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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리운 날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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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기자로부터 그동안 읽은 책 중에서 꼭 한 권을 꼽는다면 어떤 책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먹고사는 일이 급급했던 부모 밑에서 어찌어찌 살아온 것은 운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그 모든 길에는 책이 있었다. 많은 책들이 스스로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한 발 한 발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충분히 다른 길로 갈 수 있었던 내가 그나마 글로 밥을 벌고 지금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의 한 권의 책을 꼽기란 쉽지 않다.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책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중 하나를 말하기는 사실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새 읽었던, 아니 한두 달 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꼽으라면 좋겠다 싶었다. 꼭 한 권을 꼽을 수 없다고 말하자 그는 그래도,라고 말했다.
어떤 책을 말하나, 서가를 둘러봤다. 책장은 제법 소란스럽다. 이 책 저 책 오래된 책들이 많다. 한쪽에 꽂힌 시집들로 눈이 갔다. 어느 날 책들을 다 정리해야 한다면 아마도 시집을 마지막에 정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집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버릴 시집은 무엇일까. 시집 한 권 한 권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멈추기를 반복하다 한 권을 빼 들었다. 신대철의 '무인도를 위하여'란 시집이었다. 책 뒤에는 1983년 5월 5일에 구입한 것으로 메모돼 있었다.
낡은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 '사람이 그리운 날 1'을 소리 내 읽었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속을 지나왔습니다.'로 시작되는 시의 첫 연은 '아는 사람 하나 만나고 싶습니다'로 끝난다. 이어서 2연 '무명씨,/내 땅의 말로는/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 …….'로 시가 끝난다. 시를 읽는 내 목소리가 가만 떨렸다.
시 읽기가 끝나자 그가 말했다. 결국 사람으로 귀결되네요. 그는 인터뷰 초반에 내게 왜 책방을 차렸느냐고 물었고 나는 혼자 심심하니까 사람들과 같이 놀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참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망연해졌다. 40여 년 전에도 사람을 그리워했고, 지금도 사람을 그리워하다니. 언젠가 똑같은 질문을 받고 똑같이 답했을 때 한 친구가 되물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가? 그러게,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가.
과거 밥을 벌던 일도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많은 인터뷰이들은 많은 책과 함께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지금은 어떤 이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책방에서 사람을 만난다. 누군가 고른 책 한 권을 보며 눈이 빛나는 순간이 있고, 한두 마디로 마음이 열리는 찰나가 있다. 때로는 마음에 물결이 일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 발짝 나는 다른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문득 아는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젊은 시절이라면 전화번호를 뒤적거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집 앞 커다란 느티나무 사이를 따라 마을을 산책하거나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다. 달려 나갔을 광화문과 인사동 같은 곳은 너무나 멀고, 전화 한 통화에 달려 나올 사람도 이젠 없다. 사람이 떠난 공간은 내게 더는 장소로서 의미가 없다. 비록 사람보다 바람이 더 잦은 시골책방이지만 누군가 들꽃 향내를 풍기며 들어설 때 나는 반색한다. 마치 오래 그리워한 이가 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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