는 몽블랑이 위치한 프랑스 샤모니에 살던 도르지는 스키장 인명구조 요원으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한 도르지는 18살이 되던 해 전문적으로 스키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스키 강사가 되기 위해 알파인 스키 회전 시험을 치른 도르지는 "스키 경주는 단순히 경사면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지점에서 더 잘, 빠르게, 정확히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그때부터 취미를 넘어 온전히 헌신하는 마음으로 스키를 탔다"고 전했다. 지난 2년 동안 10개의 국제 대회에 참가해 국제스키연맹(FIS) 포인트 280점을 확보한 도르지는 아시안게임에서 부탄 국기를 달고 가능한 한 최고의 결과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이러한 결정은 자신에게 스키를 가르쳐 준 프랑스와 고국인 부탄 모두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서 기인했다. 도르지의 최종 목표는 동계 올림픽 출전이다. 올림픽 역시 동계 종목에 부탄 선수가 나선 적은 없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부탄은 히말라야산맥과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 스포츠가 활성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종목에 대한 전통이 거의 없고, 스키나 스케이팅을 위한 전문 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실정이다. "부탄에서 동계 스포츠의 선구자가 되고 싶다"고 밝힌 도르지는 "내 고향에 새로운 걸 소개한다는 꿈이 실현됐다. 나와 비슷한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르지가 나서는 아시안게임 알파인 스키 남자 회전은 9일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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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 위기 한국에 홀연히 온 귀인… 80일 만에 전세 뒤집은 한국전 최고영웅 [명장]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의 도쿄 사령부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의정부 남방 4㎞ 지점에서 워커 미8군사령관의 지프가 국군 6사단 화물차와 충돌, 워커가 현장에서 숨졌다는 소식이다. 워커는 이날 미24사단에서 표창을 한 뒤, 해당 사단 중대장으로 복무 중인 외아들 샘 워커 대위(1977년 대장 진급)를 만날 예정이었다. 사고는 워커 부자에게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유엔군 전체로 봐도 최악의 비보였다. 두 달 전 압록강을 찍고 전쟁을 곧 끝내겠다고 큰소리치던 유엔군은 30만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38선 근처까지 퇴각했다. 되찾은 서울을 또 내주려던 찰나, 그 어려운 때 전선 총사령관이 죽었다. 보고를 받은 맥아더는 2주 전 로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적진을 넘나들며 위험한 곳을 마구 돌아다니는 워커에게 혹시나 일이 생기면, 누굴 후임으로 앉힐지 논의했었다. 맥아더는 바로 콜린스에게 미리 찍은 ‘그 사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은 1950년 12월 23일, 워커 후임으로 8군을 이끌 ‘그 사람’은 바로 매튜 리지웨이 중장. 당시 미 육군 작전·행정참모부장이다. 전쟁 발발 반년. 전황은 최악이었다. 국군과 미군은 1950년 8월 낙동강에서 버티고, 9월 인천으로 상륙해 전세를 뒤집은 뒤, 10월 초 38선을 돌파해 쾌속 북상했다. 그러나 10월과 11월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두 차례 공세를 얻어맞았다. 12월 평양, 개성을 차례로 내줬다. 이때 참전한 역사학자 시어도어 페렌바크의 말처럼 “한 번 시작된 후퇴는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되돌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흔히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까지 밀린 1950년 8월을 6.25 최대 위기로 아는 이들이 많다. 남은 영토 면적(한반도 10%) 측면에선 그럴 수 있지만, 수뇌부의 의지나 군대 사기 측면에서 최악의 시점은 1950년 12월 말(38선 이북 포기)부터 1951년 1월 초(서울 재철수)다. 우선 미국 정부와 미군 지휘부가 전쟁 의지를 접은 상태였다. 1951년 1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에게 보낸 서신은 절망적이다. “치명적 손실을 피하기 위해 대피가 명백히 필요한 상황이면, 귀관 판단에 따라 한국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라.” 맥아더가 당시 예하 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도 철수(evacuation)란 말이 자주 언급된다. 미국 국내 사정도 나빴다.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 개입을 법안으로 지원하던 민주당이 195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패배하자, 의회도 한국에 군대를 유지시키는 것을 꺼려하기 시작했다. 미국만 그랬던 건 아니다. 당시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도 회고록에서 1950년 12월 31일을 떠올리며 “극도의 허탈감으로 후퇴할 기력조차 잃었다”고 썼다. 영국 터키 등 다른 유엔군 파병국도 미국 리더십에 의구심을 가진 상태였다. 한반도 남쪽에서 싸우는 누구도 강력한 항전을 주장하지 못했다. ‘꿈도 희망도 없던 시기’다. 복싱에 비유해 보자. 낙동강 전투는 1라운드 초반 코너에 몰려 난타 당하는 상황과 같다. KO 당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잔뜩 움츠리며 소나기 펀치를 버틸 투지와 힘은 남아있다. 결국 기회를 엿보다가 회심의 레프트 훅(인천 상륙)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낙동강 돌파)를 적중시키며 위기를 탈출했다. 그러나 1.4후퇴는 체력과 정신력을 상실한 채 링 가운데서 비틀거리던 그로기 상태였다. 코치(미 정부)가 흰 수건을 던지기 직전이었다.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 자유낙하 하던 순간, 리지웨이가 한국에 급파됐다. 버티느냐, 끝나느냐.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운명이 리지웨이 양 어깨에 걸려 있었다. 리지웨이는 싸우기로 결심했다. 1895년생 리지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명장인 맥아더(1880년), 조지 패튼(188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년)의 다음 세대 장군이다. 당시 미 육군에선 장교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은 리지웨이만큼 잘 하는가, 리틀 리지웨이로 부를 인물인가’(데이비드 핼버스탬)라는 기준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 세대 장교들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경력’(토머스 릭스)을 거쳤다. 미국이 전쟁 지역 지상군 사령관으로 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카드였던 셈이다. 1950년 12월 23일 오후(한국시간) 인사 통보를 들은 리지웨이는 당시로선 기록적인 속도로 한국에 날아왔다. 하루 만에 워싱턴을 출발, 12월 26일 0시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고, 당일 오전 9시 30분 맥아더와 면담했다. 2시간 반 후 다시 도쿄를 출발, 26일 오후 4시 8군사령부가 위치한 대구에 도착했다. 27일 새벽엔 서울로 날아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리지웨이의 부임 과정은 속도, 내용 모두에서 완벽했다. 강행군 와중에도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워커 여사를 찾아 조의를 표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이동 중 미8군 장병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고, 한국 도착 직후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연락해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함께 싸워야 한다”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서울 도착 당일 이 대통령과 대화에선 미국에 대한 불신(철수 가능성)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리지웨이는 이 대통령에게 ‘철수를 위해 오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촉촉하게 눈이 젖은 고령의 전사 손을 잡고’ 신속히 부대를 정돈해 다시 공세로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승만이 가장 원했던 대답이었다. 패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리지웨이는 취임 즉시 최대한 많은 부대를 직접 방문했다. 통상 리지웨이 같이 이름난 리더가 침몰하는 조직의 구원투수로 투입되면, 자기 선입견이나 성공사례에 기반해 조직의 체질을 뜯어고치려고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편견을 완전히 빼고, 직접 본 것으로만 판단하려고 했다. 이 점이 리지웨이의 매우 특출난 부분이다. 1950년 12월 27일 오전 이승만을 만난 리지웨이는 오후부터 전방부대를 돌았다. 이날에만 미1군단, 영국29여단, 미25사단, 국군1사단, 미9군단을 순시했다. 경비행기, 헬기, 지프를 계속 갈아타며 순시를 멈추지 않았다. 다음날엔 후방 경주에 있던 미10군단까지 찾아갔다. 48시간 동안 8군 예하 모든 군단장과 사단장(동해안 국군 수도사단만 제외)을 만나, 최악의 상황을 현장 지휘관 입으로 직접 들었다. 일선부대를 순시한 리지웨이는, 그제서야 왜 세계 최강 미군이 장비도 보급도 열악한 중공군에게 밀리는지 알 수 있었다.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독일·일본을 동시에 때려잡던 미군의 전투력과 군인정신은 5년의 평화를 거치며 녹슬어 있었다. 확신을 잃어버린 지휘관, 야전교범을 따르지 않는 장교와 부사관, 군기를 상실한 병사들만 있었다. 리지웨이는 이런 군대를 다시 ‘싸우는 군대’로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점을 직감했다. 리지웨이는 즉시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사령관 재량 안에서 △따뜻한 식사를 제때 공급하고 △겨울 날씨에 버틸 방한피복을 충분히 제공하며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에 필요한 문구류를 대량 보급하는 일이다. 추위, 배고픔, 그리움 같은 ‘원초적 욕망’을 풀어주는 게 급선무였다. 기본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군대에 정신력을 요구할 수 없다는 걸 리지웨이는 잘 알았다. 그는 전장을 최대한 가까이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유엔군이 긴 후퇴를 멈추고 북진을 모색하던 1951년 1월 24일, 얼 패트리지 미5공군사령관(소장)이 조종하는 2인승 훈련기를 타고 전선에서 32㎞ 지점까지 올라가 두 시간 동안 지상 상황을 관찰했다.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했던 당시도 장군 두 사람만 소형기를 타고 적진을 정찰하는 건 웬만한 배짱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정찰 다음날 유엔군은 1.4후퇴 이후 처음으로 역공을 시작했다. 두 달 후인 3월 23일 미187공수연대전투단이 파주 문산에서 공수작전을 할 때도, 리지웨이는 상황을 보러 경비행기를 타고 최전방에 착륙했다. 병력이 가득한 맨땅에 내리기 위해 리지웨이가 탄 비행기가 다섯 번이나 앞뒤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리지웨이가 비행기에서 내려 병사들을 만났을 때, 사살된 중공군이 아직 피를 흘리고 있을 정도로 전투 상황이 급박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공수사단장으로서 직접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린 리지웨이에게, 이 정도는 흔한 현장 지휘였다. 전투 여건을 보장한 리지웨이는 정신력 강화에 손을 댔다. 살면서 ‘코리아’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미군 병사들은 왜 자신들이 이 더럽고 냄새 나는(인분을 비료로 쓰던 때라 당시 미군 회고록에는 한국의 첫인상을 냄새라고 표현한 기록이 많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리지웨이는 그걸 납득시켜야만 이길 수 있다고 봤다. 리지웨이는 1월 21일 전 장병에게 하달한 지휘서신에서 ‘왜 우리가 여기 있는지’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알렸다. 미군 투입 이유에 대해 “합법 절차를 거쳐 구성된 정부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고, 이 이상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며 군의 문민통제를 강조했다. 싸우는 이유에 대해선 “서구 문명이 공산주의를 물리치느냐, 공산주의자들이 개인 권리를 신성히 여기는 사람들(자유주의자)을 지배하게 될 것이냐가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한국만의 싸움이 아니라 자유진영 전체의 생존이 걸린 전쟁이란 점을 부하들에게 일깨운 것이다. 리지웨이는 언제나 수류탄과 구급낭을 가슴에 달고,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며, 부하들과 함께 걷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부대 시찰 때 절대 사열대에 오르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병사들을 봤다. 리지웨이는 그렇게 병사들 가까이에 있으면 “그들이 나에게 뭔가(솔직한 이야기)를 말하게 된다”고 귀띔했다. 이를 두고 핼버스탬은 “리지웨이 리더십은 평등주의 시대에 좀 더 적합했다”고 평가했다. 일장 훈시를 통해 정신력만 강조하는 구식 리더십이 아니라, 여건을 보장한 뒤 동기를 부여하고 같이 현장에서 뛰며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동기 부여’와 ‘구성원에 대한 개별 배려’를 중시하는 현대 리더십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싸울 기반을 제공하고 동기부여를 마친 리지웨이는 공격정신 주입에 집중했다. 각 부대 지휘소를 돌며 브리핑을 들을 때, 리지웨이는 방어를 묻기보다 ‘공격계획’이 무엇인지를 캐물었다. 한국 부임 중 도쿄에서 맥아더를 잠시 만난 1950년 12월 26일, 리지웨이는 “제가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반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맥아더는 “8군은 자네 것일세,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게”라고 답했다. 평생을 주인공이라고 믿고 산 맥아더가 부하에게 전권을 내어준 매우 이례적 장면이다. 1.4후퇴 때도 리지웨이는 오래 뒷걸음질칠 생각이 없었다. 평택-안성 라인에서 전열을 추스른 후, 서울 철수 불과 11일 만에 오산-수원 방면으로 중공군을 찾아 나섰다. 울프하운드 작전(1월 15~25일)으로 불리는 이 위력정찰전을 통해 수원 이남에 거의 병력이 없음을 확인하고, 바로 1.4후퇴 후 첫 반격인 선더볼트 작전(1월 25일~2월 11일)에 착수한다. 그 뒤로부터 4월까지 리지웨이는 공격 작전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전선을 위로 올리고 공산군 부대 간 연계를 차단했다. 미10군단을 투입한 라운드업 작전(2월 5~11일)으로 서울 탈환 여건을 조성한 다음, 킬러 작전(2월20일~3월 6일)과 리퍼 작전(3월 7~23일)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3월 15일 결국 서울을 재탈환했다. 이후 커레이저스 작전(3월 23~27일)으로 38선에 도달했고, 러기드 작전(4월 1~9일)으로 38선 이북 진격에 성공했다.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작은 성공’을 연달아 이어가자, 나락으로 떨어졌던 유엔군 사기도 쭉쭉 올라갔다. 리지웨이는 울프하운드부터 돈틀리스까지 여덟 개 작전을 이어가면서, ‘땅’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삼진 않았다. 중공군과 북한군 부대를 찾아 압도적 화력으로 섬멸하는 것에 집중했다. 영토 확보보단, 적 자원을 소진시키고 적병 사상자를 늘리려고 했다. 1951년 3월 서울 탈환전에서도, 도심으로 밀고들어가기보단 서울 동쪽에서 한강을 건넌 뒤 서울 우측을 포위하며 적의 퇴각을 유도했다. 서울 재수복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리지웨이가 모르지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수도 공략도 나중으로 미룰 수 있을 정도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했다. 군사적 실리보다 정치적 효과(인천상륙작전)를 먼저 생각한 맥아더와의 차별점이다.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26일 한국에 부임, 이듬해 4월 11일 유엔군사령관(맥아더 후임)으로 승진할 때까지 약 100일 간 8군사령관으로 일했다. 1951년 1월 초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했던 유엔군은 반격에 성공해 4월 38선을 넘어섰다. 도망칠 생각만 하던 군대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됐다. 군을 싹 뜯어고치고 사기를 높인 뒤, 전선을 100㎞ 이상 끌어올리는 가시적 성과까지 냈다. 첫 3주 간 중공군 예봉을 피해 후퇴작전을 해야 했던 걸 감안하면, 1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단 80일 만에 이룬 성과다. 미군 전사가 로이 애플먼은 “1951년 여름과 가을 한국에서 복무하던 수백 명과 의견을 나눈 결과, 거의 예외 없이 리지웨이가 전쟁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기억했다. 그의 업적은 전선을 위로 올렸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리지웨이가 전쟁을 ‘해 볼 만한 싸움’으로 만들자, 제주도로 한국 정부를 대피시키려던 미국 정부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 거시적으로 전쟁 판 자체를 바꿨다. 그가 오기 전 중공군에게 속수무책 밀리던 맥아더는 △대만군 참전 △중국 본토 침공 △만주 핵폭격 등 극단적 수단을 검토했다. 한반도에 파병된 미군 재래식 전력만으로 중공군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런 과격한 방안은 3차대전의 불씨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의 서울 재수복 이후 이런 주장은 쏙 들어갔고, 미국 정부는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한국전쟁을 ‘관리’할 수 있었다. 리지웨이가 혼자 힘으로 전황을 유리한 쪽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면서, 트루먼 대통령도 일개 장군(맥아더)에게 끌려다니던 비정상적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리지웨이의 개인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번질 뻔 했던 전쟁을 유엔군 통제 범위 안으로 끌고 온 셈이다. 그래서 한국전쟁 중 가장 전공이 컸던 유엔군 장군을 한 명 골라야 한다면, 주저없이 리지웨이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 미국 전쟁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미국 현대 군사 역사에서 리지웨이처럼 단시간에 지고 있는 전쟁을 회복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이 시리즈가 첫 번째 인물로 리지웨이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리지웨이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한국전쟁이 철저히 미국에서 ‘잊혀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처럼 장쾌한 승전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았고, 베트남전처럼 처절하게 실패한 전쟁도 아니다. 미국인들에겐 그저 ‘이국만리에서 벌어진 당혹스럽고 어정쩡한 충돌’(핼버스탬)에 불과했다. 미국의 역량을 모두 쏟은 총력전도 아니었다. △중국 본토로 반격 금지 △소련을 자극할 군사행동 금지 △핵무기 사용 금지 등 여러 조건이 더덕더덕 붙은 상황에서 싸우는 제한전이었을 뿐이다. 만일 한국전쟁이 유엔군의 승리와 공산군의 항복으로 마무리된 ‘영광의 전쟁’이었다면, 아마도 지금 리지웨이는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 못지않은 무명(武名)을 누리고 있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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