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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에서 세상을 만납니다

입력
2025.02.06 22:00
26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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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선 길이었다. 이즈미르까지 버스에서 밤을 새며 이동하는 날, 행여 추울까 담요도 챙기고 잠에 도움될까 목베개도 넣었다. 20시간짜리 버스노선 중간 중간 들르는 터미널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리면 빈자리는 또 다른 승객이 채운다. 구겨져 있던 다리도 한번 풀고 아저씨들은 오순도순 모여 담배도 태우는 십여 분의 휴식시간. 버스 제일 앞자리에 이스탄불까지 먼 길을 가는 모녀가 나란히 앉았고, 차창 앞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가 우두커니 섰다.

"추운데 들어가세요" "아냐, 가는 거 보고" "얼른 가세요" "괜찮아, 가는 거 보고" 차창을 사이에 두고 입만 뻐끔뻐끔하며 대화를 주고 받는데, 들리지 않아도 무슨 말이 오가는지 다 알 수가 있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딸의 손짓과 어린 손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아버지. 오랜만에 큰맘 먹고 친정에 다니러 온 딸을 배웅하는 아버지는 차마 먼저 자리를 뜨질 못했다. 행여 지금이 마지막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은 애써 감추고, 태연한 듯 웃으며 소소한 모습까지 눈에 담아놓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코끝이 시큰했다.

떠나는 고통을 못 이겨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사람도 아바나 공항에서 만났다. 미국과의 관계회복 전이라 쿠바·미국 사이의 항로도 끊겼던 시절, 흰색 정장을 입은 커다란 남자가 꺼이꺼이 울며 공항 로비를 뒹굴고 있었다. 이런저런 경로로 힘겹게 들어왔다가 돌아가는 망명 쿠바인이었다. 쿠바 사람들이 좋은 날 차려 입는 하얀 재킷은 온통 먼지가 묻어 주름졌고, 모처럼 찾은 고향에 으스대면서 차고 왔을 큼직한 시계는 철컹철컹 바닥에 부딪쳤다. 국가 간의 관계 때문에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출국 터미널의 이별은 산만 한 덩치의 어른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게 만들었다.

공항에 여행의 설렘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우리에겐 가까운 동남아 휴양지를 연결하는 용도인 저비용 항공이 유럽에선 이주노동자 생태계의 한복판에 있다. 높은 임금과 일자리를 찾아 동유럽 인력들이 서유럽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요즘, 관광 차원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도시들을 저비용 항공이 연결한다. 이주노동자가 집중된 공장지대와 그들의 고향을 오가는 항로로, 이탈리아의 베르가모 역시 이런 저비용 항공의 메카다. 늦은 밤 도착해 이른 새벽 비행기를 기다리는 출발 터미널에는 피곤에 전이주노동자들이 가득했다. 굳이 시내에 구경 다녀올 이유가 없는 이들은 익숙하게 노숙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찾고 최적화된 자세를 잡더니 잠시 눈을 붙인다. 이탈리아 명품의 생산라인을 돌리는 것도, 롬바르디아 평원의 쌀농사를 책임지는 것도 베르가모로 모여든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살던 베르가모는 코로나19의 1차 유행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여행작가라는 직업을 설명할 때면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곤 한다. 익숙해졌던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순간, 지금 도시와 다음 도시를 연결하는 '터미널'은 집을 떠난 온갖 이들이 머무는 진정한 길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리고 어디에도 아직 닿지 않은 일시적인 노숙신세일 때 슬며시 많은 것들은 속내를 드러냈다. 아직 집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게 가슴의 울림을 찾는 이들에게 세상의 이면을 보고픈 이들에게, 가끔은 여행을 권하는 이유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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