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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주인공이 돼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입력
2022.01.08 00:00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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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벌써 6년 전이다!) 문학동네에서 전자책 형태로 배포한 '젊은 작가의 책'에는 여러 작가들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문학 속 인물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면 누가 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황정은 작가의 대답이었다. "문학 속 인물이라뇨. 그런 것이… 되고 싶겠습니까?" 읽자마자 흐흐흐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황정은 작가의 답변의 함의가 내가 생각한 것과 일치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 답변을 이야기의 주인공이 겪는 필연적 고난에 대한 진술로 생각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욕망이 잘 안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주인공이 삶의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을 보려고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삶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분투하고 고난을 겪는 과정이야말로 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은 주인공이 고난을 특유의 기지나 특성으로 헤쳐나갈 때 재미를 느낀다.

20대의 마지막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그 답변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맴돈다. 나도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 속의 인물도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돌아보면 지난 한 해는 이야기 속의 인물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 별들 사이에서 빛나는 나 자신을 욕망했다. 업계에서 더욱 유의미한 존재가 되고 싶었고 떼돈을 벌고 싶었다. 그 욕망을 이루려면 꽤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마법처럼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청년에게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도전하라고, 스스로를 개발해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에 덧붙여지는 멋진 이야기들도 있었다. 저길 봐, 저 사람은 26세에 얼마를 벌었고 지금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발달한 소셜 미디어 덕에,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란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갈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듯했다. 경쟁의 격류 속에서 꽤 자주 실패했다. 어떤 고난 앞에서는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불안했다. 가끔 너무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러닝머신 위에서 발을 맞추지 못해 굴러떨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해 보기로 한다. 현실에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 극히 희소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아마도 내가 이 현실이란 무대 위의 수많은 경쟁의 이야기들 속에서 승리하는 주인공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승리하는 주인공이 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현실에 안주하고 거기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는 요즘 대단히 순진한 시선으로 인식되는 듯하지만, 나는 희박한 확률로 승자가 되는 자신을 꿈꾸는 것이 좀더 순진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주인공이 되는 스스로를 욕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전과 고난과 분투는 픽션에서 대신 즐길 수 있기를.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자신의 모습만을 꿈꾸기를. 스스로 내 삶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을 굳이 바라지 않기를. 행복은 안온하나 사실 꽤 지루한 것이기도 함을 내가 깨달을 수 있기를 올해는 간절히 바란다.


심너울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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