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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장애를 부정하기

입력
2021.08.20 19:00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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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섭외를 받았다. 장애와 문학을 주제로 하는 방송이었다. 장애 문학을 소개하고 비장애인의 편견을 허물기 위하여 장애를 가진 작가, 장애를 주제로 한 글을 쓰는 작가를 주로 섭외한다고 알렸다. 나는 정신과를 7년 넘게 다니고 있다. 겁이 났다.

이런 종류의 외부 활동은 집구석에서 원고를 쓰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매력적이다. 글 쓰는 것에 비해 드는 시간은 적고, 보상은 많다. 책을 쓰다 보면 얻게 되는 일종의 달콤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흘리고 다니는 게 대단히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말은 필터가 없다. 내 뇌가 빚어낸 즉흥적인 생각은 잘 다듬어지기도 전에 성대와 혀를 타고 구체화된다. 주워 담을 수 없는 헛소리야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했는데, 거기 또 지독한 업보를 얹고 싶지는 않다. 역시 돈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고 나는 이제 외부 활동이 불안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포의 이유가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장애를 가진 작가로서 내가 초대되는 것이 두려웠다.

딱히 내 병을 밝히는 것이 불편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가 정신적 손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품고 있다. 한때 1년 동안 방구석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여러 자원이 있고 치료도 빨리 받아서 내가 가진 정신적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나름대로 익혔다. 병은 민망하지 않다.

“내가 장애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장애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믿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다. 당장 장애를 생각하면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신체적 거동의 손상과 휠체어다. 그다음으로는 와해된 언어 같은 심각한 정신증적 증상들이다. 우울, 불안이나 ADHD 같은 단어는 장애라는 범주에 포섭되기에는 너무 가볍다고 생각했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이야기한다는 불편감을 안고 녹음실로 향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녹음을 끝내고 며칠 지난 지금, 불안이 조금 가셨을 때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본다. 내가 느꼈던 그 공포와 불안은 내 자신을 장애에서 분리하기 위한, 그러니까 장애를 타자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는 나를 비장애의 영역에 두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니 그렇다.

정신병과 공존하는 법을 익혔다는 자부심도 일정 부분 비슷한 심리에서 발한 듯도 하다. 아무렇지 않게 병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나는 내가 ‘충분히’ 사회성 있음을 보인다. 병이 민망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용기 있는 고백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비장애인들의 사회에 편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정신적 손상은 평생 지속될 것이다. 계속 향정신성약물을 먹어야 할 거라는 말을 미리 의사에게 들어 알고 있고, 여전히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생각을 한다.

미리 품었던 걱정 중 오직 하나만이 유의했다. 나는 들떠버렸고, 별생각 없이 온갖 헛소리를 했다. 녹음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수면제를 삼키기 직전 내가 한 막말들이 두뇌에 벼락처럼 쏟아졌다. 구업을 쌓은 자를 위한 지옥이 너무 뜨겁지는 않길 바라며, 풀썩 쓰러져 잠들었다.



심너울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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